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주 경기연구원장이 1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원장실에서 기본소득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수원/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더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모든 국민에게 동일한 금액의 현금을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급하자는 제안은 지금 차기 대선주자들이 논쟁을 벌일 만큼 주요 정책 이슈로 떠올랐다. 불과 몇년 전까지 만해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을 감안하면 상전벽해다. 여기엔 경기도의 기여가 컸다. 2019년부터 실시한 청년기본소득과 오는 10월 시작되는 농민기본소득, 그리고 올 하반기에 새롭게 시행하는 농촌기본소득까지 기본소득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경기도의 시범사업을 디자인한 이한주 경기연구원장을 지난 1일 만나 왜 기본소득이 주목받고 있는지 들어봤다. 이재명 경기지사의 ‘정책 브레인’으로 알려진 그는 가천대 특임부총장과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경제1분과위원장,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국민성장분과위원장 등을 지냈고, 2018년 9월 13대 경기연구원장에 취임했다.
- 기본소득 논쟁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렇다. 기본소득은 도입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기술 혁신으로 자율주행차가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자율주행차가 도입되면 운전 직종이 큰 타격을 받는다. 운전은 세계에서 단일 직종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고용돼 있다.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면 그 사람들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는다. 반면 새로 생기는 직종으로 전직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주지 않으면 사회는 불안해진다.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생산성은 엄청나게 증가하지만 쓸만한 일자리는 확 줄어든다. 곳간에 곡식이 엄청나게 쌓이는데 그 분배 과정이 굉장히 불균등해지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도다.”
- 코로나 위기로 더 그런 것 같다.
“그렇다. 코로나를 통해서 재난지원금 같은 현금 지원뿐 아니라 국가가 부담해야 할 기본적인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걸 확인했다. 대표적인 게 돌봄 서비스다.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년층, 산모 등 위기 때 돌봄이 필요한 대상은 엄청나다. 돌봄을 더이상 개인에게 떠넘기지 말고 국가가 체계를 세워서 수행해야 한다. 이런 국가돌봄책임제도도 넓게 보면 기본소득의 개념에 들어가는 것이다.”
- 농민기본소득과 농촌기본소득은 어떻게 다른가?
“둘 다 전면적 기본소득 도입 전단계인 범주형 기본소득에 속한다. 농민은 그동안 수출주도형 정책으로 큰 피해를 봤다. 역대 정부에서 수출 없이는 국가경제가 어렵다는 논리로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낮춰 수입 농산물이 범람했다.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의 몫이었다. 농민·농촌기본소득은 농민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목적이 조금 다르다. 농민기본소득은 경기도에 주소를 두고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에게 아무 조건 없이 지역화폐로 월 5만원씩 준다. 유통기한은 3개월이다. 농촌기본소득은 농촌 지역의 인구 유입을 유도해 인구 소멸을 완화하려는 목적으로 한다. 올 하반기에 1개 면을 선정해 시범적으로 실시한다. 농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시범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면 1인당 지역화폐로 월 15만원씩 받는다.”
- 이미 농사직불금 제도가 있지 않나?
“직불금은 농지 면적을 기준으로 지급하기 때문에 빈부격차 문제가 발생한다. 2헥타르 이상을 가진 농민은 전체의 10퍼센트도 안 되는데 전체 직불금의 75%를 받아간다. 전형적인 ‘부익부 빈익빈’이다. 그래서 농촌에선 지금 직불금 제도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굉장히 크다. 농민, 농촌기본소득은 농민을 기준으로 지급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물론 우려되는 문제도 있다. 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람이 주민등록만 농촌으로 옮겨서 부당하게 수령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식별해 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원래 기본소득의 장점 중 하나가 이런 낙인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감수해야 한다.”
- 결국 재원 마련이 중요해 보인다.
“기본소득을 제대로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1인당 1만원씩만 주더라도 5천억원 들어간다. 전체적으로는 큰 돈이지만, 또 개인적으로 보면 적은 돈이다. 그래서 기본소득을 얼마나 두텁게 하느냐(누구를 대상으로 얼마를 지급하느냐), 또 얼마나 빨리 가느냐 등을 생각해야 한다. 반면 범주형 기본소득은 돈이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 직불금 제도 같은 것들을 조정하면 가능하다. 기본소득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과 지금 당장 올인하는 것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 그래서 ‘정책의 자유도’가 중요하다. 기본소득은 정기성, 현금성, 개별성, 충분성 등 몇가지 조건이 있는데, 늘 문제가 되는 게 충분성이다. 모두에게 충분히 두텁게 지급하면 좋지만 재원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범주형 기본소득을 다양하게 도입하는 것이다. 국가가 전부 부담하는 기본소득만 있는 게 아니다. 신용등급이 낮아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는 이들에게 싼 이자로 대출해주는 ‘기본금융’도 있다. 20~30대 청년들은 부도를 내는 게 무서운 나이다. 평생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출을 받으면 열심히 갚으려고 한다. 이들에게 싼 이자와 10년 정도 장기로 대출을 해주면 큰 도움이 된다. 대출은 은행이 하고, 그 지급 보증을 지자체가 하는 방식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냈더니 놀랍게도 은행들의 반응이 좋았다.”
- 농촌 인구 유입은 교육, 의료 등 인프라도 중요하지 않을까?
“맞다. 1980년에 농촌 인구는 지금보다 4배 많았다. 농촌을 떠난 이유는 소득 문제도 있지만 열악한 인프라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당장 소득을 높인다고 과연 인구가 유입될까? 아닐 것이다. (기본소득 실험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함께 조사·연구해야 한다.”
- 농촌기본소득으로 식량자급도 기대하는가?
“지금 수준의 기본소득으로 식량자급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식량자급 문제는 달리 봐야 한다. 수도권과 경기도의 땅을 논밭으로 계속 유지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게 맞는지 따져봐야 한다. 식량자급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농촌에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특히 기후위기 시대에 농촌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것이다. 논과 밭의 기능은 단순히 먹거리 생산에 그치지 않는다. 홍수와 폭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휴식처를 제공한다. 훌륭한 관광자원도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 농촌의 경제적 가치는 연간 82조원에 이른다.”
- 기본소득이 복지제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나?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제도와 철학이 다르다. 복지는 노동하는 인간을 전제로 한다. 노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노동하는 사람들이 연대해서 지원하는 것이다. 반면 기본소득은 노동이 전제 되는 게 아니다. 노동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일자리 감소, 구매력 약화, 자산의 불공정 분배 등으로 노동 중심의 복지제도는 한계에 달했다. 기본소득은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정책도 성공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실패하는 것만큼 나쁜 정책은 없다. 최저임금제도가 대표적이다. 최저임금제도만 해도 논문을 찾으면 수백만개가 나온다. 엄청난 데이터들이 있는데 잘 점검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기본소득은 데이터가 많지도 않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설계부터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정책의 투명성을 확실히 가져가야 한다. 정책적인 효과 측정을 게을리 하거나 속이면 더 큰 실패가 온다. 그래서 이번 농촌기본소득 시범사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나오면 그 데이터를 학계에 공개해 더 좋은 정책으로 가다듬어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c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