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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여가

나는 죄를 지었다, 타이가를 경외하지 않은 죄를

등록 2017-12-08 19:46수정 2017-12-09 21:30

[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⑤ 겨울 타이가의 선물

해무 가득한 대양에 몰려오는
시커먼 파도, 아니 그보다 수십배 큰
해일이 덮쳐오는 듯했다
제발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파벨 아저씨는 아무 말씀이 없지만
가끔 빙그레 웃으셨는데,
그 웃음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엄청난 동상은 아닌 거야’

눈길을 헤치고 타이가를 내달리는 순록들. 한기가 뼈 깊숙이 들어가 뼈마디가 하나하나 부러진 듯한 동통(疼痛)은 타이가의 겨울을 실감하게 했다. 공원국 제공
눈길을 헤치고 타이가를 내달리는 순록들. 한기가 뼈 깊숙이 들어가 뼈마디가 하나하나 부러진 듯한 동통(疼痛)은 타이가의 겨울을 실감하게 했다. 공원국 제공
파미르로 돌아가는 길에는 시베리아를 동에서 서로 건너며 먼저 순록 유목민들을 만날 것이다. 유목 세계는 알타이 좌우로 펼쳐진 건조 초원을 넘어 타이가와 툰드라까지 뻗어 있기 때문에 거시적인 안목을 얻기 위해 북아시아 조사를 간과할 수 없다.

새벽 열차로 러시아연방 사하공화국 남단 네륜그리에 도착했을 때, 수은주는 이미 영하 30도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하는 남북한 15배 면적에 인구 백만이 사는 지역으로, 믿기지 않을 만큼 춥고 인구가 희박한 곳이다. 그러나 금과 다이아몬드가 쏟아지고 천연가스가 나면서 모스크바의 중앙 정부가 공을 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사하공화국 타이가의 가장 깊은 곳에는 퉁구스계 에벤키 순록치기들이 산다.

목적지는 알단 지구 하티스티르 마을이다. 해마다 순록 썰매 경주가 열리는 곳, 국제순록목축센터의 연락소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네륜그리에서 알단으로 가는 길에는 눈이 깔렸지만 노면은 평평했다. 북으로 갈수록 눈은 깊어져, 길옆으로 눈에 머리채를 휘어잡혀 땅에 묻히고 활처럼 휜 나무들이 즐비했다. 어떤 녀석은 이번 겨울의 눈을 이겨내지 못하고 꺾일 테고, 어떤 녀석은 봄이 오면 다시 서 내년에 다시 눈발에 맞설 것이다. 유리창은 차가웠지만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하얀 풍경은 짐짓 목가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사라지는 데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맑은 눈을 가진 청년 이론치가 설상차 뒤에 매단 나무 썰매에 기름 한 드럼, 소금 두 덩이, 사료 두 가마, 부동액과 내 짐 두 덩이를 싣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공원국 제공
맑은 눈을 가진 청년 이론치가 설상차 뒤에 매단 나무 썰매에 기름 한 드럼, 소금 두 덩이, 사료 두 가마, 부동액과 내 짐 두 덩이를 싣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공원국 제공
“늑대 있는 곳으로 절대로 보낼 수 없어”

택시가 눈길을 위태롭게 달려 마을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도무지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무턱대고 택시를 몰아 마을 행정센터로 갔다. 센터 앞에서 차를 세우니 우리네랑 비슷하게 생긴 아저씨 한 분이 나왔다. 잠시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알단강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는데 벌써 서 있기가 버거웠다. 통성명이 오가고 나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여기서 순록치기들을 관찰할 거예요. 숙소 있나요?”

“여기 숙소는 없는데. 모레 왔으면 좋았을걸.”

“그럼 오늘은 내 개인 텐트에서 잘 거예요.”

아저씨는 내 몰골을 살펴보더니 어이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작은 텐트 안에서 자면 죽어요. 오늘 밤 영하 40도라고.”

택시는 아직 서 있으니 돌아가라는 투였다. 여태껏 그랬듯이 첫 단추가 중요하다. 애걸조로 어투를 바꿔서 텐트 안에서 자며 모레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의 완강한 태도를 보고 돌려보내기도, 텐트에서 재우기도 뭣했는지 아저씨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도착한 사람은 마을 자치단체에서 문화 클럽을 담당하고 있는 올가 스타로스티나 할머니였다. 덩치만큼 마음씨도 푸근한 올가는 마을 여기저기를 구경시켜며 잠까지 재워주었다. 그런 올가도 그날 밤 내 계획을 듣고는 손사래를 쳤다.

“미누스 소락 뺘지 프 가라흐!”(산속에는 영하 40도라고)

나도 나름 준비를 했다며 떼를 썼다. 할머니는 사실 순록 유목가구들의 분포를 대략 알고 있었다. 마을에서 60㎞ 떨어진 곳에 두 가구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곳으로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나 할머니는 완강히 말렸다.

“거기는 늑대 때문에 순록을 거의 잃었다. 서른 마리밖에 없어. 늑대 있는 곳으로 절대로 보낼 수 없어.”

