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주명철의 역사산책
⑫ 루브르박물관
파리 성 방어 위한 요새로 건축
왕 금고이자 감옥으로도 사용
16세기 후반부터 왕이 거주
신구교 갈등 최고조 달했던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가톨릭교도가 루브르궁 습격해
파리서만 위그노 3천명 학살
⑫ 루브르박물관
파리 성 방어 위한 요새로 건축
왕 금고이자 감옥으로도 사용
16세기 후반부터 왕이 거주
신구교 갈등 최고조 달했던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가톨릭교도가 루브르궁 습격해
파리서만 위그노 3천명 학살
루브르궁은 프랑스혁명 직후인 1793년에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박물관 마당의 유리 피라미드는 프랑스혁명 200주년인 1989년에 완공됐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루브르궁은 12세기 말 파리를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다. 초기에는 보물을 보관하는 왕의 금고, 반대파를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진은 15세기 루브르궁의 모습을 담은 그림. 궁 앞에서 씨를 뿌리고 말로 밭을 고르는 농민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 그림은 1489년에 완성된 <베리 공작의 호화기도서>에 그려져 있는 삽화의 하나다. 위키피디아
<베리 공작의 호화기도서>에 그려진 성 12세기 말에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파리에 성벽을 두르면서 서쪽 바깥 기슭에 루브르 요새를 건설하고 그동안 탕플 수도원에 맡겼던 보물을 옮겼다. 루브르는 왕의 금고인 동시에 파리를 지키는 요새일 뿐 아니라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가두는 감옥 구실을 했다. 봉건시대의 왕은 최고 영주였으므로 다른 영주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가 영토를 통일하고 ‘홀로 다스리는 사람’(monarque)인 절대군주가 되려면 16세기를 거쳐 17세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1980년대 루브르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루브르 요새의 기초를 발굴했으며, 우리는 쉴리관의 지하에서 그 웅장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평행사변형의 루브르 요새를 거듭해서 증개축하면서 수많은 탑을 지었다. 역사가들은 특히 ‘새 탑’(tour neuve)을 루브르 요새(Forteresse du Louvre), 파리탑(tour de Paris), 페랑탑(tour Ferrand), 루브르 큰 탑(grosse tour du Louvre)이라 불렀다. 지름 약 16미터, 높이 약 32미터의 이 둥근 탑은 시테 왕궁(Palais de la Cité)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의 탑을 닮았다. 벽의 두께는 13피에(약 4미터)에서 위로 갈수록 12피에(약 3.7미터)로 좁아졌다. 1214년에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부빈(Bouvine) 전투에서 영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을 상대로 싸워 이기고 플랑드르 백작 페랑을 잡아다 ‘페랑탑’ 근처에 감옥으로 쓰던 작은 건물에 가뒀다. 페랑은 1226년에 루이 9세의 섭정인 블랑슈 드 카스티유에게 다시는 적을 돕지 않겠노라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중세에는 칼과 편자를 만드는 대장장이를 ‘페랑’이라 불렀으며, 군대의 원수(maréchal)라는 말도 대장장이(maréchal-ferrant)에서 나왔다. 플랑드르 백작 페랑이나 대장장이가 ‘새 탑’의 이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루이 11세(1461~1483 재위)가 1474년에 알랑송 공작(duc d'Alençon) 장 2세를 가둔 일이 루브르를 감옥으로 사용한 마지막 사례였다. 백년전쟁 전반기에 샤를 5세(1364~1380 재위)는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건설한 성벽보다 더 서쪽, 오늘날의 카루젤 광장(place du Carrousel)에 새로 성벽을 세웠다. 그의 동생인 베리 공작 장(Jean de Berry)의 주문을 받아 랭부르 삼형제(frères de Limbourg)가 제작한 <베리 공작의 호화기도서>(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에서 15세기 초의 루브르 모습을 볼 수 있다. 콩데(Condé) 공의 샹티이성(Château de Chantilly, 파리 북쪽 50킬로미터)의 서재에는 이 수서본과 함께 진귀한 서적이 많다. 내가 설명을 잘못 들었는지 자신은 없으나, 1649년에 처형당한 영국 왕 찰스 1세(앙리 4세의 사위)의 머리가죽 일부를 표지에 붙였다는 작은 책에서 노란 머리카락을 본 기억이 난다. 찰스 1세의 비는 1609년에 루브르궁에서 태어난 앙리에트 마리(Henriette Marie de France) 공주였다. 프랑수아 1세(1515~1547 재위)는 루브르의 아성(donjon)을 헐고 건축가 레스코(Pierre Lescot)와 조각가 구종(Jean Goujon)에게 이탈리아식 건물을 짓게 했다. 한편 프랑수아 1세는 ‘루아르 강변의 성들’(Châteaux de la Loire)의 일부를 증축하고, 가장 웅장한 샹보르(Chambord)성을 지었다. 프랑수아 1세의 상징인 불도마뱀(Salamandre)은 샹보르성 말고도 블루아성(Château royal de Blois)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블루아성에서 루이 12세(1498~1515 재위)의 고슴도치(porc-épic)와 그의 둘째 비 안 드 브르타뉴(Anne de Bretagne)의 흰 담비(hermine)도 볼 수 있다. 서화의 낙관처럼 궁성 건축에 소유자의 낙관을 찍은 셈이다.
