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기사들이 보주 광장에서 시합(토너먼트)하는 모습. 네덜란드 화가인 피터르 바우베르만이 1655년에 그린 그림으로 슬로바키아 국립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위키미디어
랑의 주교 아달베롱(Adalbéron de Laon)은 1020년께에 쓴 ‘로베르 왕에게 올리는 시’(Poèmes au roi Robert)에서 ‘기도하는 사람’(oratores), ‘싸우는 사람’(bellatores), ‘일하는 사람’(laboratores)으로 사회가 구성되었다고 규정했다. 기원전 4세기에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왕·군인·일꾼으로 사회구성원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했듯이 아달베롱의 3분법은 연원이 깊지만, 기독교 관점에서 3분법을 하느님의 질서에 공식적으로 편입시킨 최초의 사례였다.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에서 종교인이 제1신분, 귀족이 제2신분, 평민이 제3신분으로 확정되었다.
종교인이 귀족·평민을 위해 기도하듯이, 귀족은 나라를 보호하려고 싸웠다. 전자는 교화·구빈사업을 위해 십일조를 걷었으며, 후자는 나라에 ‘피의 세금’을 냈기 때문에 평민을 보호하는 대가로 세금을 걷었다. 전자가 열심히 지식을 보전하고 전파하듯이, 후자는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면서 거의 일상적인 전투에 대비했다. 귀족들은 평화시에 사냥을 하거나 무술시합을 했다. 왕국이 통일되고 왕권이 안정될 때까지 툭하면 전투에 참여하던 그들은 놀이와 전투를 구별하지 않았다. 단지 놀이는 친한 사람들과 하고, 전투는 적과 한다는 점이 다를 뿐.
전쟁놀이 즐긴 프랑수아 1세
역사학자·사회학자인 조르주 비가렐로는 <몸의 역사>에서 지배층의 초상화를 분석하여 중세 기사들의 상무적 모습이 르네상스 시대에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16~17세기의 초상화에서 군사적 표시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지만, 주인공의 권력을 표현하는 방식을 바꿨다. 그들의 몸집이 아니라 세련된 몸가짐과 의복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16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귀족의 놀이에서 폭력의 요소가 줄고, 진정한 궁정 예술을 창조했다.
비가렐로는 프랑수아 1세(1515~1547 재위)가 참여한 궁정의 놀이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보여주었다. 프랑수아는 프랑스 왕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왕이었지만 봉건기사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키가 2미터가 넘는 그는 최초로 “전하”(Votre majesté)라는 말을 들은 왕인 만큼 장엄한 모습(majesté)을 초상화(루브르박물관 소장)로 남겼음에도 아주 폭력적인 놀이를 즐겼다. 1515년에 그는 앙부아즈성에 멧돼지를 여러 마리 풀어놓고 사냥놀이를 벌였다. 얼이 빠진 한 마리가 복도로 도망쳐 들어갔고, 왕이 몸소 그놈을 죽였다. 1546년에 그는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앙기앵 공작의 머리 위로 상자를 던졌다. 공작은 심하게 다쳐서 며칠 앓다가 죽었고, 프랑수아 1세는 애도했다. 이처럼 그는 죽기 한 해 전인 52살 때에도 철이 들지 않았다.
