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신기업가정신 선포식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 출범에 이어 한·미 정상회담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맞춰 삼성과 현대차 등 주요 그룹들이 일제히 투자 계획을 내놓고 있다. 새 정부 코드에 맞춘 투자 계획을 통해 총수 사면 등 각 그룹별 당면 과제를 풀어내려는 바람이 읽히는 한편,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면서 국내 투자가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포석 성격도 짙다는 풀이가 나온다.
24일 삼성전자는 예고 없이 ‘역동적 혁신성장을 위한 삼성의 미래 준비’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어, 향후 5년에 걸쳐 국내 360조원을 포함해 총 45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다른 계열사 투자계획까지 갈무리해 새 정부의 경제정책 구호 ‘역동적 혁신성장’에 맞춰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보면, 반도체 쪽에선 메모리 반도체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에 대한 투자를 강화해, 반도체 3대 분야를 모두 주도하겠다고 밝혔다. 바이오 분야에선 ‘제2의 반도체’ 신화를 목표로 글로벌 위탁개발생산(CDMO) 투자를 확대해 생산 역량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신성장 아이티(IT) 투자는 인공지능(AI)과 차세대 통신 기술에 집중한다.
지난해 8월 이재용 부회장 가석방 이후 삼성이 내놓은 ‘코로나19 이후 미래준비’에 견줘 투자 규모와 기간이 달라졌을 뿐 내용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반도체, 바이오, 신성장 아이티 등에 총 45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분야별 투자계획은 물론 연도별 계획도 빠져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구한 한 증권사 분석가는 “반도체와 바이오 등이 한국 경제에 엄청나게 중요한 사업이라는 것이 강조됐다”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역할이 중요함을 피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이에 뒤질세라 현대차·롯데·한화그룹도 앞다퉈 투자계획을 내놨다. 현대차는 친환경 사업 고도화와 자율주행을 포함한 국내 미래 모빌리티 사업 등에 2025년까지 총 6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가 친환경 사업 고도화에 16조2천억원, 미래 모빌리티 기술에 8조9천억원을 투자한다. 완성차 제조사를 넘어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화하기 위한 계획으로 보인다. 내연기관 차량의 상품성과 고객 서비스 향상에도 38조원을 투입한다.
롯데는 바이오와 모빌리티 등 신사업을 중심으로 5년간 국내 사업에 37조원을 투자한다. 신성장 사업으로 꼽고 있는 ‘헬스 앤 웰니스’(Health&Wellness) 부문에서 국내 바이오 의약품 위탁생산 공장 신설에 1조원을 투자하고, 롯데렌탈은 8조원을 들여 전기차 24만대를 도입한다. 화학사업군에서는 롯데케미칼이 5년간 수소 및 전지 소재 사업에 1조6천억원 이상을, 고부가 스페셜티 사업과 범용 석화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7조8천억원을 투자한다.
한화는 에너지, 탄소중립, 방산·우주항공 등에 총 37조6천억원(국내 20조원)을 투자한다. 태양광·풍력 등의 에너지 분야에 4조2천억원, 수소 혼합연소 기술 상용화와 수전해 양산 설비 투자 등 탄소중립 사업분야에 9천억원, K-9 자주포 해외시장 개척을 포함한 방산·우주항공 분야에 2조6천억원을 각각 투입할 계획이다.
이들은 신규 인력 채용 계획도 내놨다. 삼성은 8만명을 새로 뽑을 계획이라고 밝혔고, 한화는 2만명 이상의 새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에스케이(SK)·엘지(LG)그룹도 투자계획 발표를 준비 중이다. 두 그룹 모두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주요 그룹들이 잇단 투자계획 발표는 새 정부 출범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많다. 10대 그룹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새 정부 출범에 맞춰 투자계획 발표를 준비했는데, 한·미정상회담이 있어 미뤄졌다”며 “한 그룹이 발표하니까 다들 함께 내놓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 관계자는 “새 정부도 들어섰고 조 바이든 대통령 방한도 끝나 자료를 냈다”며 “다른 기업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새 정부와 호흡을 같이 하는 자세를 보여 숙원 과제를 풀려는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5대 그룹 관계자는 “상당수 그룹 총수가 아직 재판을 받고 있거나 경영권 승계 및 사면 숙제를 남겨두고 있어, 새 정부 눈에 드는 행보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런 해석과 관련해 “지난해와 경영 환경이 바뀌어 투자를 늘려 발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안태호 기자
eco@hani.co.kr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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