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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에드윈 캐머런, 남아공의 차별금지 헌법 만든 동성애 판사

등록 2020-08-01 09:31수정 2020-08-01 16:42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24) 에드윈 캐머런

동성애·HIV 감염인 커밍아웃 뒤
남아공 고법·헌재 판사 임명돼
차별금지 담은 헌법 제정 기여
에드윈 캐머런. 위키피디아
에드윈 캐머런. 위키피디아

최근 우리에게 다큐와 드라마 등으로 널리 알려진 루스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몇 년 전에 미국 헌법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이 더 훌륭하다고 하며,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나라에서는 미국 헌법을 보지 말고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을 보라고 해 눈길을 끌었었다. 미국 헌법도 참조해 만들었다는 한국의 현행 헌법이 9차 개정된 1987년보다 9년 뒤에 제정된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은 세계 최초로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을 금지했다. 그리고 2년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남성 간의 성관계를 처벌하는 형법 규정, 이어 2005년에는 동성혼을 부인하는 것이 모두 위헌이 되었다. 이를 보면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항상 의문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극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어떻게 그런 급격한 변화가 가능했는가? 그 지독한 아파르트헤이트가 어떻게, 적어도 법의 차원에서 그렇게 별안간 없어질 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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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 비범죄화 지지

2017년에 번역된 <헌법의 약속>은 동성애자이자 에이치아이브이(HIV·후천성면역결핍증) 감염인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재판소 판사였던 에드윈 캐머런이 현직에 있으면서 쓴 책이어서 더욱 충격을 준다. 그런 그를 최초로 판사에 임명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그를 “남아프리카의 새로운 영웅 중 한 사람”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판사가 되기 전에 소위 커밍아웃을 했다. 당시 그는 “상상 밖의 격려와 지지를 얻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넘치는 대중의 지지와 사랑으로 힘을 얻는다”(165쪽)고 썼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 대통령, 그런 판사, 그런 대중이 있을 수 있는가? 헌법재판소 판사가 아니라 어떤 공직에도 동성애자나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이 있을 수 있는가? 당장 편견에 의한 판결이나 행정이 우려된다고 나라 전체가 야단법석 아닐까? 그러나 캐머런 판사는 자신이 동성애자이자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이어서 인간을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양심적이고 유능한 판사가 될 수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12쪽) 우리나라 판사 중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말해도 판사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캐머런은 세계 어디든 5~10% 사람들이 동성애자이거나 기존의 성별 구분에서 벗어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한국의 판사 중에도 상당수의 동성애자가 있을 수 있다.

1953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으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자동차 절도죄로 수감 중이었고, 어머니는 그를 키울 수 없어 캐머런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고아원에서 보냈다. 그가 아홉 살 때 누나가 살해되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그는 백인이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에 유학할 수 있었다. 즉 아파르트헤이트의 덕을 본 셈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 뒤 남아공으로 돌아와 강의를 하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징이었던 대법원장을 비판하고,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고위직 판사 3명의 사임을 요구하는 글을 비롯하여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노동법과 고용법, 반역죄로 기소된 아프리카민족회의 전사들에 대한 방어, 양심적·종교적 거부, 토지점유와 강제퇴거 문제, 게이 및 레즈비언의 평등을 위해 싸웠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헌법 제정 시에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시키는 데 기여했다. 만델라 대통령에 의해 1994년에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된 그는 대법원 판사를 거쳐 2009년에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내고 2019년 8월에 퇴임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나는 동성애자이고 싶지 않았다. 낙인이 찍히고 고립되고 욕을 먹는, 성정체성이 다른 부끄러운 소수자, 그 행동이 너무 경멸스럽고 죄 많고 부도덕해서 범죄로 간주되었던 그런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맹세했다. 내가 정말 동성애자라면, 자살하리라. 이후 다행히도, 나는 신중하게 그 최종 결정을 미루곤 했다. … 이후 15년 동안, 거의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의지의 마지막 한 가닥까지 사용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이 자각과 싸우며 보냈다.”(269쪽) 그는 자신이 고위직에 있어서 높은 월급을 받았기에 제대로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음을 깨닫고는 에이즈 퇴치 운동가로 나서서 모든 에이즈 환자들을 치료해 줄 것을 촉구했다. 만델라를 이은 타보 음베키 대통령이 에이즈 치료약 사용을 막아 30만명 이상이 사망한 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에이즈에 관한 책을 썼다. 캐머런은 성노동의 완전한 비범죄화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성노동은 “가장 위험하고 경멸받는 직업 중 하나이지만 우리의 지지와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한 직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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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적 혐오표현 규제한 남아공 헌법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된 것도 법 탓이지만 아파르트헤이트를 중지시킨 것도 법이었다. 캐머런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은 다름을 존중하고 축하한다”(270쪽)고 말하며 헌법 전문을 소개한다. 우리 헌법과 달리 그 헌법은 “우리 남아프리카인은 과거의 불의를 인정하고”로 시작해 “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믿는다”고 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신념에서 평등권이 규정되는데, 그것을 규정한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 조항에는 성적 지향 차별금지의 채택 외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차별 금지 사유가 한국 헌법에서는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그치는 반면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에서는 성적 지향 외에도 ‘인종, 사회적 성(gender), 생물학적 성(sex), 임신, 혼인 여부, 인종적·사회적 출신, 피부색, 나이, 장애, 양심, 믿음, 문화, 언어, 태생’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 앞에 평등권을 포함한 인권의 주체가 국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 또한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가 인정된다는 점에서 더욱 큰 차이가 있다. 나아가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에서는 그러한 사유로 인한 직접적(형식적) 차별은 물론 간접적(실질적) 차별도 금지하고, 또한 사인 간의 효력도 인정해 노동을 비롯한 여러 경우의 차별이 법률에 의해 금지됨을 분명히 규정하는 점도 우리 헌법과 크게 다르다. 요컨대 한국 헌법은 그냥 종잇조각일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은 명실공히 나라를 움직이는 기본이다.

평등권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인권 조항에도 차이가 있다. 가령 신체의 자유도 공적인 원인은 물론 사적인 원인에 의한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인정하여 가정폭력 등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허용한다. 반면 표현의 자유는 전쟁 선동, 즉각적 폭력의 자극, 인종·성별·종교에 근거한 위해의 혐오와 같은 경우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주거, 의료, 식량, 사회보장의 권리는 한국 헌법에서 흔히 말하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반드시 입법조치를 해야 하는 구체적 권리로 규정된다. 나아가 인권이 침해당한 경우에 집단대표소송이나 민중소송까지도 폭넓게 인정한다. 과거에 수없이 되풀이된 내각제니 이원집정부제니 뭐니 하며 이기적인 집권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략적인 개헌 논의가 다시금 나오는 어지러운 시절이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개헌을 주장한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을 보라. 그것은 다양성을 인정하기에 헌법이다. 그리고 “다양성이란 ‘경청’에 대한 것이다. 헌법은 우리가 반드시 듣도록 만든다.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293쪽)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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