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21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한달여 만에 내놓은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은 “민간·기업·시장 주도의 경제 활성화”였다. 작은 정부와 건전 재정을 주창하며, 대기업과 다주택자 감세에 나섰다.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를 풀어 성장을 이끌겠다는 것이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부 때의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운다) 공약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낙수론의 부활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법인세 인하 등은 대기업·부자를 위해서가 아닌 서민·중산층을 위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1년여가 지난 지금, 과연 현실은 어떤가?
통계청 집계를 보면, 지난해 4분기 가계의 실질소득은 전년 4분기보다 1.1% 줄었다. 명목소득은 4.1% 증가했지만 물가 상승분을 반영한 실질소득은 감소한 것이다. 이런 실질소득 감소폭은 4분기 기준으로 6년 만에 가장 컸다. 실질소득은 지난해 3분기에도 전년 동기 대비 2.8% 감소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고물가·고금리 상황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서민들의 가계 살림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자영업자한테 직격탄이 됐다. 지난해 4분기 실질 근로소득은 2.5% 늘었지만, 실질 사업소득은 5%나 줄었다. 인건비와 원자잿값, 이자비용 등의 상승이 주된 요인이다. 자영업 가구의 소득 감소는 정부의 코로나19 손실보상금 지원이 마무리된 여파도 컸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정부는 코로나 피해 계층을 두텁게 지원한다고 했지만, 절대 규모가 부족했거나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소비 회복이 더뎌지는 상황에서 고물가·고금리 여파가 정부 지원을 상쇄할 만큼 컸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고물가·고금리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4월 1년2개월만에 3%대로(3.7%)로 다소 누그러졌지만, 한은의 목표 수준(2%)을 훨씬 웃돈다. 대출금리는 1년 전의 2배 수준이다.
대기업 감세는 투자·고용 확대 등 낙수효과를 찾기 어렵다. 대기업들은 윤석열 정부 출범과 동시에 수백조원의 투자를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기둔화 여파가 본격화하자 투자 약속은 기약할 수 없는 어음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한국은행 집계를 보면, 올해 1분기 국내 설비투자 증가율(전기 대비)은 마이너스(-4.0%)로 돌아섰다. 수출·소비 등 국내총생산(GDP) 구성 요소 중 유일하게 역성장했다. 이런 설비투자 감소율은 2019년 1분기(-8.3%) 이후 가장 큰 것이다. 1분기 설비투자의 성장률 기여도는 -0.4%포인트로, 1분기 전체 성장률(0.3%)보다 컸다. 설비투자가 까먹은 성장률을 민간소비가 근근이 방어한 모양새다. 4대 그룹 관계자는 “경기 회복 시기가 불확실하고 실적 부진도 예상보다 심하다. 공시한 계획을 없던 일로 하진 않겠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재무적 상황 등을 고려해 투자 규모와 시기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규모 감세와 긴축 재정의 부작용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애초 정부 예상과 달리 연초부터 세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법인세, 부동산·주식 양도소득세가 감소하면서 올해 1~3월 국세수입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이미 24조원이 줄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일 “현재 경기둔화 문제, 자산 시장 부진 문제 등이 겹쳤고 기업 영업상황도 좋지 않아 세수 부족 상태가 단기간에 해소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추경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세수 부족은 이미 예견된 터였다. 윤석열 정부가 대규모 감세 정책을 내놓은 건 세계적인 금리인상과 경기둔화,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본격화한 이후다. 정부 스스로 “엄혹한 복합위기”라고 진단하고선 대규모 감세와 긴축 재정 기조를 밀어붙였다. 정부는 지출 구조조정을 한다지만 결국 1차 대상은 사회복지 사업들이다. 이 정부 들어 가장 먼저 노인일자리 사업 예산이 줄고 공공임대주택 예산이 삭감됐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세수 부족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법인세와 종부세 등에서 연간 수조원대 감세를 했다. 이래놓고 균형 재정을 맞추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규모 감세로 정부 스스로 재정 운용의 폭을 줄인 건 자가당착이라는 얘기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현재까지 법인세만 7~8조원이 줄었고 다른 주요 세수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지출을 줄이면 정부의 경기 대응 능력이 떨어지고 성장률 방어는 더 힘들어진다. 하반기에도 경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빚을 내건 증세를 하건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올해 경기 전망은 갈수록 우울해지고 있다. 정부는 애초 ‘상저하고’를 예상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미국의 긴축 종결도,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도, 반도체 업황의 반등 시점도 불투명하다. 반대로 주요 산유국의 감산, 미국 지방은행발 금융불안 등 어두운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있다. 약달러에도 하락중인 원화가치도 불안 요인 중 하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주요 선진국 중 우리나라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연속 네차례 하향조정해 1.6%까지 끌어내렸다. “내수와 수출 모두 회복 동력이 부족하다”는 게 아이엠에프의 진단이다.
