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학술

“폭력이 있을수록 혁명은 사라진다” 평화사상의 ‘빈센트’

등록 2021-06-05 13:35수정 2021-06-05 13:40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44) 바르트 더리흐트(1883~1938)

‘서양의 간디’ 별명 가진 평화주의자
전쟁·파시즘 외 러시아혁명도 비판
“비폭력만이 근본 변화 가능” 주장
바르트 더리흐트. 델퍼 누리집
바르트 더리흐트. 델퍼 누리집

내가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인 <감자 먹는 사람들>은 농민의 빈곤한 삶에 공감해 품게 된 새로운 사회적 도덕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버지가 1882년 네덜란드 남부의 시골인 뉘넌의 작은 개척교회 목사로 부임하자, 이듬해부터 2년간 그곳 농촌과 농민들을 그린 작품 중의 하나다. 그림은 이런저런 직업의 실패를 거듭하다가 27살에 택한 마지막 길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힘찬 출발이었다.

1890년 빈센트가 죽고 20년 뒤 27세의 바르트 더리흐트가 뉘넌의 목사로 부임하면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빈센트도 한때 목사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무급의 가난한 전도사로 일하며 화가의 길을 택했으나 아버지와 갈등했다. 빈센트와 달리 바르트는 목사가 되었지만 칼뱅주의 목사인 아버지와는 어려서부터 대립했고, 신학대학을 다니면서도 도그마적 학문에 실망했다. 세상과 등질 뻔한 고뇌를 공유한 두 사람은 소박하고 성실한 농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자유로운 영혼으로 발전했다.

목사였으나 기독교와 결별

바르트는 당시 네덜란드 지성계를 석권한 독일 사상가들보다 프랑스와 영국의 유토피아주의자들과 기독교 사회주의자들, 특히 키어 하디, 윌리엄 모리스, 존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러스킨이 사회적 책임을 갖는 생산을 강조하면서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 영국 노동자들에게 “파괴적인 기계나 화합물을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죽어야 한다”고 한 말을 즐겨 인용했다. 바르트는 뉘넌에 오기 한 해 전에 기독교인사회주의자연맹(Bond van Christen Socialisten·BvCS)에 가입한 뒤 뉘넌 부근의 공장 지대에서 노동자의 빈곤을 목격하고, 사랑의 정신으로 사람과 세상이 거듭나야 한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신적 요소를 무시한 당시의 마르크스주의를 값싼 궤변이라고 비판한 그는 조직된 사회주의가 진정으로 혁명적이지 못한 것은, 도그마로 정체되고 기성 질서의 기둥이 된 교회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의 총동원이 전 유럽을 뒤흔드는 가운데 바르트는 ‘교회의 죄’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제국주의와 교회가 공모하여 전쟁을 초래했다고 비판하며 전쟁에 반대했다. 이어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돕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그것을 주장하는 글은 물론 설교도 금지당하고 구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국노로 비난받으면서 추방까지 당했다. 당시 대다수 국민들은 물론 평화주의를 주장하던 사회주의자들도 대부분 전쟁 지지로 돌아섰다. 1918년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지배하지도 지배되지도 않고 스스로 지배하고 스스로 표현하고 스스로 발전한다”고 깨달은 뒤 기독교인사회주의자연맹을 탈퇴하고 목사를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 탓인지 뉘넌의 교회 입구에는 그 교회를 그린 빈센트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하고 그곳에서 8년간 목회 활동을 한 바르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반 고흐가 1884년에 그린 뉘넌 교회의 오래된 탑. 바르트 더리흐트는 1900년대 초 이 교회에서 목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위키피디아
반 고흐가 1884년에 그린 뉘넌 교회의 오래된 탑. 바르트 더리흐트는 1900년대 초 이 교회에서 목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위키피디아

북쪽의 뉘넌을 떠난 빈센트가 남쪽의 아를에서 해바라기를 그리듯이 바르트도 뉘넌을 떠나 남쪽의 그리스철학과 동양철학에 심취하여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주장하고, 복음서의 ‘의무로서의 사랑’ 대신 깊은 내면에서 솟는 관대하고 진실하며 건강한 사랑 개념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새로운 성경으로 삼은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을, 국가적 노예제도와 그것이 수반하는 폭력 숭배, 파시즘의 부상,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기인한 메시아적 기대에 대한 해독제로 보았다. <반군국주의자들과 그들의 투쟁 방법>에서 그는 전쟁이 악할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하며 비효율적인 수단이라면서 반전과 건설적 혁명을 위한 투쟁은 순수한 수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했다. 1918년 군인들과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하고 그들의 권력과 책임을 의식하라고 촉구한 그는 1921년 국제반전사무국(International Anti-Militarist Bureau·IAMB)을 창설하고, 1923년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최초의 네덜란드 법을 통과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는 등 수많은 평화운동에 관여했다.