보주 광장은 16세기 중반 앙리2세가 마상 창 시합 중 사고를 당해 숨진 장소에 조성됐다. 당시 왕들은 모의전쟁과 전투 시합을 즐겼다. 파리 보주 광장의 북동쪽 모습. 위키피디아
1517년에 그는 왕세자 세례를 기념하는 모의전투를 벌였다. 프랑수아 1세는 나무로 도성의 모형을 재현하도록 명령했다. 도성 주위에 호를 두르고 수백명이 지키게 한 뒤, 왕은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군대를 이끌고 울타리로 돌진했다. 수비군은 나무로 만들고 쇠테를 두른 대포에서 탄환을 쏘았다. 속이 빈 공을 탄환으로 써서 공격군을 쓰러뜨렸으나, 다행히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프랑수아 1세는 유럽의 지배자가 되고 싶었고,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을 지배하는 카를로스 5세(일명 샤를 캥 또는 카를 5세)와 전쟁했다. 1515년에 즉위한 그는 샤를 8세(1483~1498 재위)부터 시작한 이탈리아 전쟁을 수행했다.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의 지배권을 되찾으려고 전쟁을 시작했지만, 그의 사위인 발루아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12세(1498~1515 재위)는 밀라노 공국을 치기 시작했다. 루이 12세의 할머니는 밀라노를 지배하다 스포르차 가문에 밀려난 비스콘티 가문 출신의 발랑틴 비스콘티였기 때문이다. 루이 12세도 직계 자손이 없기 때문에 사위인 발루아 앙굴렘 가문의 프랑수아 1세가 즉위했고 이탈리아 전쟁을 이어 나갔다.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남쪽의 마리냐노에서 스포르차와 교황 레오 10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을 1만6천명이나 학살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10년 뒤인 1525년 파비아를 공략하다 붙잡혀 마드리드로 호송되었다. 이듬해 1월 그는 카를로스 5세에게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나면서 아홉살과 일곱살의 두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그 뒤에도 양측은 가끔 전쟁을 하고 화해를 했다.
황제 카를로스 5세는 1540년 1월1일에 파리를 방문했다. 파리 시정부는 생탕투안 수도원까지 나가 맞았다. 황제가 일주일 머무는 동안, 파리 시정부는 은으로 제작한 2미터짜리 헤르쿨레스 상을 선사했다. 이듬해 두 군주가 다시 전쟁을 할 때, 파리 시정부는 프랑수아 1세에게 20만 에퀴(금 736㎏)를 지원했다. 군주들의 야망을 채우는 전쟁에서 부르주아 계층과 농민들이 항상 고통을 받고 돈을 지원했다.
파리에 있는 보주 광장의 서쪽 모습. 위키피디아
19살 근위대장의 비극
프랑수아 1세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본명은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가져올 막대한 지참금을 기대하고, 둘째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앙리의 배우자로 결정했다. 카트린은 15세기 후반에 피렌체를 강력하게 통치한 대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의 증손녀였다. 그는 1519년에 태어난 해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인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보살핌을 받았다. 1533년 9월 그는 교황이 마련해준 배를 타고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로 향했다. 그는 그해 10월에 돈과 패물을 합쳐 12만8천 에퀴(금 471㎏)를 가지고 동갑내기 앙리와 결혼했다. 1536년에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3세이며 왕세자인 프랑수아 드 프랑스가 죽고, 오를레앙 공작 앙리는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카트린은 이른바 재색을 겸비한 사람이었는데 시아버지 프랑수아의 연인 에탕프 공작부인과 남편 앙리의 연인 디안 드 푸아티에 사이에서 고통을 받았다. 특히 앙리보다 스무살 연상이며 서른둘에 과부가 된 디안은 프랑수아 1세의 연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디안은 앙리가 어렸을 때 형과 함께 마드리드에 인질로 잡혔던 상처를 잘 보살펴주었고, 앙리의 연인이 되었다. 앙리는 1547년에 앙리 2세로 등극한 뒤에도 디안을 사랑했고, 나중에 셰르 강변의 슈농소성을 선물했다.
1559년 4월 앙리 2세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프랑스 북쪽 벨기에 근처의 카토캉브레지에서 조약을 맺고, 반세기나 질질 끌던 이탈리아 전쟁을 끝냈다. 앙리 2세는 칼레를 되찾고, 3주교구(메스·툴·베르됭)를 차지했다. 그는 누이동생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를 5년 아래의 사부아 공작 에마뉘엘 필리베르와, 열네살짜리 맏딸 엘리자베트를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와 각각 결혼시켰다. 마흔살의 앙리는 열살 아래 매제와 여덟살 아래 사위를 맞은 기념으로 기사들이 무예를 다투는 잔치를 벌였다.
