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1789년 7월14일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장면. 감옥 주둔군의 지휘관이었던 베르나르레네 드로네(가운데 팔을 잡힌 사람)가 체포돼 끌려나오고 있다. 화가 장 피에르 루이스 로랑 올의 그림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위키피디아
요새, 왕립 감옥, 철가면, 볼테르, 사드 후작, 금서, 프랑스 국경일, 삼색기, 오페라 등 바스티유의 연관 검색어는 많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는 뜻이다. 파리의 바스티유 요새는 중세 전성기의 인구 증가와 경기 변동의 맥락에서 영토와 왕위 계승권 문제로 일어난 백년전쟁(1337~1453)의 산물이다.
노르망디 공 기욤(윌리엄)이 1066년에 영국의 앵글로색슨 왕을 폐하고 윌리엄 1세가 된 이후 영국 왕은 노르망디에서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또 알리에노르 다키텐은 1152년에 보장시 공의회의 결정으로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정식 이혼한 뒤 막대한 영지를 가지고, 플랑타즈네 가문의 앙리와 결혼했다. 이 부부는 1154년에 영국의 헨리 2세와 왕비로 즉위했고, 프랑스의 거의 3분의 1만큼의 영지를 소유했다.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1214년에 부빈 전투에서 승리하고 영국 왕의 영토 중에서 보르도 지방만 남기고 다 빼앗았다.
발루아 가문의 첫 왕인 필리프 6세(1328~1350년 재위)는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 맹세를 하라고 강요했다. 영국 왕은 기옌과 가스코뉴의 영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필리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필리프는 영국 왕의 영지를 몰수했다. 에드워드는 1337년 10월7일에 선전포고장을 보내고 전쟁을 시작했으며 1340년에 스스로 프랑스 왕이라 했다.
철학책 390여종, 혁명 덕에 구출
누가 1세기나 전쟁을 할 줄 알았을까? 당시 인구를 비교하면 영국은 500만명, 프랑스는 1600만명이었다. 프랑스의 주력부대인 기사들보다 영국의 보병 궁수들이 훨씬 우수했기 때문에 필리프 6세는 전쟁 초기에 고전했다. 영국은 브르타뉴·부르고뉴·플랑드르·나바라의 도움을 받았고, 프랑스에는 기근·흑사병·반란이 겹쳤다. 13세기의 시인 뤼트뵈프의 시는 14세기에도 통했다. “불행은 홀로 올 줄 모른다.”(Le mal ne sait pas seul venir.) 모든 인구가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전투가 벌어지거나 병사들이 이동하는 곳의 민간인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독서를 즐기고 기사도를 알던 장 2세 르봉(1350~1364 재위) 왕은 1356년에 영국의 인질이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에 나라의 서쪽을 할양하고 몸값 400만에퀴(황금 1만6천t)를 내라고 다그쳤다. 왕세자 샤를은 신분회에 손을 벌렸다. 파리 신분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랑의 주교 로베르 르코크와 파리 시장 에티엔 마르셀은 장 2세의 사위이며, 나바라의 왕 샤를 2세의 지지자였다. 마르셀은 파리를 자치시로 만들고 징세권을 쥐려고 왕세자에게 맞섰다. 그는 1358년 2월22일에 시테 왕궁에 시위대 3천명을 끌고 들어가 왕세자가 보는 앞에서 측근 두명을 죽였다. 그들의 피가 왕세자의 옷을 적셨다.
왕세자 샤를은 마르셀에게 굴복한 뒤 간신히 파리 밖으로 도망쳐서 우아즈·마른·센의 물길을 통제했다. 마르셀 측은 왕세자가 모든 사람을 굶겨서 항복하게 하려고 생필품의 수송로를 막았다고 선전했다. 농민은 오랫동안 두 나라 병사들에게 약탈당하고,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줄었는데도, 전쟁에 패배한 영주들이 부역 의무와 세금을 과중하게 매기는 데 불만을 품던 차에 1358년 5월에 봉기했다. 마르셀은 나바라의 샤를 2세의 군대를 파리로 진입시켰다. 그들 중에는 영국 병사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마르셀에 대한 반감이 일었다. 마르셀은 7월31일에 생탕투안 문 근처에서 반대세력에게 살해당했다.
