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영국 런던대 교수가 5월29일 줌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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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할 무렵인 2020년 4월 한겨레신문사의 경제 매거진 <이코노미 인사이트>와 한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본주의의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세계금융 위기 이후 불거진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19가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 교수는 3년 전 인터뷰 말미에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등을 잇는 후속작을 두고 “제가 음식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고 음식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음식 얘기를 하면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기에 음식과 경제학을 엮는 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살짝 귀띔했다.
장 교수는 이때 예고한 대로 음식 재료 18가지를 소재로 한 경제학책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올해 3월 펴냈다. 그는 책에서 마늘·멸치·초콜릿·국수 등을 소재로 공정과 불평등, 제조업과 서비스업, 민영화와 국영화, 규제 철폐와 제한, 금융 자유화와 금융 감독, 복지 확대와 축소 등 경제 현안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현재 영국 런던에 있는 장 교수에게 △새로 나온 책 △코로나 이후의 세계경제 흐름 △윤석열 정부의 1년 평가에 관해 물어봤다. 인터뷰는 지난달 29일 화상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케임브리지대에서 런던대로 옮기셨습니다.
“케임브리지대는 1986년부터 36년 동안 있었네요. 제가 소속돼 있는 런던대의 동양·아프리카대(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는 대영제국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영국에서 반제국주의 선봉에 선 진보적인 학풍의 학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웃음)”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강연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올가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다른 남미 나라와 마찬가지로 좌우 대립이 극심한데요. 중도 단체들에서 좌·우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달라는 강연 요청이 왔어요. 장기 투자를 끌어내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 등 좌와 우에서 놓치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얘기했습니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10년 만에 나온 책입니다. 18개 음식 재료를 경제학으로 풀어냈는데요. 집필할 때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전작보다 글 쓰는 점에서 더 어려웠습니다. 경제학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을 위해 글을 재미있게 써야 했죠. 특히 음식과 경제학을 잘 연결해야 하는 점이 쉽지는 않았어요.”
―책을 보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신고전학파가 득세하면서 경제학이 영국 음식처럼 단조로워졌다고 나오는데요.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크게 3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수학과 통계학을 결합한 신고전학파는 계량화를 통해 과학적인 학문을 강조합니다. 숫자로 바꿔놓으면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허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가사노동은 국내총생산(GDP)에 포함되지 않거나, 산업발전이 오히려 환경오염을 불러오는 문제 역시 반영되지 않죠. 둘째는 신고전학파가 인적 독점을 통해 권력화되고 있는 점입니다. 주요 경제학 저널들의 편집인들은 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고, 이들은 신고전파가 아닌 논문은 실어주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한 건데, 신고전파 학자들이 체제 순응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기존 소득·재산·권력의 분배를 일단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개선하려고 합니다. 체제에 근본적인 도전을 안 하니, 권력자들이 좋아하는 거죠. 이런 이유가 맞물리며 신고전학파들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정치적으로 지원받게 되니 경제학을 독점하게 된 거죠.”
―교수님은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학을 알면 이를 바탕으로 시민이 목소리를 내고 제도와 입법으로 민주주의를 이끌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예를 들어 보죠. 미국은 다른 선진국과 달리 공공 의료보험 체계를 갖추지 못한 나라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개혁하려고 했을 때 일부 노인층이 ‘정부는 메디케어(미국의 노인 의료보험 제도로 사회보장세를 20년 이상 낸 65살 이상 노인과 장애인에게 연방정부가 의료비 50%를 지원)에서 손 떼라’는 시위를 했어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보다 공공 의료보험을 도입하면 의료체계가 파탄이 난다는, 정치인의 근거 없는 선동과 민영보험사의 왜곡된 광고에 휘둘린 거죠. 영국에선 ‘칠면조가 크리스마스 파티하겠다고 나선다’는 속담이 있어요. 자신에게 불리한 일에 앞장선다는 의미죠. 이처럼 경제학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내 이익마저 지킬 수 없습니다.”
―책에선 이기적인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부의 제도(시스템)가 왜 중요한지, 기회의 평등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등 기존 인식을 깨뜨리는데요. 이런 통찰력은 어디서 나오는가요.
“사회과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은 현상만이 아닌 구조와 본질을 꿰뚫어 보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면 개인이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얘기는 상식 수준에서는 맞을지 몰라도 사회과학적으로 보면 맞지 않아요. 물론 극단적인 좌파에서 주장하듯 모든 문제가 개인보다 구조에 있다는 말도 맞지는 않죠. 달리기 경주에서 모든 선수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고 해서 그 경주가 공정한 것일까요? 경주에 참여하는 이들 가운데는 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어요. 장애인도 있고 비장애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이들이나 장애인들이 앞에서 출발하는 것이 공정한 경주입니다. 결국 구조와 개인을 함께 보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교수님은 성장을 위해서도,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복지가 필요하다고 얘기하는데요.
“과거엔 기술이 단순해 봉제공장에서 잘리면 가발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이 어렵고 복잡해 다른 직장으로 옮기기 위해선 재교육을 받는 시간이 오래 걸리죠. 이처럼 실업 기간에 안정적인 재교육을 받기 위해선 사회안전망이 필요해요. 재교육을 통해 새로운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 국가는 생산성을 높일 수 있어 더 높은 성장을 일궈낼 수 있죠. 저출산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경제의 최대 위기 가운데 하나는 저출생입니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하는 아이 수)은 0.7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최저 수준입니다. 육아휴직·아동수당·경력단절 등의 문제가 겹쳐 일어나는 현상이죠. 이런 문제를 탄탄한 복지제도를 마련해 풀어야 출산율이 높아집니다. 인구가 늘어나야 성장 잠재력 역시 높아지는 거죠.”
