카타르 왕족이 소장한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캔버스에 유채, 97×130㎝, 1892-93)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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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 아트페어’가 열리면서 한국미술은 지금 시장의 계절이다. 2012년 화가 폴 세잔의 작품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역대 미술품 판매 최고가인 2억5천만달러(약 2800억원)에 팔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전 최고가 작품의 두 배에 가까운 가격이고 여전히 근현대 작가 가운데 최고가로 남아 있다. 흔히 현대미술의 창시자라고 하면 피카소나 뒤샹을 떠올리지만, 의외로 전문가들은 세잔을 지목한다. 따라서 세잔의 이런 작품 가격은 현대미술의 창시자라는 프리미엄이 크게 작용했다.
세잔의 작품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보자. 그의 그림이 과연 아름다운가? 대부분의 사람은 미술이 아름다운 것이고 제일 좋은 작품, 제일 비싼 작품이라면 당연히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잔의 작품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말할 사람은 있어도, 가장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미술의 가치평가 기준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잔 작품의 무엇이 좋은 것인가?
아름다움과 숭고
우리는 “모든 사물을 구, 원통, 원추로 보라”는 세잔의 말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아무도 자신 있게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피카소와 브라크에게 영향을 줬으니 아마도 대상을 입체로 환원하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그 환원이 진전돼 궁극적으로는 추상을 낳았다는 정도가 그나마 일반적인 이해일 것이다. 그런데 세잔이 후배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이 내용은 베르나르의
책 <회상의 세잔>을 읽어보면 뜻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연속돼 있어 빛을 받으면 그러데이션이 생기는데, 평면상의 이런 미묘한 변화를 지각하려면 평면을 곡면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상을 이렇게 지각하면 윤곽선과 색채가 분리되지 않음에 따라, 세잔에게 전통적인 선과 색채의 대비는 무화된다. 그는 대상을 소묘하고 그 위에 색을 덧칠하는 것이 아니라, 넓적한 붓질로 색 파편을 쌓아 올리는 식으로 화면을 채운다. 대상의 윤곽도 선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색 조각들이 겹치는 경계를 따라 생겨난다. 이렇게 그려진 그의 작품은 대상의 죽은 모사가 아니라 대상이 새롭게 태어난 듯 생동감이 있고 견고하다. 그것은 시각적일 뿐 아니라 촉각적이고 심지어 소리가 들리고 향기가 나는 듯해서 아직 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 감각을 간직한다.
세잔 작품의 좋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아름다움과 갈라선다. 그의 작품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작품의 내용뿐 아니라 소묘와 색칠이라는 회화의 형식마저 전복했다. 기존 회화 개념으로 세잔 작품을 보면 당연히 당황하고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대신 개념이라는 필터가 사라진 그의 화폭 위 세상은 기대하지 않던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충만하다. 아쉽게도 이는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이 아니다. 아름다움과 숭고라는 감정을 대비시켰던 칸트는 ‘미는 취미의 공통감에 기반하지만 숭고는 그렇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말하자면 세잔의 작품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느끼게 한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를 정초한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동시대의 예술, 즉 아방가르드
(전위)는 미가 아니라 바로 이 숭고를 드러내야 하고, 이를 위해 기존 예술의 재현적인 내용뿐 아니라 형식마저 전복할 것을 요청했다. 리오타르의 이 주장에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소수의 전문가와 비평가의 전유물이 돼버린 예술을 되찾아 대중에게 돌려줘야 하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필요와 욕망을 접합할 수단, 즉 합리적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자는 마치 미술 전문가와 대중의 입장을 각각 대변하는 듯하다.
이제 다시 시장을 돌아보면, 세잔의 작품이 세계 최고가이고 피카소와 워홀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시장이 아방가르드에, 즉 전문가의 손을 들어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은 처음에 그토록 낯설던 세잔, 피카소, 워홀의 작품이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아름답게 보이는 경험을 뒤늦게 한다. 그렇다면 이제 작품을 보고 느끼는 순서가 바뀐 셈이다. 아름다워서 좋은 게 아니라 좋아서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자꾸 보면 예뻐 보이는 현상을 우리는 이미 유행의 변화에서도 늘 경험하지 않는가?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예술은 개념적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세계의 빈틈을 찾아 메워주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언어로, 특히 개념으로 지각하고 사유한다. 그러나 개념이나 언어의 해상도는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다. 그 헐거운 사이사이로 세상의 무한한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기능을 예술이 한다. 이미 개념으로 지각하고 사유하는 데 물들어버린 대중에게 이런 새로움은 낯설고 난해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고 다시 재현이라는 개념의 영역으로 돌아간다면 굳이 예술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시장은 대중이 참여하는 장인 듯하지만 세잔, 피카소, 워홀의 예에서 보듯 아방가르드의 경로를 따른다. 섣부른 화상이나 컬렉터는 자기 안목을 믿고 작품을 팔고 사겠지만 난해한 현대미술의 현장을 누비지 않고 시장 문턱만을 오가며 자기 안목에 기대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미술계에 시장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시장이 현장을 지배한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시장은 단지 현장 검증을 기다리며 시차를 두고 따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돈의 힘은 막강하다. 그러나 돈은 어리석지도 게으르지도 않아서 지식을 좇는다.
세잔에 심취했지만 논의는 부재
일본의 경우, 세잔은 이미 1902년 <미술신보>에 언급되고 1910년 동인지 <시라카바>(白樺)의 창간멤버인 평론가 아리시마 이쿠마에 의해 ‘감각’이라는 키워드로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1920년대에는 서구 문헌을 바탕으로 당시 서구의 형식주의적 해석과는 다른 ‘인격’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잔상을 형성하면서 세잔 붐이 일었다. 1920년대 말 이후 일본에 유학했던 한국의 초기 근대 화가들은 일본의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세잔에 유독 심취했지만, 세잔 회화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았고 평단에서도 그 논의는 부재했다. 그래서 우리의 난해한 현대미술 이해는 세잔에게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