왕세자 샤를은 섭정이 된 뒤 마르셀 추종자들을 최소한도로 처형하면서 민심을 샀다. 그는 런던에 잡혀 있는 부왕을 구하려고 북부 신분회와 남부 신분회를 파리에 소집했다. 신분회 대표들은 영국의 요구가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1364년에 장 2세는 런던에서 죽었다. 프랑스 초상화의 효시라 할 그의 초상화를 루브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왕세자이자 섭정이었던 샤를은 샤를 5세(1364~1380 재위)가 되어 왕권을 강화하고 질서를 안정시켰고, 책과 예술을 사랑했기 때문에 ‘현인’(le Sag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부르주아 출신인 오브리오를 파리 장관에 임명하고 1367년에 파리의 요새화 작업을 명령했다. 파리 대학 교수 누아제는 <중세의 파리>(공저, 2018)에서 요새화 작업으로 파리가 얼마나 넓어졌는지 밝혔다. 로마제국 시대에 시테섬의 10여헥타르, 10세기에 시테섬과 우안에 40여헥타르,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치세에 우안 120여헥타르와 좌안 90헥타르, 샤를 5세 치세에 우안 315헥타르와 좌안 90헥타르였다. 존스가 <파리>(2004)에서 필리프 치세에 272헥타르와 샤를 치세에 439헥타르라고 제시했던 면적보다 조금 작다. 오늘날 파리의 면적은 1만540헥타르(105.40㎢)이다.
당시에는 모든 도성문을 ‘요새’를 뜻하는 ‘바스티드’나 ‘바스티유’라고 했다. ‘바스티드 뒤 탕플’이나 ‘바스티드 생드니’처럼 생탕투안 문도 ‘바스티드 생탕투안’이라 했다. 오브리오는 마르셀이 1356년부터 2년 동안 파리 동쪽의 방어를 위해 추진하던 요새화 작업을 이어받으면서 생탕투안 문(바스티드 생탕투안) 곁에 진정한 요새를 건설했다. 이것이 우리가 바스티유 감옥, 또는 바스티유 요새라고 하는 ‘바스티유 생탕투안’(Bastille Saint-Antoine)이다.
프랑스혁명으로 철거된 직후인 1790~91년에 그려진 바스티유 감옥의 동쪽 모습. 작가 미상. 위키피디아
18세기 초반의 파리시를 그린 튀르고 지도에 나타난 바스티유 감옥(왼쪽 동그라미)의 모습. 오른쪽으로 센강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100년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가 봉건왕국에서 근대국가 체제를 갖추면서 바스티유 요새는 앙리 4세(1589~1610 재위)의 금고 구실을 했다. 그래서 여덟 탑 가운데 재물을 뜻하는 ‘트레조르 탑’이 있다. 루이 13세 시대부터 1789년까지 바스티유 감옥에는 5300명 이상을 가두었다. 더욱이 금서를 뜻하는 ‘철학책’도 가두었다가 3년에 한번씩 파쇄해서 종이상자 제조업자에게 팔았다. 나는 마지막 파쇄 작업을 기다리다 1789년 7월14일에 구출된 금서가 390여종이었음을 밝혔다. 그것이 내 박사학위 논문의 자료였다.
바스티유에 갇혔던 ‘철가면’의 정체
17세기와 18세기의 접점에서 생긴 ‘철가면’ 이야기는 바스티유 감옥의 암울한 상징이었다. 22살의 볼테르는 섭정 오를레앙 공을 롯(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에 비유하고 근친상간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 그 때문에 이듬해에 바스티유에 갇혀 열한달을 보낸 적이 있다. 그가 루이 14세와 관련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알렉상드르 뒤마가 <철가면>으로 소개했다.
