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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여가

말과 함께 파미르고원 급류에 빠지다

등록 2018-08-25 09:11수정 2018-08-25 09:42

[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21)기다림과 만남
아내와 아이들 떠나기 전날
산 넘어 목동 친구 보러 행차
귀가 시간 당기려 지름길 택해
말타고 물살 센 계곡 뛰어들다

중간쯤 균형 잃고 급류에 허우적
‘이렇게 가는 건가’ 두려움 속에도
‘내가 가면 그 사람 어쩌나’ 더 걱정
나를 기다릴 이 생각에 탈출 성공

수척한 얼굴로 밤새 기다린 아내
“오늘은 당신 두번째 생일이야”
에센은 나의 유목민 친구다. 아내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에센 가족을 만나기 위해 왕복 최소 6시간 거리의 친구 집을 찾아갔다. 유르트 옆에서 펠트를 짤 양모를 두드리는 에센의 부인. 공원국 제공
에센은 나의 유목민 친구다. 아내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에센 가족을 만나기 위해 왕복 최소 6시간 거리의 친구 집을 찾아갔다. 유르트 옆에서 펠트를 짤 양모를 두드리는 에센의 부인. 공원국 제공

“겨우 차 한잔 하려고 그 먼 길을 가요? 우리도 내일 가는데.”

선선히 가라며 선물을 챙겨주면서도 아내는 아쉬운 말 한마디를 보탠다.

“같이 간다고 했으니 성제가 왔을 때 가야지. 아니면 올해 못 갈지도 몰라요.”

“언제까지 올 수 있어요?”

“가는 길이 세 시간 걸릴 테니, 빠르면 다섯시까지 올 거요.”

“당신 말이 너무 높아서 겁나요.”

중국인 아내는 큰 말을 높은 말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다. 아내는 내 말이 큰 것이 언제나 불안하다. 그렇게 ‘언제까지’라는 아내의 말을 안장에 걸고 길을 떠났다.

여자들은 초원에서 수천년 동안 기다렸다. 남자보다 더 억세게 노동하며. 눈비 오는 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가혹하다. 나도 이 초원에서 기다려본 적이 있다. 지평선 가까이 언덕에 말 탄 이 한명만 보이면 그 사람일까 그 사람일까 한다. 아주 가는 게 아니라며 떠나고는 기어이 안 오시는 임의 이름을 부르다 그 이름에 묻혀버린 이도 많았을 것이다. 요즈음은 휴대전화가 생겨 걱정이야 덜하지만, 여자들의 기다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아침에 유르트 밖으로 굴미라가 거의 악에 받쳐 휴대전화에 대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일이 바쁜지 남편은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어제도 밤새 기다리고 오늘은 오는 줄 알았을 것이다.

에센의 둘째 딸인 굴다르(오른쪽 둘째)는 새까만 얼굴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매력적인 아이다. 1년 만에 만나는 아이는 훌쩍 자랐다.  공원국 제공
에센의 둘째 딸인 굴다르(오른쪽 둘째)는 새까만 얼굴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매력적인 아이다. 1년 만에 만나는 아이는 훌쩍 자랐다. 공원국 제공

초원의 여성들은 쉼 없이 일한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 따르는 펠트 짜기에 열중하고 있는 초원의 여성들. 공원국 제공
초원의 여성들은 쉼 없이 일한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 따르는 펠트 짜기에 열중하고 있는 초원의 여성들. 공원국 제공
망아지처럼 활달한 초원의 아이

설령 그들이 기다리지 않아도 우리는 다시 가마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성제는 압드카르의 검은 말을 빌리고 나는 바람에 올라 열시에 서쪽을 향했다. 큰 산 세개를 넘어 탈라스와 에센의 목장으로 가는 길이다. 평지만 나면 말을 달렸지만 세 시간은 어림도 없었다. 출발부터 마음만 급했다. 볼케에서 물을 건너 투육으로, 거기서 산을 올라 투르파르켈로, 다시 강을 건너고 말도 겁내는 가파른 산을 넘어야 목적지다. 레닌봉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하나뿐인데, 바람은 아래 물줄기를 보고 선뜻 다리에 오르지 못한다. 물을 건너 산을 오르는 길에 성제가 탄 검은 말이 허덕인다. 쉬지 않고 네 시간째 산을 올랐으니 아무리 네발 달린 말이라도 지친다. 아찔한 마지막 경사지를 내려갈 때는 경험 많은 말이 더 겁을 낸다. 성제가 웃으며 핀잔을 준다.

