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런스 베이커. 다큐멘터리 <로리 베이커: 상식을 넘어서> 화면 갈무리
건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절로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동한 것은 2017년 9월 건축영화제에서 <로리 베이커: 상식을 넘어서>를 우연히 보고서였다. 그러나 그 영화를 같이 본 사람이 몇명 되지 않았듯이 건축가들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에 대한 정보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그에 대한 한글 자료는 여전히 볼 수 없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오는 시절인데도 그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영국인인 그가 인도에서 활동한 탓일까? 집이 없거나 가난한 인도 사람들을 위한 싼 집만을 평생 지은 탓일까? 1만채 넘게 빈민들을 위한 집을 지으면서도 대부분 무료나 최소한의 실비만을 받은 탓일까? 이집트에서 흙벽돌 마을을 세운 하산 파트히가 이집트보다 서양에서 주로 활동해 1970년대부터 서양에서 널리 알려지고 그의 책이 2000년에 우리에게도 소개된 것과 달리, 서양인인 베이커는 서양이 아니라 인도에서 활동한 탓일까? 그러나 베이커는 파트히와 함께 생태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1970년대부터 널리 알려졌다.
인도 정착한 영국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베이커는 훌륭한 건축가이기 이전에 그 인격으로, 그 소박한 삶으로 나에게 감동을 준다. 1917년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난 그는 10대에 기성종교에 대한 회의에서 자발적으로 퀘이커교도가 되었고, 건축을 공부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집총을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앰뷸런스 부대에 근무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전선에서 민간인 사상자, 특히 한센병 환자를 치료했다. 환자 치료로 인해 건강이 나빠진 탓에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도 뭄바이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친구를 통해 간디를 만났다. 당시 간디는 영국은 인도에서 완전히 떠나라는 독립운동을 했지만, 인도의 독립에 찬성하는 서양인들을 배척하기는커녕 환영했다. 특히 한센병에 관심이 컸던 간디가 8킬로미터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재료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 베이커는 공감하고, 인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007년 90살로 죽을 때까지 64년간 인도의 시골에서 살았다.
1945년부터 베이커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선교 아슈람(인도의 전통적인 암자) 건설을 위해 일하면서 서양인들이 사는 과시적인 방갈로, 그들의 화려한 사교 모임과 수많은 인도인들을 하인으로 부리는 생활을 거부하고 인도인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센병 전문 의사와 결혼했다. 베이커 부부는 신혼여행차 우연히 들른 히말라야의 외딴 마을에서 그들을 찾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버스 종점에서 80킬로미터나 떨어진 산속 골짜기의 황무지 언덕 비탈에 집과 병원을 짓고 16년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석공과 목수들을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져온 전통 건축을 보면서 건축에 대해 다시 새롭게 배웠다. 그래서 서양식 건축, 특히 당시 범세계적이었던 모더니즘 건축운동이 인도에는 전혀 맞지 않고, 인도 토착의 건축만이 자신에게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겸허하게도 베이커는 그러한 앎, 발견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뿐이지 보편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지역의 장인정신, 전통 기법 및 재료를 채택했지만,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현대적인 디자인 원리와 기술을 결합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너지가 가장 많이 드는 건축 자재 중 하나인 시멘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철근 콘크리트의 사용은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이러한 현대 기술의 신중한 채택은 지역 건축이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가 강조한 지역 재료의 사용은 비용을 낮게 유지하게 했다. 또한 건축물의 건설과 벽돌 등 건축자재 제조에 모두 지역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지역경제를 되살렸다. 베이커는 언덕에 몇개의 학교와 예배당, 병원을 지었다. 저비용 건축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았다. 대부분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들이었다. 특히
주변 환경을 개선해 환자들을 편하게 하는 것이 치료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의료진이 그를 찾아왔다.
로런스 베이커가 티루바난타푸람에 지은 커피하우스. 위키피디아
그가 세운 건물들은 대부분 복잡한 빛과 그림자의 패턴을 만들면서 건물 내부를 냉각시키기 위해 자연의 공기 흐름을 유도하는 구멍 뚫린 벽돌 벽으로 되어 있다. 지붕 위의 불규칙하고 피라미드 같은 구조물의 한쪽이 열린 채 바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또 전통적인 인도의 경사진 지붕과 흙으로 구운 기와가 뜨거운 공기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하고, 곡선의 벽은 직선 벽보다 낮은 재료비로 더 많은 공간을 둘러싸게 한다. 벽돌의 맨표면을 좋아했고 석고나 다른 장식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 베이커는 적절한 건축 자재, 문, 창틀을 찾아 쓰레기 무더기를 뒤지기도 했다.
베이커는 즉흥적인 건축 과정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그의 건축이 무엇보다도 건축가, 고객 및 장인 간의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둔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연 조건이나 생활 조건에 따라 건축은 항상 변한다는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의 설계도면은 최종의 시공과 이상적인 연계만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세부 건축은 즉흥적으로 현장에서 힌트를 얻어 이루어졌다. 가령 건축 도중에 작은 창문이 부엌에서 아름다운 나무를 볼 수 있게 한다고 믿게 되면 바로 창문을 새로 내는 식이었다. 그러므로 사전에 그려진 디자인이나 사전에 계산된 견적을 엄격하게 준수하여 세부적인 도면 세트를 현장에서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기피했다.
원래 지형을 살리는 건축
내면의 신성을 중시하는 퀘이커교도로서 그는 자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원래의 지형을 손상하거나 나무를 뿌리째 뽑는 것은 자연보호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경비 절감이라는 점에서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부지를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낭비라고 주장하는 그는 대부분의 첨단기술도 거부하고 자연친화적인 기술을 추구했다. 가령 공기 압력 차이를 이용하여 건물을 통해 시원한 공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연못 근처에 높은 벽돌 벽을 배치해 냉각 시스템을 만들었다. 재활용 재료를 사용하고 디자인을 검소하게 만드는 그의 건축은 생태건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의 건축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소박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특히 다양한 패턴으로 구멍 뚫린 벽돌 벽은 레이스 문양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고,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경사진 내부구조는 신비롭고 기념비적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전통적인 인도의 망고 패턴에 매료되어 수많은 문양의 아름다운 디자인을 남겼다. 그의 건물은 코코넛이나 대나무로 항상 덮여 있다.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콘크리트는 물론 안도 다다오식 콘크리트 건물의 유행에 절망하는 나는 베이커가 지은 소박한 에콜로지 집들이 더욱 그립다.
1969년부터 인도 남쪽 끝, 사회주의가 강한 케랄라주의 주도인 트리반드룸(새로운 이름은 티루바난타푸람)에 정착한 그는 죽기 직전까지 그의 집 안팎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계속 일했다. 그가 평생 손댄 1만채가 넘는 건물은 대부분 공공기관의 요청에 의해 빈민용으로 지어졌고, 설계부터 시공까지 직접 일한 베이커는 대부분 무료로 일하거나 저렴한 수고료만 받았다. 화석연료를 과잉으로 사용하는 반생태의 현대 건축이 아닌 자연 속에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집들로 마을을 형성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은 그가 ‘건축의 간디’로 불린 것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명예이자 최대의 영예였다.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 ( 법학 ). 노동법 전공자지만 ,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 문학 ,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 민주주의 , 생태주의 ,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 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