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전국 각지에서 모인 교사들이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의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는 집회 도중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 발전의 장기비전과 전략을 모색해온 ‘정책공간 포용과 혁신’이 단기적인 정책 쟁점뿐 아니라 향후 2050년까지 중장기적인 미래 어젠다를 발굴하고 제시하는 글을 한겨레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포용과 혁신은 2021년 창립된 민간 싱크탱크로서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120여명의 진보적인 교수와 연구자들이 모인 정책공간입니다. 게재 글은 격주로 열리는 목요포럼의 발제와 지정토론을 중심으로 임채원 포용과 혁신 정책기획위원장(영국 에딘버러대 방문학자)이 맡습니다.
한국 교육계의 근간이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있다.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극단적 선택에 이어 대전에 있는 교사도 민원 학부모 문제로 고민하다 또 다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얼마전 여의도에서는 이례적으로 10만명 이상의 교사들이 모여 교권이 상실되어 가는 현실을 고발했다.
‘정책공간 포용과 혁신’의 목요포럼은 교권을 비롯한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평준화 등 교육의 핵심 쟁점에 관한 토론회를 열었다. 이범 교육평론가가 ‘진보 교육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주제를 발표하고 김용 교원대 교수와 김훈호 공주대 교수가 지정토론으로 참여했다.
이범 교육평론가
“진보 교육계는 공교롭게 진보 정부인 문재인 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활력이 약화되었고 조직, 담론, 정책 등 영역에서 반전의 계기가 보이지 않는다. 진보 교육의 약점을 짚어보며 혁신의 계기를 검토해 본다.
교권도 학생인권도 미비
교사에 대한 존중은 문화적 전통이었을 뿐, 법령적 근거가 빈약했다. 즉 법령상으로는 교권도 학생인권도 미비했다. 2010년대 학생인권조례, 체벌금지, 아동학대법 등의 법령이 마련된 반면, 교권(교사 인권 및 교육활동권)은 보수와 진보 모두 방기했다. 이로 인해 ‘학생인권조례에 의해 교권이 침해되었다’는 착시현상이 나타났다. 진보의 직무유기는 집단으로서의 약자(minority)를 옹호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는 데에서 기인한다. 노점상, 길고양이, 노동자, 여성, 아동 등 약자를 집단으로 사고하는 데에서 벗어나, 상호교차성 개념을 참조하여 약자 개념의 개별화·맥락화를 수용해야 한다.
교실 붕괴의 일반고 현상
특목고, 자사고, 비평준화 지역 명문고 등을 더해도 중학교 졸업자의 5%에 불과하다. 학급당 2명 이내의 성적우수자가 특목고·자사고로 진학했다고 해서 일반고가 ‘황폐화’될 리는 없다.(이명박 정부 때 자사고 지정이 집중된 서울은 사정이 다르나 여기서는 전국 평균만을 고려함) 이미 1990년대 시작된 ‘교실 붕괴’의 주요 원인은 인문계(academic) 교육이 적성에 맞지 않는 학생들이 인문계고(일반고)로 입학함으로 인한 ‘적성 미스매치’다. 고교 단계에서 직업교육은 1980년대 이후 꾸준히 감소하여 현재 직업교육 프로그램 이수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인 21%다.(OECD 평균 46%) 이는 산업정책이 관치·개발독재로 치부되어 약화되는 추세 속에 대중영합, 온정주의 등이 확산된 탓이다.
혁신학교 학력저하론은 허위다. 혁신학교 지정 전에 비해 지정 후에 학력은 비슷하게 유지되거나 약간 높아진다. 다만 일정 시점의 혁신학교 평균학력이 비혁신학교 평균학력보다 낮은 것이다. 진보 교육감들은 ‘혁신학교가 저소득층 지역에 많기 때문에 평균 학력이 낮다’는 해명을 차마 하지 못했다. 혁신학교 운동의 첫째 한계는 ‘구성의 오류’다. 교육혁신의 목표는 혁신학교의 보편화가 아니다. 교육부-교육청은 혁신을 방해하는 역풍을 일으키고 있고 혁신학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지프의 노동을 하고 있다. 학생부 작성 규제만 100페이지가 넘는 환경에서 창의적인 교육은 어렵다. 진보는 ‘규제 완화’를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해왔으나, 규제의 대상이 기관(학교)이 아닌 개인(교사, 학생)일 때 이같은 비판은 오류다. 한국의 진보는 아직 ‘개인’에게 자율을 부여한다는 목표가 없고 공동체주의에 안주한다. 혁신학교 운동의 둘째 한계는 학종을 지지했다는 점이다. 학종-수능(또는 수시-정시) 논쟁은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최초의 포퓰리즘적(엘리트/대중 구분에서 출발하는) 구도의 논쟁이었다. 학종이 계층상승 촉진, 공교육 개선효과에 있어 유리했으나, 경쟁에 지친 대중은 부담 완화, 반칙 방지를 우선시했다.