“늑대요? 꼭 그곳으로 갈래요. 늑대가 사람은 해치지 않을 거잖아요.”

나중에야 내가 한 의미를 알고 떼를 쓴 것을 후회했지만, 그날 늑대란 단어는 나의 호기심을 더 끌어당길 뿐이었다. 한 시간 동안이나 말싸움을 하다 기어이 할머니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마을의 행정수반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참 이야기했다. 야쿠트말로 이어진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통화를 마친 할머니는 아침 일찍 행정센터로 가자고 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아침에 행정센터로 가니 조회에 나를 배석시켰다. 행정수반인 이반은 화끈하고 정 많은 남자였다.

“이런, 이렇게 안 좋은 날 그렇게 먼 곳에서 외국인 친구가 오셨다? 어쩌나…….”

한참이나 고민하고 서로들 야쿠트어로 대화를 나누더니 이반이 부하 직원 누구에게 러시아어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 친구를 그쪽으로 보내줘. 차 준비해.”

고맙게도 이반이 원래 내일로 예정된 유목지 급유일을 당겨 오늘 가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아직까지 ‘그곳’이 어딘지 몰랐다. 올가 할머니는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두꺼운 양말과 펠트신 한짝을 가지고 왔다.

“썰매를 타고 갈 때 꼭 이 신을 신어. 그 신으로는 안 돼. 알았지?”

점심나절 마을 공용차 운전사 콜랴가 엔진에 보온 덮개를 씌우고 이중창을 단 소비에트 시절의 운송용 승합차(유개트럭) 우아직을 끌고 왔다. 하티스티르 공동체는 마을 출신 순록치기들에게 정기적으로 기름을 공급하고 있었다. 졸지에 감기 든 이반도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우리가 갈 곳은 미슈킨 마을, 승합차로 알단까지 내려간 뒤 남쪽으로 70㎞를 더 달리고 설상차(스노모빌)로 산길 20㎞를 달려야 닿는 곳이었다.

타이가 깊은 곳에 사는 순록치기들의 순록 도축 장면. 고도의 기술과 협업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공원국 제공
타이가 깊은 곳에 사는 순록치기들의 순록 도축 장면. 고도의 기술과 협업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공원국 제공

‘기름을 버리고 내일 찾으러 오면 안 될까’

트럭에서 내리자 한 청년이 궤도 설상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다. 온 얼굴을 다 가리고 광대뼈와 눈만 드러냈기에 장난스러운 맑은 눈이 더 두드러졌다. 스물여덟에 세 아이의 아빠지만 심성은 청소년 같은 콘스탄티노프 이론치였다. 처음부터 장난이었다.

“헤이, 벌써 얼었어? 괜찮아?”

설상차 뒤에 매단 나무 썰매에 기름 한 드럼, 소금 두 덩이, 사료 두 가마, 부동액, 내 짐 두 덩이를 싣고 올라탔다. 삐걱대는 나무 썰매가 내심 미덥지 않은데 이반은 인사를 하고 바로 차를 돌렸다. 들뜬 마음에 올가 할머니가 준 펠트신을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럼 등산화가 한 시간을 못 견딜까 하며.

썰매에 자리를 잡자 특별한 경고도 없이 설상차는 달렸다. 설상차는 평평한 길을 엄청난 속도로 달려 바로 강 하나를 건너 타이가로 진입했다. 썰매를 탄 지 겨우 오분쯤부터 타이가의 칼날 같은 바람을 맞은 얼굴이 얼기 시작했다. 허벅지까지 눈이 쌓인 숲길은 자그마한 등산로나 마찬가지였다. 상하좌우의 예리한 굴곡을 극복하고 설상차는 내달렸고, 매달린 썰매는 삐걱대면서도 용케도 따라갔다. 그사이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문제는 무게였다. 눈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개활지를 건널 때 썰매가 크게 기울어지더니 한쪽 날이 눈 속으로 빠져버렸다. 덕분에 나도 눈 속에 묻혔다 나오니 이론치가 말했다.

“내가 앞으로 갈 때 썰매를 밀어.”

설상차가 엔진 소리를 높일 때 나도 안간힘을 써서 썰매를 밀었다. 눈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오직 하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숲속으로 달릴 때 나뭇가지가 다가오면 재주껏 고개를 숙여야 했다. 호히, 호히! 소리를 지르며 이론치는 설상차 위에 서서 달리며 용케도 나뭇가지를 다 피했다. 그렇게 두 번 더 빠지고 썰매를 빼내는 중노동을 하다 보니 점심을 먹지 못한 나는 힘이 거의 고갈되었지만 썰매의 요동은 몸에 익어갔다. 그러나 다시 개활지로 진입하는 순간 썰매가 눈에 묻혔고, 썰매가 빠져나가는 찰나 눈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썰매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야속한 설상차는 뒤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고 고속으로 달려갔다. 설상차가 멀어져 갈 때 필사적으로 헤이, 헤이 외쳤다. 다행히 차는 다시 숲으로 진입하는 곳에서 멈췄고 나는 푹푹 빠지는 설원을 어기적대며 걸었다. 그렇게 설상차에 다가가니, 아뿔싸 부동액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떨어질 때 부동액을 잡고 떨어졌던 모양이다. 짐을 잃은 것은 내 잘못이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니 다행히 부동액은 내가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부동액을 챙겨 오니 이론치가 측은해하면서도 대견한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얼었어?”