18세기 초반의 파리시를 그린 튀르고 지도(1739년 완성)에 나타난 루브르궁(왼쪽 상단)의 모습. 위키피디아
루브르박물관이 포착된 2006년 항공사진. 위키미디어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치른 왕가 결혼 앙리 2세(1547~1559 재위)는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이탈리아식 건축물을 완성했다. 그는 르네상스·종교개혁의 시대에 살면서도 중세 기사도를 중시했다. 1559년 6월20일에 그는 공주와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의 결혼을 축하하는 창시합(tournoi)을 하다가 몽고메리(Gabriel de Montgomerry) 장군의 창에 눈을 찔려 7월 초에 사망했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는 남편이 고통스럽게 숨진 오텔 드 투르넬(hôtel des Tournelles)에서 루브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비는 루브르궁의 서쪽에 기와 가마가 있던 곳에 튀일리궁(Tuileries, 기와 가마를 뜻함)을 지었다. 칼뱅파 개신교도들인 위그노(huguenots) 때문에 한창 국론이 찢어지던 시기였다. 장 코뱅(Jean Cauvin)은 27살인 1536년에 요아네스 칼비누스(Ioannes Calvinus)로 라틴어 저술 <기독교 강요>를 발표했고, 1541년에 직접 프랑스어 번역본을 장 칼뱅(Jean Calvin)으로 출간한 뒤, 칼뱅이 되었다. 칼뱅은 폭력을 금지했지만, 위그노는 무기를 들고 가톨릭교도와 싸웠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1560년에 열살짜리 아들이 샤를 9세로 왕이 되었을 때 섭정 노릇을 했다. 그는 마르그리트(Marguerite de Valois) 공주의 짝을 부르봉 가문에서 구했다. 1572년 8월18일에 위그노인 나바라공국의 앙리 3세(Henri Ⅲ de Navarre)는 열아홉살 동갑내기 신부와 노트르담 대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식을 올렸다. 거물급 개신교도들이 축하객으로 파리에 모여들었고, 가톨릭교도들은 섭정과 왕에게 그들을 학살하자고 다그쳤다. 콜리니(Gaspard Ⅱ de Coligny) 제독은 1560년부터 개신교도로 개종한 뒤,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왕에게 에스파냐가 소유한 플랑드르 지방을 치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가톨릭 국가끼리 전쟁을 하는 것도 께름칙했고, 군사력이 막강한 나라에 이긴다는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거부했다. 앙리 드 기즈(Henri de Guise)는 틈만 나면 샤를 9세에게 위그노 지도자들을 처단하자고 간언했다. 그는 1563년에 위그노에게 살해된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에스파냐는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콜리니 제독이 군장관을 지낸 피카르디를 침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신구교도 지도자들은 모두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______________
앙리 4세의 개종과 종교의 자유 종교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사건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이 루브르궁 일대를 피로 물들였다. 1572년 8월24일 새벽 3시에 루브르궁 맞은편에 있는 생제르맹 로세루아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자, 기즈의 병력은 루브르궁과 성당 근처에서 개신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궁전 마당에 시체를 쌓아 놓았다. 더욱이 그들은 이틀 전에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은 콜리니를 창문 밖으로 던져서 죽였다. 일반 시민들도 거리로 나가 개신교도를 죽였다. 전국에 번진 학살사건으로 파리에서 3천명, 지방에서 1만명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앙리 3세(1574~1589 재위)는 루브르궁을 서쪽의 튀일리궁과 잇는 공사를 시작했다. 앙리 3세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나바라공국의 앙리 3세는 1589년에 앙리 4세로 등극하고 가톨릭교로 개종한 뒤 1598년에 낭트칙령으로 26년간의 종교전쟁을 끝냈다. 그는 앙리 3세의 과업을 물려받아 루브르궁을 서쪽으로 460미터나 확장하는 공사를 마쳤다.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맡은 앙리 4세는 백성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쯤 닭고기를 먹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1774년에 퐁뇌프 다리의 앙리 4세 기마상에는 아직도 닭을 삶는 중이라고 비꼬는 격문이 붙었다. 오늘날에도 종교가 학살의 명분이고, 피부색이 증오의 이유로 나타나는 현실을 보면 우울하다. 악은 인간 본성의 일부인가, 아니면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가? 18세기 계몽사상가 장자크 루소는 <에밀> 첫머리에서 악은 사회적 산물이라고 하면서,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눌수록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이기적 문화를 배격하고, 나눌수록 상생하는 문화를 가꿔야 한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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