재정 계획 없는 대학평준화 문제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는 서울대의 학벌을 ‘공유’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놀랍게도 합리적 재정 계획이 없다. 그래서 가칭 한국대(거점국립대 통합 대학)와 연고대에 동시 합격한 지원자라면 연고대를 선택할 것이다. 즉 국립대 통합은 1등 자리를 연고대로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학벌을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대학서열에 명성, 학연, 위치(인서울 효과) 등도 영향을 주지만 가장 주요한 요인은 재정이다. 인과관계를 정리해보면 ‘재정격차→교육품질격차→대학서열→학벌’인 것이다. 그 증거가 카이스트, 포항공대, 한예종 등 신설대학임에도 곧 최상위권 대학이 된 사례다. 유럽에서 경쟁적 선발을 하는 학과의 비율이 프랑스는 0%, 독일은 40%, 핀란드는 100%이다. 그런데 독일, 심지어 핀란드에서도 대입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이유는 대학들의 교육품질이 비교적 고르기 때문이다. 즉 평준화의 핵심은 입학제도가 아니라 교육품질이다. 박정희의 고교평준화는 상부구조(입학제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재정)도 바꿨다.”
지정토론에 나선 김훈호 교수는 진보교육 진영에서 제안한 여러 고등교육 혁신 방안들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진보교육 진영의 교육혁신 노력은 학교 현장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통해 학생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받기 시작했다. 수월성 교육 중심의 ‘고등학교 유형의 다양화’ 흐름에 제동을 걸었으며, 혁신학교 도입을 통해 입시위주의 획일적인 교육과정 운영에서 벗어나 학교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자율적으로 교육활동을 운영하는 새로운 학교 모델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국립대학 통합 네트워크나 서울대 10개 만들기 논의 또한 고착화된 대학 서열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적 시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과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계와 과제도 함께 남겨주었다. 학생․학부모의 권리는 크게 확대되었으나, 이들의 책임이나 의무는 간과되었으며, 이들의 권리와 교권의 관계를 설정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남겼다. 특목고․자사고 등의 일반고 전환에 치중하면서 특성화고나 고교직업교육에 대한 관심은 소홀해졌으며, 혁신학교의 양적 확대에 치중한 나머지 혁신교육에 대한 학교구성원의 이해나 필요성 인식, 자발적 노력 등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 서열화를 넘어 지역 서열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진보교육 진영에서 제안한 여러 고등교육 혁신 방안들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만큼 진보교육 진영이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들 또한 적지 않아 보인다.”
김용 교수는 토론에서 새로운 교육 양식과 계층화의 관계에 대해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을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교사들의 안타까운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학교폭력 문제에 대하여 사법화를 통한 엄벌주의적 접근을 선택한 결과이다. 그런데 학부모들의 교권 침해에 대하여 교육부가 해당 사실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는 등 과거 전철을 밟고 있는 점이나 정치권 일각에서 학생 인권을 존중하는 정책을 문제 삼는 일은 우려스럽고 잘못됐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 모두의 권리를 조화롭게 실현하는 과제가 제기된다.
1990년대 말부터 사회 계층이 공고화하면서 학생들 사이에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에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의 교실붕괴는 상당수 학생들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학업 의욕을 잃어버린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현 정부는 자사고와 외고를 존치하여 다시 이명박 정부의 정책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고등학교의 서열화와 상당수 고등학교의 황폐화가 재현될 것이다.
혁신학교는 새로운 교육 양식으로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갈 힘을 기르고, 학교를 공동체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미래 역량을 학력과 대비하는 과정에서 학력을 경시한다는 비판을 자초한 점과 토론수업이나 과정 중심 평가 등 새로운 교육 양식과 계층화의 관계에 대해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번 교육 문제에 대한 토론은 진보 교육에서 드러나고 있는 여러 쟁점들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해결책이 만만치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무너지는 교권, 연이은 교사들의 극단적 선택 등은 교육의 곪은 문제들이 드러난 부분에 불과함을 알려주고 있다. 이번 토론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교육 현실에서 본격적으로 더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