―책 ‘감사의 말’에서 보면 ‘돌봄노동’을 다룰지 말지 고민하다 부인이 격려해줘 용기를 받아 쓰게 됐다는 내용이 나오더군요.
“돌봄노동이 중요하다는 얘기는 여러 번 말했는데, 막상 책으로 어떻게 쓸지는 고민했어요. 그러다 아내가 ‘경제학적으로 좀 써 보라’고 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해서 이번에 쓰게 된 거였죠. 정말 돌봄노동을 이해하고 잘 운용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장 교수는 책에서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들의 학습을 도와주고,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며,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을 시장가격으로 환산하면 GDP의 30~40%를 차지하지만,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다”며 돌봄노동이 경제학에서 무시당하는 관행을 비판했다.)
장하준 영국 런던대 교수가 지난 3월2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이후 세계 경제 흐름을 어떻게 전망하나요?
“지난 40여 년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금융 자유화는 2008년 금융위기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는 근본적인 제도개혁이 아닌 이른바 돈으로 때우는 방식으로 풀어나갔죠. 결국 유동성은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 주식과 부동산 곳곳에 거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코로나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국제공급망이 교란되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그래서 인플레를 낮추려고 이자율을 올렸죠. 이런 문제가 겹쳐 초저리 때는 눈에 띄지 않던 부실자산이 사방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도 불확실성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자본주의의 새 질서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요?
“새 질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선 제도와 시스템 개혁이 필요합니다. 1929년 대공황 때 뉴딜 정책은 댐 건설 같은 인프라에만 투자한 게 아니에요. 핵심은 제도개혁이었습니다.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분리하고, 예금보험과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만들어 시장을 규제했죠. 이와 함께 사회보장도 강화했습니다. 이런 개혁이 필요한데, 현재로서는 개혁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면서 신냉전을 불러올 거라는 예상도 나오는데요.
“저는 현재 상황을 신냉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무역 거래가 거의 없는 완전히 분리된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중국은 샴쌍둥이 같은 존재입니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싼 물건이 없으면 미국은 물가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중국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 가운데 13%를 가진 최대 투자국입니다. 미국이 리쇼어링(제조업을 미국 본토로 되돌려 오는 것)을 추진하고 있지만, 경제구조를 바꾸려면 10~20년의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40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중국 중심의 공급망 구조를 쉽사리 바꾸기는 힘듭니다.”
윤 정부, 개발 이데올로기 벗어난 과목 수강해야
―한국경제는 반도체와 중국 수출 부진으로 무역수지가 14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 재정수지도 마이너스 폭을 키우고 있는데요. 일시적인 현상일까요? 구조적인 문제로 이어질까요?
“현재로선 구조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현상을 보고 손 놓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거죠. 특정 업종이나 특정 나라의 무역이 집중되면 국가 경제가 꼬일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수출 상품과 시장을 더 다변화하고 미래 산업을 키워나가야 하는거죠.”
―반도체를 주력 산업으로 하는 우리나라는 미-중 패권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요.
“챙길 건 챙기는 실리 위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즉,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는 거죠.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에 척지지 말고, 양쪽에서 반대급부를 얻어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중국과 미국에만 의존하지 말고 유럽과 남미, 동남아시아 등으로 시장을 확장해야 하죠.”
―최근 주 69시간 근로제가 우리 사회에 이슈가 됐습니다.
“노동시간이 주요 어젠다로 나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노동의 양적인 문제보다 노동의 질적인 문제가 더 중요한 때입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걸맞게 인간과 노동이 잘 결합해 어떤 고급 인력을 창출해야 하는가’ 같은 질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인데요. 노동시간이 뚱딴지같은 어젠다로 나와 황당했죠.”
―정부와 노조 관계는 여느 정부에서나 마찬가지로 조율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현 정부 들어서는 그런 갈등이 더 깊어지는데요.
“정부와 노조 간의 타협이 필요합니다. 1920년 스웨덴 노사관계는 최악이었습니다. 노동자 1인당 파업 손실 일수를 보면 스웨덴이 가장 많았죠. 대공황을 거치면서 스웨덴 노사정은 대타협을 해서 현재와 같은 건전한 노사정 관계를 만들었죠. 정부는 좀 더 큰 틀에서 노조를 보듬고, 노조는 비정규직 등에 문턱을 낮춰 서로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유를 기치로 내 건 윤석열 정부가 1년을 맞았습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어떤 학점을 줄 수 있을지요? 또 현 정부가 앞으로 추진해야 할 경제정책 대안을 제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학점을 주기에 앞서 현 정부는 수강 신청을 잘못한 과목이 많은 것 같습니다. 노동의 질이 중요할 때 노동시간과 관련한 과목을 듣고 있고, 냉전도 아닌데 한-미-일 동맹과 관련한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선 복지와 성차별과 관련한 과목을 들어야 하는데, 필리핀 가사도우미 도입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성장과 개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더 좋은 사회를 위해 좀 더 미래 지향적인 어젠다를 보여주는 과목을 수강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3년 전 인터뷰에선 먹거리와 경제학을 결합한 후속작을 준비한다고 살짝 얘기했는데요. 다음엔 어떤 내용의 책으로 다가올지 궁금합니다.
“현재는 기후변화와 산업정책에 관심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책을 쓰는 단계는 아닙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