앙리 2세는 중세 기사들의 시합을 즐겼고 직접 참여했다. 기사들은 두 패로 나눠서 하는 무술시합인 ‘투르누아’(tournoi), 개인별 창술·검술시합인 ‘주트’(joute)를 했다. 전자는 말과 한몸이 된 기사들이 무기를 부딪치면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다. 뒤를 보여주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고, “민첩함의 전투”(combat d’adresse)라고 부르듯이 상대를 날쌔게 공격해야 이길 가능성이 높았다. 창·단검은 나무로 만들어 위험을 줄였다.
앙리 2세는 ‘미친 왕’ 샤를 6세 치세인 1388년에 지은 ‘투르넬 저택’ 근처에서 시합을 벌였다. 저택 이름은 앞마당과 주변에 담을 치고 세운 수많은 탑을 뜻한다. 1559년 6월28일부터 사흘 동안 투르넬 저택의 남쪽, 오늘날 생폴 교회 근처인 생탕투안 길은 무더위와 기사들의 시합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종교와 미신을 구분하지 않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왕에게 시합을 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왕은 중세 기사도가 거친 남성성을 강조하면서 여성들의 환심을 살 만큼 고분고분한 태도(galanterie)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디안 드 푸아티에 가문의 색깔을 사용한 흑백기를 들고 시합에 참여했다. 왕비의 예감 때문에 왕이 의지를 꺾을 이유는 없었다. 이럴 때 우리는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하는 것인가.
6월30일, 기사들이 겨룬 뒤 마침내 앙리 2세의 차례가 왔다. 용맹함과 민첩함을 자부하는 왕은 자신의 근위대장 몽고메리 백작을 시합 상대로 지목했다.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불려나온 열아홉살 장수의 창이 왕의 창과 부딪쳐 부러졌다. 그럼에도 양쪽은 돌진했고, 왕의 면갑(얼굴 보호 장비) 사이로 창 토막이 들어가 왼쪽 눈에 박혔다. 당대의 명의 파레와 베살리우스도 적절히 손을 쓰지 못했다. 왕은 열흘 동안 고통스럽게 앓다가 상대를 용서하고 7월10일에 죽었다. 몽고메리는 영국으로 가서 개신교도가 된 뒤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에 참가했다. 그는 1574년에 붙잡혀 파리시청 앞 그레브 광장에서 처형당했다.
보주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아케이드 모습. 위키미디어
위고 “몽고메리 창끝에서 광장 탄생”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남편이 고통스럽게 죽은 투르넬 저택을 팔고 아들들과 함께 루브르궁으로 갔다. 1556년에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대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세 아들이 차례로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가 되어 발루아 가문의 명맥을 겨우 유지했다. 1589년에 부르봉 가문의 앙리 4세가 등극했지만,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파리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는 1593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나서 이듬해 3월에야 파리에 입성했다.
투르넬 저택은 거의 폐허 상태였고, 3만8000㎡의 마당은 마시장(馬市長)이 되어 있었는데, 앙리 4세는 거기에 금은실로 수놓은 ‘밀라노 양식의’ 비단공장을 세우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1604년에 그는 왕립 광장을 뜻하는 ‘플라스 루아얄’(Place Royale)을 조성하고, 사방을 주택들로 둘러싸게 했다. 광장 이름은 1792년에는 연맹군을 뜻하는 ‘페데레’(Fédérés), 1793년엔 ‘나눌 수 없는 공화국’을 뜻하는 ‘앵디비지빌리테’(Indivisibilité), 1800년에 ‘보주’(Place des Vosges)로 바뀌었다. 나폴레옹 치세에 보주 도(département des Vosges)가 전국 처음으로 납세의무를 이행했기 때문이다.
보주 광장을 둘러싼 집(6번지)에서 살았던 빅토르 위고는 “몽고메리의 창 공격에서 보주 광장이 탄생했다”(Le coup de lance de Montgomery a créé la place des Vosges)라고 말했다. 그러나 광장을 조성하고 이름을 붙이는 과정은 단 한 장의 스냅사진으로 제시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