“아니.”

“괜찮아?”

“그럼!”

코, 발, 다리, 코, 손, 몸 순서로 추위를 느끼는 부위가 번갈아 가며 바뀌더니 마침내 발에 감각이 사라졌다. 감각이 사라지자 동상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마침 허기는 지는데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그렇게 개활지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능선에서 썰매는 또 빠졌고, 이번에는 아예 뒤집어지며 드럼통이 굴러떨어졌다. 속으로 ‘기름을 버리고 내일 찾으러 오면 안 될까’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론치는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는 기어이 기름통을 다시 싣고 묶었다. 이제는 날마저 어둑어둑해지는데 기름통을 싣느라 한참 세워놓은 설상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추위 속에서 짐을 잡느라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 썰매에 기대 떨었다. 이론치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얼마 안 남았어” 하며 쉬지 않고 힘차게 시동로프를 한참 당기니 부르릉 소리가 났다.

드럼통이 떨어지지 않도록 꽉 잡고 썰매에 매달렸다. 어두워지는 타이가, 영하 40도 이하면 생기는 뿌연 안개 속에 검은 나무들이 빽빽한 언덕들이 다가왔다 뒤로 지나갔다. 해무 가득한 대양에 몰려오는 시커먼 파도, 아니 그보다 수십배 큰 해일이 덮쳐오는 듯했다. 그 거대한 해일을 하나하나 헤치면서 추위보다 견디기 힘든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제발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어둠이 짙어질 때 안개 속에서 울타리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자그마한 통나무집 두 채가 보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한 시간이면 올 20㎞ 길을 두 시간에 도착한 우리. 이론치가 앞쪽 통나무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나도 모르게 넙죽 절을 했다. 인류학 연구자는 현지의 예습을 존중해야지 자신의 방식을 따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열기가 얼굴에 느껴질 때, 문 앞에서 뿌연 안개가 확 퍼질 때, 두려움에서 벗어난 반가움 때문에 어버이를 만난 듯 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올가(앞의 올가와 동명이인. 이론치의 어머니), 파벨(아버지), 마리야(순록 조사관) 세 분이 정말 어버이로 느껴졌다.

산길 20㎞를 달려 도착한 이론치네 통나무집. 그날 밤 나는 사슴 가죽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공원국 제공
산길 20㎞를 달려 도착한 이론치네 통나무집. 그날 밤 나는 사슴 가죽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공원국 제공

“움직인다, 움직여요!”

신을 벋으니 두 발이 뻣뻣해져 완전히 감각이 없었다. 허기졌지만 먹을 생각도 못한 채 그들이 건네준 곰기름을 듬뿍 발라 끊임없이 문질렀다. “더 세게, 세게.” 한 시간을 공들였건만 오른발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 이게 그 무서운 동상인가?’ 문득 2차 세계대전 참호전에서 견디다 동상으로 팔다리를 잘랐다는 병사들 이야기가 생각나 움찔했다. 마리야 할머니가 다독였다.

“마셔, 마셔야 움직인다.”

뜨거운 차를 마시고 한참 있다 밥까지 먹었다. 파벨 아저씨는 아무 말씀이 없지만 가끔 빙그레 웃으셨는데, 그 웃음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엄청난 동상은 아닌 거야.’ 침대 세 개가 있는 오두막이 왜 그렇게 천국처럼 느껴지던지. 물고기 통조림 국, 삶은 감자. 그리고 차. 그래도 그날 저녁은 풍성했다. 밥을 먹고 나서 다시 발을 꼼지락거렸다. 엄지발가락이 움직인다.

“움직인다, 움직여요!”

모두들 웃었다. 공간이 없어 나는 사슴 가죽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이 될 즈음, 감각을 일부 회복한 발에 통증이 느껴졌다. 한기가 뼈 깊숙이 들어가 뼈마디가 하나하나 부러진 듯한 동통(疼痛). 차라리 실제 골절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른발가락을 하나하나 만져보니 엄지 외에는 감각이 없었다. 어쩌면 발을 영영 움직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내 무모한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알량한 고어텍스 등산화는 타이가 앞에서 종이 한 장 역할도 해내지 못하고 두 발을 모두 얼려 놓았다. 통증 덕에 잠은 오지 않고 경망스러운 망상이 밀려들었다. 한편으로 내 분별없는 행동을 책망하며 한편으로 이 상황을 원망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잠 못 들다 새벽에 오줌을 누러 밖으로 나가니 굴뚝으로 올라온 불똥이 타이가 가운데서 별과 뒤섞이고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죄를 지었다. 타이가를 경외하지 않은 죄. 이토록 위협적인 자연 앞에서 준비되지 않은 자를 기다리는 것은 원래 죽음이다. 그러나 나는 엄연히 살아 있고 발가락은 움직인다.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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