하준경 교수는 “물가 대응이나 산업 대전환, 안전망 확대 측면에서 적극 재정이 필요한 시기다. 다른 선진국들처럼 횡재세 등 어떻게든 세수를 확보해 취약층 지원 등 정부 지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일영 교수는 “세계경제의 블록화, 그린에너지 전환과 에너지·식량 무기화, 공급망 충격, 수십년 만의 인플레이션 등 복합위기와 대전환 시기에 정부가 대응해 나갈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공정한 시장경제’를 약속했지만, 지난 1년 경제민주화나 재벌개혁은 빠른 속도로 역주행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인의 범죄를 형사처벌 대신 과징금 등 행정제재로 대체하고 재벌 총수의 사익편취·계열사 부당지원 적용 범위를 축소했다. 또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 문제를 다루는 부서를 축소하고 이들 기업의 공시 의무는 대폭 완화했다. 전속고발권을 가진 공정위가 새 정부 출범 이후 재벌 총수를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김우찬 경제개혁연대 소장(고려대 교수)은 “담합·카르텔 등 전통적인 공정거래 분야라면 다른 나라처럼 행정 제재 중심으로 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국내 대기업 총수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사익 추구로 기업에 손해를 끼친 것이어서 개인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월30일 열린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KT, 포스코 등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기업들을 향해 “소유가 분산돼 지배구조에 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경우에는 절차와 과정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해줘야 한다”고 정부의 개입 의사를 밝혔다. 연합뉴스
‘민간 중심 경제’는 말뿐이라는 비판에도 직면했다. 윤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 민관합동위원회를 만들어 정책 기능을 맡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출범과 동시에 이 공약은 은근슬쩍 사라졌다. 윤 대통령은 “분야별로 민관 위원회를 둬 정책을 기획하고 청와대 참모는 이를 지원하는 구실을 맡기겠다”고 했지만, 별다른 설명도 없이 없던 일이 됐다.
그렇다고 청와대 참모에 민간 전문가들을 적극 중용하지도 않았다. 대통령실과 내각 경제팀에는 모두 정통 경제 관료 출신들을 앉혔다. “현 경제팀은 관료 중심으로 구성돼 그냥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치중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들어와 정책을 펼쳐야 한다”(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주문이 나오는 까닭이다. 정부의 중장기적인 정책과 비전을 책임지는 정무적 브레인 없이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는 관료적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제도와 룰이 아니라 ‘이념’과 ‘완력’으로 정책을 집행한다는 신관치 논란도 여기에서 파생된다. 케이티(KT) 사장 연임 논란이 대표적이다. 우석진 교수는 “이전 정부 때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연금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더니, 이젠 국민연금을 앞세워 사기업의 경영진 선출에 관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며 “물가안정이 중요하다고 기업에 직접 가격 인하를 압박하고, 대출금리 높다고 은행을 쪼고, 통신요금 높다고 통신사에 완력을 행사하는 고답적 행정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회승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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