“말이 지쳤나봐. 이게 다 형의 흑심 때문이여.”

“내가 뭔 흑심이 있다고 그래, 친구 찾아가는 길인데.”

스쳐가는 약속이었다. 작년 이맘때 우리는 탈라스에게 늦둥이 두 아들을 보러 다시 온다 했다. 큰아들 트르 녀석은 얼마나 컸을까. 성제가 내가 흑심을 품고 있다고 말하는 녀석은 에센의 둘째 딸 굴다르다. 작년 그날 저녁 온종일 걷느라 거의 탈진해서 에센의 유르트에 도착했을 때 막내딸 셋은 당나귀로 소똥 덩어리를 옮기고 있었다. 에센은 막내의 재롱에 연신 싱글벙글하는, 여느 무뚝뚝한 양치기들과는 다른 이였다. 지친 나그네에게 화목한 집은 자그마한 천국이었다. 한밤에 귀여운 딸들 재롱을 보다가 내가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우리 집 두 아들이 이 집 막내들 또래요.”

“그럼 우리 애들 어떻소?”

“우리 집에 댁의 애기를 보내 주면 제가 포터를 혼수로 드리지요. 두 대인들 못 드릴까.”

마침 에센이 운반용 트럭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였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키르기스 초원의 소형 트럭은 거의 다 현대 포터다. 이것이 내 흑심의 전말이다. 물론 아들 녀석이 아빠의 마음을 빼앗은 아이를 한번 봤으면 하는 주책없는 바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겨우 14살. 지친 말 위에서 성제가 말했다.

“여기 여자애들을 보면 막 뛰는 망아지가 생각나.”

“이 사람아, 여자애들보고 망아지가 뭐요.”

핀잔을 줬지만, 그 녀석은 깜둥이 망아지처럼 새까만 얼굴에 새까만 눈을 가진, 말할 수 없이 건강한 기품을 품어내는 녀석이었다. 송아지도 있고 새끼 양도 있다지만,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망아지가 없으면 이 적막한 초원의 한켠은 여전히 비워진 채로 남겠지.

어려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게 흠이지만, 역시 바람은 보통 말이 따를 수 없는 힘을 가진 놈이었다. 고개를 내려오다 성제의 검둥이가 멀찍이 뒤처졌을 때, 수염 허연 노인이 내 말을 칭찬하며 다가오기에 그에게 말을 걸었다.

“탈라스, 친구 탈라스의 유르트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노인은 채찍으로 먼 곳을 가리킨다. 노인을 먼저 보내고 성제의 검둥이를 기다려 내리막을 치달아 내려갔지만 탈라스의 유르트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가까운 유르트의 젊은 아낙은 탈라스의 이름을 몰랐다. 그를 찾고 싶었지만 벌써 두 시를 훌쩍 넘겼다. 우리는 탈라스의 옛 야영지를 뒤로하고 에센의 유르트가 있던 언덕으로 향했다.

에센의 유르트는 그 자리에 있었다. 멀리서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한 해가 지나 훌쩍 컸지만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한 막내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녀석은 물론 강아지도 고스란히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사이 개는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고, 녀석은 한 뼘 정도 더 자라 수줍음이 생겼다. 에센은 출타 중이었다. 아주머니는 펠트를 만들 양모를 두드리고 딸들은 여전히 어머니를 도와 쉴 새 없이 일하고 있었다. 내가 굴다르를 발견하고 벙글거리니 성제가 또 핀잔을 준다.

“형, 흑심을 드러내지 마소.”

“내가 뭔 흑심이 있어, 애들 크는 게 좋아서 그러지.”

딱 차 한잔 하고, 선물 하나 용돈 한푼. 그것이 다였다. 우리가 급히 귀로에 오르니 아주머니가 아쉬워한다.

