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빙>이라는 2016년 영화는 1958년 버지니아에서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이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1년형 판결을 받고 형 집행 면제 조건으로 25년을 다른 주에서 살게 된 뒤, 오랜 재판 투쟁 끝에 1967년 연방대법원에서 결혼금지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내어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실화를 다루고 있다. 1950년대까지 24개 주에 그런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악랄한 인종차별 노예법으로 고통을 당했다. 남북전쟁으로 노예라는 법적 신분은 사라졌으나, 노예의 삶은 계속되었다. 그것도 1960년대까지가 아니라 지금까지다. 어쩌면 1960년대 잠깐 해방되는 듯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미국을 보면 5월1일 메이데이(노동자의 날)가 미국에서, 그것도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좀체 믿어지지 않는다.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 이후 1889년 7월에 여러 나라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서 5월1일을 메이데이로 결정한 뒤 1890년부터 대부분의 나라에서 5월1일을 메이데이로 기념해왔다. 반면 한국에서는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10일을 노동절로 했다가 1963년에 ‘근로자의 날’로 바꾸고, 1994년부터는 날짜를 5월1일로 바꾸었다. 이름을 ‘노동절’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지만 고쳐지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도 9월 첫 월요일을 노동절로 하면서 5월1일은 준법절이라고 하는, 한국에서보다 더한 코미디를 해왔다.
헤이마켓 사건은 5월1일부터 시작되었으나, 4일에 절정에 이르렀다. 전날 경찰에게 살해당한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 노동자들의 평화 행진이 이날 열렸다. 경찰이 그들을 해산시키려 하자, 폭탄 폭발과 뒤이은 발포로 인하여 경찰 일곱명과 민간인 네명 이상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혐의자로 체포된 아나키스트 여덟명은 폭탄을 던지지 않았음에도 일곱명에게는 사형이, 나머지 한명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그 재판은 미국의 양심적인 사람들만 아니라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모리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았지만, 사형수 중 두명은 종신형으로 감형되고, 한명은 교수대로 끌려가기 전에 자살했다. 나머지 네명은 처형되었는데 그중 한명인 앨버트 파슨스(1848~1887)는 10대에 남부군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으나 전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를 창립하여 링컨의 공화당을 지지하면서 흑인의 참정권을 비롯한 인권운동에 종사한 백인 언론인이었다.
앨버트 파슨스는 친구들과 이웃의 외면, 그리고 신문사 도산으로 1869년부터 르포 기사를 쓰기 위해 텍사스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만난 흑인 노예 혈통의 재봉노동자 루시 파슨스와 1872년에 결혼했다. 20살 이상 연상인 흑인 해방노예와 결혼했던 전력이 있던 루시와, 엘리트 백인인 앨버트의 사랑은 <러빙>의 사랑보다 더 감동적이다. 당시 미국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의 결혼은 금지되었고, 특히 남부에서는 흑백분리법이 강력하게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신혼부부는 시카고 빈민촌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은 함께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나, 앨버트가 몇 차례의 선거에서 실패한 뒤 아나키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했으며, 헤이마켓 시위도 주도했다. 대학을 졸업한 앨버트와 달리 루시는 독학으로 <알람>이라는 신문을 창간해 아나키즘 운동을 독려했고, 여러 차례 연설을 했다. 헤이마켓 시위 후의 연설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의 폭탄 투척을 부인하면서 아나키즘은 폭탄과 횃불을 든 사람이 아니라 평화롭고 법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나키란 혼돈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역설하면서 굶주리는 빈민과 노숙자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낳은 사회가 온존하는 한 아나키스트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남편이 처형당한 뒤에도 루시 파슨스는 자신의 운동을 더욱 강고히 하고 국제적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1888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는 윌리엄 모리스, 표트르 크로폿킨과 함께 연설했다. 루시 파슨스는 언론과 저술 활동을 통해, 오직 직접행동만이 빈민과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고 특히 여성들이 가정부로 머물러서는 안 되며, 주부의 역할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알려진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과 루시는 많은 부분에 동의했으나 결혼제도에 대한 생각만은 달랐다. 루시는 결혼이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옹호한 반면 골드만은 결혼이 여성을 억압한다고 하면서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했다. 루시는 자본주의의 억압에 직접 맞서기 위해서는 보다 중요한 이슈들이 있다고 하면서 1905년 유진 데브스, 마더 존스와 함께 미국 노동조합 운동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을 설립해 산업민주주의를 추구했는데, 당시 시카고 경찰은 그를 “천명의 폭도보다 더 위험한” 사람으로 불렀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창립총회의 유일한 여성 연설자로서 루시는 여성을 ‘노예의 노예’라고 하면서 자신의 독립성과 인간성에 의해 개성을 주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을 옹호하고, 총파업을 통한 공장의 접수, 즉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는 지도자 없이 노동자들이 평등하게 공장을 운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노동자들에 의한 공장의 자주관리와 이를 통해 사회를 자유연합으로 만들어갈 것을 주장한 생디칼리슴을 옹호한 그는 계급이야말로 억압적 사회체제를 작동시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서점 ‘루시 파슨스 센터’. 위키피디아
헤이마켓 사건으로 사형당한 앨버트 파슨스. 위키피디아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비롯한 모든 계급차별에 맞서 싸우던 루시 파슨스에게 미국 정부는 지속적인 탄압을 가했다. 감옥에 가두거나 연설을 금지하기도 했으며, 거리에서 아나키즘 잡지를 판매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루시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의 노력으로 1889년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아나키스트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었다. 뒤에 도러시 데이, 존 리드, 노엄 촘스키, 헬렌 켈러, 유진 오닐, 게리 스나이더, 피터 시거 등이 참여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정부의 탄압으로 미국에서는 그 힘이 계속 약화되었으나, 그 조직은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루시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반제국주의 반전운동을 전개했고, 1930년대의 뉴딜정책과 루스벨트의 민주당에 동조한 주류 노동조합인 ‘미국노동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와도 항상 거리를 두었다. 뉴딜정책은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혁명을 막으려는 의도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1942년 89살로 루시가 죽었을 때 경찰은 그가 남긴 것을 모두 압수하여 없애버려서 누구도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27년 뒤인 1969년, 보스턴 시내에 그녀의 이름을 건 책방이 생겼다. ‘주인도 없고, 보수도 없다’는 표어 아래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그 서점에서 쏟아져 나온 파슨스 관련 서적들과 함께 아나키즘 책들을 읽은 추억이 있다. 보스턴을 비롯하여 미국의 많은 진보적 서점들이 문을 닫았는데 루시 파슨스 센터 서점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헤이마켓 대학살은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노동운동사에 가장 영향력이 큰 사건임에도 미국에서는 잊히고 있어 유감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 박홍규: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