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형마트의 밀가루 판매코너의 모습. 연합뉴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라면값 인하 발언’에 이어 이번엔 정부가 밀가루 가격 안정화를 위한 제분업계 압박에 직접 나섰다. 앞서 라면업계가 “국제 밀 가격이 내렸다 해도 제분업계에서 밀가루 가격을 조정하지 않아 라면 가격 인하가 어렵다”고 항변하자, 라면·과자·빵 등 먹거리 물가에 영향을 주는 밀가루 가격부터 잡겠다고 나선 모양새다. 하지만 제분업계 쪽은 “원맥 선물 가격의 변동성이 워낙 심한데다 다른 제반 비용이 크게 올랐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어 정부의 압박이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6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에이티(aT)센터에서 씨제이제일제당, 대한제분, 삼양사 등 한국제분협회 회원사 7곳을 불러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농식품부는 “밀 수입 가격이 하락한 것을 밀가루 가격에 적극 감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제 밀 가격이 안정화한 만큼 국내 제분사들도 밀가루 가격 조정에 나서달라는 얘기다.
실제로 국제 밀 선물 가격은 지난해 5월 톤(t)당 419달러까지 올라 정점을 찍은 뒤 내림세를 보여 이달 현재 톤당 243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앞서 지난 18일 이와 관련해 추경호 부총리는 “현재 국제 밀 가격이 50% 안팎 내렸다”며 “(라면업계가)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가격을) 내렸으면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라면업계가 “제분사가 밀가루 가격을 내리지 않았다”며 가격 인하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정부가 밀가루 가격 인하가 이뤄져야 라면값 조정도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제분업계 쪽은 밀 선물 가격이 반영되기까지는 4~6개월 이상의 ‘시차’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밀 선물 가격 등락만으로 가격 인하 여력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제분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 생산되는 밀가루의 원료인 원맥은 가격이 폭등했던 시점에 구매한 것이라 당장은 가격 인하를 하기 어렵다”며 “지금 떨어진 선물가격으로 계약해도 3분기 말이나 돼야 밀가루 생산에 (가격이)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제반 비용의 상승도 고려해야 한다고 업계는 강조한다. 또다른 제분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해상운임이 2~3배 폭등했고, 인건비·에너지 등 모든 비용이 올랐다. 5월 기준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통관 가격은 고작 4% 정도 내렸다”며 “단순히 밀 선물가격이 내렸으니 가격을 내리라는 요구는 복합적인 업계 사정을 무시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이어 “올여름 닥칠 슈퍼 엘리뇨의 영향으로 국제 밀 선물가격이 최근 다시 오름세를 보이는 등 변동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무역협회 통관 자료를 보면, 지난해 5월 톤당 433달러였던 밀 통관 가격은 올해 5월 421달러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농식품부는 지난 3월에도 제분업체들과 만났지만, 업계 쪽은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며, 결국 밀가루 가격 인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날 간담회 이후에도 정부와 제분업계 사이의 입장 차이는 계속됐다. 농식품부 쪽은 보도자료를 내어 “제분업계가 7월에 밀가루 출하가격 인하 가능성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업계 쪽에서는 “정부의 물가안정 노력에 공감하고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특정 시점을 못 박은 적이 없음에도 농식품부가 간담회 뒤 참석자들에게 문자를 보내 ‘7월 출하가격 인하 검토’로 보도자료를 낼테니 양해바란다고 일방적으로 알려왔다”며 “시점을 못 박아 밀가루 가격 인하를 검토하겠다는 발언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라면 등 식품업계는 농식품부와 제분업계의 간담회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지만, 일개 품목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고 나서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도 나온다.
라면업계 한 관계자는 “실제로 라면값에서 밀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 언저리에 불과하고, 다른 재료인 전분·설탕 등은 계속 오르고 있다”면서도 “제분업계가 밀가루 가격 인하에 나선다면, 라면업계도 그만큼의 인하 여력이 생기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식품업계 관계자는 “추 부총리 발언 이후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나서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고 나선 것은 과도한 개입”이라며 “하지만 제분업계가 압박에 못 이겨 가격 인하에 나설 가능성이 있고, 결국 라면·제과업계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예의 주시 중”이라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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