“주인도 보지 않고 이렇게 가시니….”

에센은 출타 중이어서 그의 아내와 아이들, 가축만 보고 왔다. 에센의 양들. 공원국 제공
에센은 출타 중이어서 그의 아내와 아이들, 가축만 보고 왔다. 에센의 양들. 공원국 제공
“미안해. 다시는 때리지 않을게”

하지만 보고 싶었던 서쪽 사람을 보았으니 강 두개 건너 동쪽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 내일이면 떠날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세시가 훌쩍 지났으니 다섯시까지 갈 가망은 이미 없다. 일곱시까지 도착하려고 해도 지름길을 달려야 한다. 마음은 급한데 얼마 먹지 못한 말이 힘을 쓰지 못한다. 성제에게 말했다.

“산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평원을 가로지르자.”

넓은 곳에서 강을 건너면 산을 올라 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최소한 한두 시간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지친 말을 좀 먹이고 다시 구릉지대를 건너고, 사리모골 목장과 카쉬카스 목장을 가르는 큰 물줄기에 다다랐다. 낮 동안 빙하가 녹아 물은 불어나서 거세게 흘렀다. 하류로 약간 이동하다 건너편 하안단구에 말이 지나다니는 가느다란 흔적을 보았다. 우리는 그곳을 건너기로 했다.

“윤공(성제), 내가 먼저 건너다가 못 갈 것 같으면 돌아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도하를 영상으로 기록하라고 부탁하고 말을 물로 몰았다. 내가 믿는 바는 육중하고 키 큰 말이다. 빙하에서 쏟아져 내린 물은 모래를 잔뜩 머금어 검붉었다. 탈주 사건 뒤 한결 성숙해진 바람은 두려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4분의 1 지점쯤에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물이 말의 가슴까지 차오르자 커다란 말의 몸이 밀리는 것이다. 물살의 힘이 안장을 타고 전해졌다. 말은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그나마 여의치 않았다. 문제를 알아차린 그 순간, 말이 버티려고 멈추는 순간 바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초원에서 제일 큰 말도 그 격류 앞에서는 강아지에 불과했다. 말은 넘어지더니 떠내려갔고, 바로 서려고 발버둥쳤지만 2~3초 뒤 격랑에 잠겨 버렸다. 그때 나도 말에서 떨어져 나갔다. 팔을 휘저었지만 격랑 앞에서는 자부하던 수영 실력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허리에 묶어 놓은 파일 옷이 물에 젖자 마치 뒤에서 누군가 껴안고 물로 끌어들이는 듯했다. 머리를 물 밖으로 내야 된다고 다짐을 줬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물속에서 숨을 한번 놓치자, ‘이렇게 가는 건가’ 하는 두려움과 함께 강 동편에서 기다리는 사람 얼굴이 떠올랐다. ‘나야 숨을 두어번 더 놓치면 고통 없이 가겠지만, 내가 가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하나.’ 숨을 참고 고개를 드는 대신 물속으로 밀어 넣고 팔을 저었다. 몇십 미터쯤 떠내려갔을까. 휘두르는 팔이 힘차게 바위를 때렸다. 그리고 나는 일어설 수 있었다. 나오자마자 말을 살폈다. 말은 나보다 30미터쯤 앞에서 밖으로 탈출했다. 너무나 고맙고 미안해서 말에게 다가가 연신 사과하며 달랬다.

“미안해, 미안해, 주인을 잘못 만나서. 헤어지는 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때리지 않을게.”

영상을 찍다 망연자실해진 성제가 황망히 다가온다. 겨우 몇십초 만에 일어난 일이다.

“가는 줄 알았어. 한데 물속에서 누가 나를 도운 듯해.”

싱긋 웃으니 성제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한다. 살았다. 안도감보다 오히려 기다리는 사람 생각이 더해졌다. 실패한 것이 다행이다. 행여 내가 건너고, 성제의 말이 넘어졌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는 수영도 못하는데. 삶에 대한 의지가 그렇게 사회적인지 몰랐다.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지배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남이었다.