그는 “자본가들이 전쟁을 만든다”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프롤레타리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비판하는 등 평생을 완전한 평화주의자로 살았다. ‘지성인과 현대 전쟁’이라는 연설에서는 전쟁기계를 만든 모든 사람, 프롤레타리아, 지식인 모두가 전쟁에 책임이 있다면서, 특히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적 기준을 높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지식인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대다수의 성직자와 교사, 역사가와 언론인, 정치 및 사회 지도자, 화학자 및 엔지니어가 자신의 몸을 파는 여성보다 천박하다고 비난했다. 그의 반군국주의는 그가 추구한 새로운 문화와 사회의 창조라는 과업의 일부에 불과했다. 사회 전반에 걸친 근본적 혁명을 통해 노동자, 여성, 식민지 인민 및 지식인이 그들의 불명예스러운 노예제도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야말로 그의 꿈이었다. 톨스토이나 빈센트처럼 모든 도그마와 열정에서 벗어나 진실의 수호만을 믿은 그는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범세계적으로 아나키즘, 리버테리언(자유 지상주의자) 사회주의자 및 혁명적 반군사 평화주의가 함께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러시아 혁명·스페인 시민혁명도 비판

1925년에 이주한 스위스 제네바가 국제연맹 등 국제주의 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나, 그는 제국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연맹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에 그는 1927년 ‘식민지 억압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브뤼셀 의회’를 주최한 데 이어 1930년대에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가졌다. 그리고 간디, 아인슈타인, 헉슬리 등과 협력하여 국제적인 평화연대운동을 전개하면서 평화 연구와 저술 작업도 함께 했다. 1931년과 1933년에 쓴 두 권짜리 방대한 저서 <행동으로서의 평화>(Vrede als Daad)는 ‘전쟁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의 원리, 역사 및 방법'이라는 부제처럼 평화에 대한 최고의 고전이 되었지만, 아직 우리말 번역은커녕 소개조차 없다. 폭력, 전쟁 및 잔인함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 모든 문화와 모든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임을 보여주는 이 책은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War against War)과 함께 그의 중요한 저술로 꼽힌다.

바르트 더리흐트. 사탸그라하 재단 누리집
바르트 더리흐트. 사탸그라하 재단 누리집

그의 대표작은 1934년에 쓴 <폭력의 정복 : 전쟁과 혁명에 대한 에세이>(The Conquest of Violence : an Essay on War and Revolution)이다. 이 책은 1930년대 평화운동의 성서처럼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사회운동의 물결을 비폭력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나 역시 우리말 소개는 없다. 그는 그 책에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부르주아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비판했으며, 특히 식민지 해방을 선구적으로 강조했다. 나아가 전쟁의 근본 원인은 사회의 폭력에 있으므로 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며, 사회의 문화와 가치를 바꾸는 데에는 오랜 싸움이 요구되지만 반드시 비폭력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폭력이 있을수록 혁명은 사라진다”(The more violence, the less revolution)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혁명은 물론 스페인 시민혁명까지 비판한 그의 관점은 당시에는 우파는 물론 좌파로부터도 비판받았지만, 1938년 그가 죽고 난 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운 사회운동의 이정표로 재인식되었다. 그가 만년에 쓴 에라스뮈스 전기에서 에라스뮈스를 전쟁과 폭력에 맞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사상의 자유와 인류의 해방을 위해 싸운 인류애 정신의 구현으로 찬양한 것처럼, 그는 ‘20세기의 에라스뮈스’로, 또는 많은 사람이 말하는 ‘서양의 간디’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나의 바르트는 ‘평화사상의 빈센트(승리자)’다.

▶ 박홍규: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재개봉 요청 이어지는 ‘서울의 봄’…영화와 현실 비교 ‘밈’도 양산 1.

재개봉 요청 이어지는 ‘서울의 봄’…영화와 현실 비교 ‘밈’도 양산

출판인회의 “출판의 자유 압살 윤석열을 규탄한다” 2.

출판인회의 “출판의 자유 압살 윤석열을 규탄한다”

연예계도 계엄 여파 ‘혼란’…두아 리파 내한공연 두고 문의 빗발 3.

연예계도 계엄 여파 ‘혼란’…두아 리파 내한공연 두고 문의 빗발

민희진, 디스패치 기자 고소… “지속적으로 거짓 사실을 기사화” 4.

민희진, 디스패치 기자 고소… “지속적으로 거짓 사실을 기사화”

“하도 급해서 서둘렀다…이승만 존경하는 분들 꼭 보시라” 5.

“하도 급해서 서둘렀다…이승만 존경하는 분들 꼭 보시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