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6월2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부에서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점검 기자설명회를 열고 있다. 한은 제공
물가 급등세 한복판에서 물가 관리당국인 중앙은행 수장을 맡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31일 취임 100일을 맞았다. 정부·국회·정당과 적극 소통하면서 정책공조에 나서고, 미국 기준금리 동향보다는 국내 경제여건을 더욱 중시하는 통화정책을 펴면서 한국은행의 역할과 위상에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취약계층의 이자상환부담과 소득불평등 완화를 위한 통화정책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7월 ‘빅스텝’(정책금리 0.50%포인트 인상)에도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기대 인플레이션이 좀체 꺾이지 않는 가운데 물가와 성장 사이의 상충 관계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터라 이 총재로서는 향후 2~3개월이 가장 어려운 시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지난 20일 김진표 국회의장을 여의도 국회 의장집무실에서 만나 “미국의 금리 인상과 고유가의 여파가 이어지는 향후 3개월이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위기가 오지 않도록 경제팀과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물가와 금리가 우리 경제의 최대 현안이지만 중앙은행 총재가 국회의장을 공식적으로 만난 건 매우 이례적이다. 지난 4월21일 총재 취임사와 6월12일 한국은행 창립 72주년 기념사에서 이 총재는 “한은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자”, “정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 전문가와 더 많이 소통해야 한다. 중앙은행 독립성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으나 소통한다고 독립성이 저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동안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과 만나 세차례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가하고,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김주현 금융위원장·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과의 회동도 예전 한은 총재들에 비하면 잦은 편이다. “통화정책뿐 아니라 재정·금융정책까지 아우르는 최적의 정책조합이 중요하다”는 그의 평소 소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 직후에 여는 기자간담회 때마다 “정책금리 변동에 따른 취약계층 이자상환부담을 지원하는 정책공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난 6월28일에는 이승헌 한은 부총재가 국민의힘이 개최한 ‘물가 및 민생안정특별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한은 부총재가 집권 정당의 정책회의에 공식 참여해 발언한 것도 역사적으로 드문 사례다. 이 총재는 “우리 경제가 당면한 중장기적 도전을 이겨내려면 통화정책만으로는 안되고 재정정책과 구조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은행이 통화‧금융 정책을 넘어 우리 경제의 당면 문제와 올바른 방향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중앙은행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한은의 역할과 위상에서 점차 혁신과 변모를 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좀더 넓게보면 이 총재는 통화정책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는 태도를 조심스럽게, 간간이 드러내고 있다. 금리 정책과 물가 관리뿐 아니라 고용·소득, 나아가 사회경제적 양극화 문제에 대응하는 ‘싱크탱크 한국은행’을 주창하고 있다. 그는 취임 일성에서 “한은이 물가·금융안정 기본책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수립에 기여하고 민간부문의 의사결정에도 도움을 주는 지적 리더가 되자”고 했다. 또 “코로나19 이후 악화된 소득불평등 상황에서 높은 인플레이션이 취약계층에 더 큰 충격을 줄 것으로 우려되므로 최적의 정책 밸런스를 찾아나갈 필요가 있다”(5월12일 ‘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고 말했다. 여기서 정책 공조는 통화정책의 독립성 문제가 아니라, 금리 변동과정에서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정책 공조를 뜻한다.
이 총재는 또,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빠르고 가파른 정책금리 인상 흐름에 대해 “우리 통화정책운용 때 한-미 양국간 금리 역전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수시로 밝히고 있다. 지난 6월21일 물가안정목표점검 기자설명회에서 그는 “한-미 내외 금리는 차이나 숫자 그 자체에 매달리고 얽매일 필요는 없다. 과거와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역전에도 환율과 자본유출 우려는 크지 않다”고 말했다. 통화정책 판단·결정 때 국내 경기 여건과 상황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미 금리 역전과 달러 강세 환경에도 외국인은 7월 한달간 유가증권시장에서 2조3215억원어치를 순매수해 월간 매수 우위로 전환했다.
흔히 각국 통화정책 수장들은 여러 다른 해석을 낳는 모호한 표현과 어투로 통화정책방향을 언급해왔는데, 이 총재는 사뭇 다르다는 시장의 평가도 나온다. “향후 기준금리는 연말까지 빅스텝보다는 0.25%포인트씩 점진적으로 올리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 시장에서 연말 기준금리가 2.75%~3.0%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하는 건 합리적이라고 본다”(7월13일)는 식으로, 분명한 어조와 구체적인 숫자를 동원해 시장에 명확한 포워드 가이던스(사전 전망)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기준금리(현재 연 2.25%)가 한국경제의 평균 중립금리(경기중립적인 이론상의 금리수준으로, 증권사들은 대략 1.75~2.50% 안팎으로 추정)에 근접하면서 물가와 성장 사이의 상충 관계가 점차 커지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다. 7월27일(현지시각)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이젠 통화정책 회의가 열릴 때마다 그때그때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다. 앞으로는 명확한 가이던스를 제공하지 않겠다. 확보되는 데이터를 보고 판단하겠다”고 했다. 물가 타겟팅(조준)과 경제성장률 희생, 이 둘 사이의 기로에서 이 총재도 명확한 시그널을 제시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공산이 한층 커졌다.
한은이 ‘빅스텝’을 밟았지만 7월 일반 가계·소비자들의 기대 인플레이션(향후 1년간 추가적인 물가 상승률 기대치)은 4.7%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지난 5월 이후 공석으로 남아있던 금통위원(총 7명) 한 자리에 7월28일 신성환 교수(홍익대)가 새로 합류하면서 금통위는 이제 7인 완전 합의체가 됐다. 2018년 11월 이래 첫 금리인상(지난해 8월) 이후 지난 7월까지 총 8번의 금통위 통화정책 결정회의 중에 소수의견은 4번 제출됐다. 이 총재 취임 이후 두번의 금리인상(5월·7월)은 모두 전원일치였다. 경기 하방위험이 커지고 있는터라 8월 금통위(25일)에서 소수 의견이 제출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는 국면이다. 금통위는 다수결 합의제라서 반드시 전원일치를 추구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금통위 의장으로서 이 총재의 고민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한은 창립 72주년 기념사에서 이 총재는 “통화정책운용의 민첩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상황 변화에 따른 유연성도 함께 높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계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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