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사람이 예술의 특권을 장악하고, 민중은 예술에서 멀리 떨어진 지위에 세워져 있다. (…) 예술을 구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숨의 뿌리를 누르고 있는 특권을 빼앗아야 한다. 모든 사람을 예술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민중의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민중이 점차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정복되고 그들의 생각에 스며들어 이제는 그들과 닮아가고 싶어 할 뿐이다. 민중예술을 갈망한다면, 민중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라!”
이 외침은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세계적으로 벌어진 민중예술운동의 횃불이 된, 프랑스 소설가 로맹 롤랑이 1903년에 쓴 <민중극론>에 나오는 말이다. 부르주아지가 예술을 전유하여 예술이 타락하고 이데올로기적 지배라는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고 비판한 그 책을 1917년 일본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가 <민중예술론>으로 번역하고, 이를 다시 1922년 김억이 우리말로 번역한 지 100년이 되었다. 이듬해 김기진은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를 위시한 여러 작품이 일본어판으로 번역돼 조선에서도 널리 읽혔다고 했다. 1923년에 나온 롤랑의 간디 전기는 조선 청년들에게 특히 감동을 주었다. 이미 1915년에 “작품의 고결한 이상주의와 다양한 유형의 인간상을 묘사하여 진실에 대한 공감과 사랑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롤랑은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에서도 가장 널리 읽힌 작가였다.
1차대전 반대해 매국노 비판받기도
1866년 프랑스 중부의 클람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롤랑은 1886년부터 명문인 에콜 노르말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정신적 독립성을 지키고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철학을 포기하고 1887년부터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는 직전에 <전쟁과 평화>를 읽고 감동하여 톨스토이와 편지를 교환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1889년에 졸업할 때까지 문학과 음악과 미술에도 몰두한 롤랑은 2년간 로마에 유학하여 르네상스 거장들을 연구했다. 1892년에 결혼하고 리세 교사로 재직하면서 <근대 서정극의 기원>과 <16세기 이탈리아 회화의 몰락>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1895년부터 모교의
미술사 교수로 취임하면서 사회주의로 기울었다. 1897년부터 여러 편의 희곡과 음악평론을 쓴 뒤 1902년에 밀레, 1903년에 베토벤의 전기와 <민중극론>을 썼다. 이어 보어전쟁에서 드러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 민간인 포로의 학살과 강제 수용소를 다룬 <때는 온다>를 비롯하여 집필한 수많은 현실 비판 희곡들은 막스 라인하르트와 에르빈 피스카토르를 위시한 세계적 연극인들에 의해 상연되었다.
독일 출신으로 프랑스를 제2의 조국으로 삼은 음악가 장 크리스토프(베토벤을 모델로 함)를 통해 예술과 사회문제의 국제주의를 추구한 <장 크리스토프>를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소르본대학에서 음악사를 강의했다. 1906년과 1911년에 각각 미켈란젤로와 톨스토이의 전기를 쓰고, 1912년에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완성한 뒤 소르본을 떠나 작품 집필에 전념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46살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랑스를 뒤흔든 항전의 주장에 맞서 홀로 반대하고 독일과 프랑스 양국에 전쟁 중지를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롤랑은 프랑스를 떠나 중립국 스위스에 정착해 헤르만 헤세 등과 함께 반전 활동을 벌였다. 그는 당시의 전쟁(1차 세계대전)에서 최대의 약점을 보인 두 개의 정신력이 기독교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라고 통렬하게 비판한
<싸움을 초월하여>를 1915년에 썼고, 그해 받은 노벨문학상 상금을 적십자사에 기부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지지한 롤랑은, 개인의 자아 형성을 추구한 <장 크리스토프>와 달리 개인성을 부정하고 사회적 자기변혁을 주제로 한 <매혹된 영혼>을 발표하기 시작하고, 대영제국에 저항한 간디의 전기를 집필해 간디를 세계에 비폭력 지도자로 알리면서 식민지 지배에 항의했다. 1935년 막심 고리키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나는 등 소련 체제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이후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나치 지배하에서 완전히 고립되었고 병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집필에 열중하다가 1944년 78살로 죽어 고향의 작은 묘지에 묻혔다. 만년의 롤랑은 신앙인으로 돌아섰는데, 그 신앙은 톨스토이나 스피노자, 괴테나 베토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피안의 신에게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들과 같이 인간의 노력을 통한 신을 현세적으로 긍정한 것이었다.
“마음 위대한 사람이 영웅”
소설가이자 극작가이자 에세이 작가, 전투적 휴머니스트이자 염세적 리얼리스트, 역사가이자 혁명가이자 반전운동가,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 신비주의자이자 신앙인, 음악인이자 음악학자, 그리고 미술사학자라는 다양한 얼굴을 갖는 점에서도 롤랑은 특이한 작가이지만, 무엇보다도 평생 채식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로 산 극소수의 프랑스 작가 중 한명이라는 점에서 그는 이단이었다. 그 자신은 언제나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기를 호흡하는 데는 들창문 하나로도 족하다”고 말했다. 그와 뜻을 같이한 작가로는 당대에 같이 국제진보예술가회의에 참여한
아나키스트 작가 앙 리네르나 반전 활동을 같이 한 헤세밖에 없고, 선배로는 톨스토이, 후배로는 장 지오노가 있을 뿐이다. 롤랑은 무엇보다도 ‘홀로 세상에 저항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단아였다. 사람들이 언제나 말하기 망설이는 것을 용감하게 말한 점에서 이단이자 선구자였다. 자신의 입장이나 지위나 체면이나 이해관계 따위로 말하기 어려운 것을 그는 언제나 직선적으로 말했다. “논쟁을 하는 경우에는 상하도 신분도 연령도 이름도 없다. 진실 외에 아무 것도 없고 진실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한 그의 논쟁 정신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롤랑의 작품은 1950년에 베토벤 전기, 1954년에 톨스토이 전기를 비롯하여 간디, 미켈란젤로, 밀레의 전기가 1962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1963년에 <장 크리스토프>와
1969년에 <매혹된 영혼>을 위시해 여러 소설이 한국어판으로 나왔으며 전기들도 최근까지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단행본은 물론 논문도 거의 없다. 10대부터 지금까지 롤랑의 전기와 소설을 끊임없이 읽어온 나로서는 그에 대한 본격적인 저술이 없는 점을 항상 유감으로 생각해왔다. 롤랑만큼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1세기 동안이나 널리 열렬히 읽혔으면서도 그에 대한 간략한 평전이나 해설서 하나도 없는 작가가 또 있을까? 게다가 21세기에도 더 널리, 더 열렬히 롤랑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에 대한 저술은 반드시 나와야 한다. 그것은 지난 100년 동안 이어진 우리의 위대한 민중예술운동과 평화운동의 계승으로 이어져야 한다. 민중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어렵거나 너무 정적이라는 이유로 고전예술을 거부하고 장 자크 루소를 따라 “민중에게 혁명적 유산을 상기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 일하는 세력을 활성화할 ‘즐거움과 힘과 지성’의 서사적 예술”을 제안한 롤랑의 100년 전 이야기가 나에게는 여전히 새롭다. 그래서 “나는 사상이나 힘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위대했던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롤랑이 쓴 여러 사람의 전기를 다시 읽는다.
▶ 박홍규: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