이미 늦었으니 젖은 말을 달래서 상류로 오르기로 했다. 성제의 휴대전화 배터리는 끝나서 소용이 없었고, 마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제는 가진 옷을 모두 내게 넘기고 셔츠 차림으로 비를 맞았다. 빗속에서 반 시간 정도 말을 먹이고 다시 산을 올랐다. 흠뻑 젖은 안장을 올린 바람도 마침내 언덕을 버거워했다. 노련한 성제의 검둥이 말이 하안단구 끄트머리 가장 높은 봉우리를 따라 길을 살피며 움직였다. 몸이 벌벌 떨리고 말은 지쳐 허덕였지만, 아래의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으로 물살이 세차게 흐르고, 가까이 검은 구름은 설산을 휘감고 있는데 저 멀리 서쪽 지평선으로 지는 해가 하얀 구름 무리에 싸여 붉은빛을 뿜는 광경은 말할 수 없이 장엄했다.

비가 오면 산은 무서워진다. 저 검은 능선 너머에 탈라스와 에센의 목장이 있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말과 함께 계곡 급류에 휩쓸려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공원국 제공
비가 오면 산은 무서워진다. 저 검은 능선 너머에 탈라스와 에센의 목장이 있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말과 함께 계곡 급류에 휩쓸려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공원국 제공
여름철 나와 함께 머무른 아내와 아이들이 한국으로 떠나는 날 오슈르는 학교 음악 선생님을 모셔와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공원국 제공
여름철 나와 함께 머무른 아내와 아이들이 한국으로 떠나는 날 오슈르는 학교 음악 선생님을 모셔와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공원국 제공
종마에게 공격당하다

지치고 비 맞은 우리에게 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 절벽 가장자리에서 암컷 열 마리가량을 거느리고 풀을 뜯던 종마가 우리를 목격하고는 슬금슬금 다가왔다. 평소였다면 바람을 타고 그 건방진 녀석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채찍은 급류에 휩쓸려 갔고, 지금 바람은 탈진해서 투지가 없었다. 암컷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놈은 우리들 지친 패잔병들에게 길을 비켜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바람이 놀라 뛰면 뒤는 바로 낭떠러지다. 어찌하든 놈을 쫓아내야 한다.

“윤공, 위험해. 저놈을 돌로 쫓자.”

언제나 희생적인 성제가 물에 젖은 나 대신 말에서 내려 돌을 준비한다. 팔매질을 하면 움칫하다가도 그 녀석은 물러서기는커녕 더 바싹 다가왔다. 그 기세에 겁을 먹은 성제의 검둥이가 달아났다. 놀란 성제는 말을 찾아 뛰고, 상대 수컷은 기세가 더 올라 쫓아온다.

“윤공, 뛰지 마! 여기 4천 미터야. 내가 말로 추격할게.”

내가 달아난 말을 되찾는 순간까지 성제는 계속 돌팔매를 날리고 있었다.

다행히 성제가 다시 말에 오르니 암말이 대피한 것을 확인한 수컷은 더 이상 우리를 따르지 않았다. 젖은 나나 옷을 다 넘긴 성제는 물론, 말 두 마리는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한편으로 먹이고 한편으로 걸으면서 투르파르켈 유르트까지 도착하니 이미 밤 아홉시였다.

새벽에 볼케로 돌아가니 한잠 자지 못하고 기다린 아내의 얼굴이 수척하다. 성제가 나를 위해 변명한다. “형수 빨리 보려고 지름길로 오다가 물에 빠졌어요.”

지금 아내는 말한다. “8월11일은, 당신 두번째 생일이야.”

재갈도 고삐도 달지 않았지만 어미 말은 황혼 무렵이면 여지없이 사슬에 묶인 망아지를 찾아온다. 풀려난 망아지는 어미 젖을 빨아대며 긴 기다림을 보상받고 어미는 연신 새끼 털을 핥으며 미안함을 달랜다. 짐승도 사람도 기다리는 이들 덕에 격(格)을 얻는다.

젖먹이를 찾아가는 암말들이 수말을 만났다. 수말은 앞발을 치켜들고 울부짖는다. 공원국 제공
젖먹이를 찾아가는 암말들이 수말을 만났다. 수말은 앞발을 치켜들고 울부짖는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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