철가면을 나폴레옹의 비밀로 연결한 이야기도 있었다. 루이 14세의 사생아가 섬으로 유배당했을 때 아기를 얻었는데, 아기가 자라서 나폴레옹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보나파르트’는 가면을 썼던 아버지가 ‘품위 있는 사람’(bonne part, buona parte)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철가면’이 만토바 공국의 국무대신 마티올리임을 확인했다. 마티올리는 루이 14세의 돈을 두둑이 받고서도 배반했다. 루이는 1679년에 덫을 놓고 그를 잡아 생트 마르그리트 오노라 군도의 사령관에게 맡겼다. 사령관이 1698년에 파리에 부임할 때 그를 데려다 바스티유 감옥에 넣었다. 왕은 마티올리에게 벨벳 가면을 씌웠다. 그러나 세간에는 좀 더 무지막지한 철가면으로 와전되었다. 마티올리는 고급 식기에 밥을 먹고 정중한 대우를 받다가 1703년에 병사했고, 바스티유 요새 근처의 생폴 교회 묘지에 마르시올리라는 가명으로 묻혔다. 루이 14세는 그의 흔적을 완전히 감추려 했지만, 역사가들은 수수께끼를 풀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에 지은 국립 오페라 공연장 중 하나인 ‘오페라 바스티유’의 모습. ‘오페라 바스티유’는 프랑스혁명 200주년인 1989년 7월13일에 문을 열었다. 위키피디아
바스티유에서 특별대우를 받은 사례를 종종 찾을 수 있다. 한번 바스티유의 쓴맛을 보았던 작가 라 보멜은 다른 사람의 작품에 인신공격성 내용을 추가해서 발간했다. 1756년에 파리 치안총감 베리에가 직접 그를 심문했고, 그의 재치에 반했는지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제공해주었다. 그는 서가에 책 600권을 진열해놓고 마음대로 집필하고, 아무 때나 부모와 친구의 방문을 받고, 요새 안을 마음대로 산책하고, 예쁜 새를 기르고, 심지어 말동무를 들일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바스티유에 갇혔던 4천명 이상의 평민 수형자는 대부분 그런 대접을 꿈꿀 수 없었다. 영국에서는 인신보호율(1679년)을 제정했지만, 100년 뒤의 프랑스에서는 대개 밤에 데려다 구속하고 나서 구색을 갖추려고 봉인장(체포영장)을 발행했다.
그러나 자발적인 수용자도 있었다. 생탕투안 문밖의 벽지공장 사장인 레베용은 300명 이상 고용한 개혁적 성향의 경영인이었지만, 1789년 4월에 노동자 임금에 대해 불리하게 말했다. 화가 난 노동자들이 그의 집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은 그는 4월28일에 바스티유 감옥으로 피신했다가 당국이 시위대를 진압한 뒤에 나왔다.
사드 후작은 하인과 함께 여성을 납치해서 학대했고, 1777년에 뱅센 감옥에 갇혔다가 1784년에 바스티유로 이감되었다. 바스티유 요새 사령관 드로네는 1789년 7월1일에 그가 발작하자 즉시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감방을 치우던 사람은 사드가 돌 틈에 감춰둔 <소돔의 120일> 원고를 찾아냈다. 파리 시위대가 바스티유를 정복하고 드로네를 학살하기 열흘 전의 일이다.
오랜 귀족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주의를 확산시킨 1830년 7월혁명을 기리는 기념물인 ‘7월혁명 기념원주’.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바스티유 광장에 1840년에 세웠다. 위키피디아
바스티유 돌로 다리 건설
1789년 7월16일부터 팔루아가 바스티유 철거 사업을 맡았고, 철거한 돌에 바스티유의 모형을 새겨 전국에 팔았다. 파리 역사박물관인 카르나발레 박물관도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또 바스티유의 돌을 ‘루이 16세 다리’를 세우는 데 이용했다. 이 다리는 루이 15세 광장과 팔레 부르봉(하원)을 잇는 다리인데, 광장 이름이 바뀔 때 ‘혁명다리’에서 ‘콩코르드(화합) 다리’가 되었다.
1833년 7월28일에 바스티유 광장에 1830년의 혁명투사들을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1840년에 ‘7월혁명 기념원주’(colonne de Juillet)를 세웠다. 매년 7월13일 밤에는 사람들이 기념원주를 둘러싸고 춤춘다. 파리의 모든 기념건축물이 그렇겠으나, 그날만큼은 바스티유 광장의 기념원주가 마치 ‘바벨탑’처럼 세계 각국의 언어와 음악에 휩싸인다.
1989년 7월13일에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초대한 32개국 정상과 귀빈 2천명이 ‘오페라 바스티유’의 개관 기념 특별공연을 감상했다. 그것은 200년 전 파리의 다중이 구체제의 상징인 바스티유를 정복한 날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전야제였다.
바스티유 광장에서 앙리 4세 대로를 걸어 센강 쪽으로 다가가면 1925년에 언론인·정치가 갈리를 추모하려고 조성한 ‘스콰르 앙리 갈리’가 나온다. 1899년 지하철 공사 중 발굴한 ‘리베르테’(자유) 탑의 돌을 거기서 볼 수 있다. 감옥과 자유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그 탑의 수형자들이 요새 안을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러나 감옥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감옥 밖도 감옥일진대.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