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활짝 열었던 ‘유동성 수도꼭지’를 단계적으로 잠그기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3일(현지시각) 이번 달부터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연준은 코로나19 발생 이후 금리 인하와 함께 매달 채권을 매입해 시중에 돈의 유통량을 늘려왔다. 테이퍼링은 채권 매입 규모를 줄이는 것으로 금리 인상으로 가기 위한 사전 단계다.
■ 연준 긴축 행보 첫 발 뗐다 연준은 이날 ‘11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이번 달 말부터 자산 매입 규모를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연준은 코로나19 발생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정책금리 목표 범위를 0.00~0.25%으로 인하하고, 매달 최소 국채 800억달러와 주택저당증권(MBS) 400억달러어치를 매입하는 양적완화를 실시해 왔다. 연준은 11~12월 매입하는 월 자산 규모를 국채 100억달러, 주택저당증권 50억달러씩 총 150억달러 줄이기로 했다. 연준이 12월 이후에도 이 조처를 계속 이어간다면 내년 6월 양적완화가 종료된다.
연준은 테이퍼링을 시작해도 될 만큼 경기가 회복됐다고 판단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경제가 실질적 추가 진전을 이뤘기 때문에 자산 매입을 축소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준은 지난 9월 경제 전망에서 올해 연간 미국 경제 성장률을 5.9%, 실업률을 4.8%으로 예상했다. 반면 개인소비지출(PCE) 기준 물가 상승률은 4.2%까지 올라갈 것으로 바라봤다. 이에 따라 연준이 과도한 시중 유동성을 줄이기 위해 테이퍼링을 시작하고, 통화정책 방향을 서서히 긴축으로 돌리는 모습이다.
■ 시장은 다음 단계인 금리 인상 주목 연준이 돈줄을 조이기 시작하면 세계 경제가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이번 테이퍼링은 연준이 사전에 시장이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줬기 때문에 과거보다 충격이 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투자은행 제이피모건은 “연준의 테이퍼링 개시 시점과 속도, 향후 변경 가능성 등은 전반적으로 예상에 부합했다”고 평가했다.
시장은 테이퍼링 다음 단계인 금리 인상을 더 주시하고 있다. 연준의 금리 인상은 이제 완화적인 경기 부양책을 끝낸다는 의미다. 명실상부한 긴축의 시작이다. 테이퍼링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 올 수 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연준은 테이퍼링이 끝난다고 곧바로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월 의장은 “자산 매입을 축소할 때라고 생각하지만, 금리를 인상할 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연준의 금리 인상 시기는 향후 물가와 고용 상황에 달렸다. 연준은 경기가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 금리를 올릴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파월 의장은 “완전 고용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인플레이션도 높은 수준에서 하락할 것이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최근 물가 급등에 대해 “공급 병목 현상이 내년에도 계속되고 인플레이션도 상승할 것이다”라면서도 “내년 2~3분기에는 인플레이션이 하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파월 의장은 임금 인상 압력에 대해서도 “임금과 물가 급등이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으며, 생산성이 높은 상황이다”고 덧붙였다. 연준이 물가와 고용 상황에 대해 최대한 인내심을 가져보겠다는 뜻이다.
반면 시장에서는 연준의 인내심이 내년 하반기에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테이퍼링이 끝난 직후 금리 인상이 단행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시티은행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단단한 노동시장을 고려하면 첫 번째 금리 인상 예상 시기를 내년 12월에서 6월로 변경한다”고 밝혔다.
■ 한국 내년 초까지 먼저 금리 올릴 듯 연준의 돈줄 죄기는 한국 경제에도 큰 부담이다.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 보유국의 금리가 높아지면 우리나라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이 빠져나갈 수 있다. 이 과정이 급격히 진행될 경우 환율 급등으로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또 연준이 시중 유동성을 줄이면서 세계 경제가 둔화될 경우 한국 경제도 부진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은 지난 8월 미국보다 먼저 금리 인상 행보를 시작한 상태다. 이번 달 추가 금리 인상을 한 후 내년 초 또 한번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회견에서 “다음번 회의에서 금리 추가 인상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년 금리 인상에 대해서도 “내년에도 경제가 견실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물가 오름세는 예상보다 클 가능성이 있다”며 “통화정책은 경제 상황 개선 정도에 맞춰 완화 정도를 적절히 조정해 나가는 방향이 계속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준금리(0.75%)는 연준의 기준금리(0.00∼0.25%)보다 0.5∼0.75%포인트 높은 수준인데, 우리가 내년 초까지 0.5%포인트를 더 올리면 격차는 1.0∼1.25%로 벌어진다.
박종석 한은 부총재보는 4일 ‘상황점검회의’에서 “이번 연준 회의 결과는 시장 예상과 대체로 부합해 국제 금융시장은 안정적인 모습”이라며 “다만 테이퍼링 속도, 금리 인상 시기 등 정책 결정과 관련된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은 만큼 변화 가능성 등에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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