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로 도망가려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탕플 탑에 갇혀 있는 루이 16세를 그린 그림. 프랑스 화가 장프랑수아 가르느레의 작품. 위키미디어
1793년 1월21일 새벽에 루이 카페(루이 16세)는 몸단장을 시작했다. 6시쯤 맨땅에 무릎을 꿇은 뒤 에지워스 신부를 통해 성체를 모시고 기도를 올렸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도 루이’라는 공식 칭호를 빼앗긴 뒤에도 여전히 독실했다. 어둑한 밖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자신을 호송할 국민방위군이 배치되었다고 신부에게 속삭였다. 그는 가족을 한 번 더 보고 떠나겠다는 간밤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파리 시장이 제공한 초록색 마차에 올랐다. 탕플 감옥을 나온 마차는 거의 두 시간 만에 혁명광장에 도착했다. 손을 뒤로 묶이고 단두대 앞에 선 그는 결백하게 죽는다고 호소했지만 명을 재촉하는 북소리에 묻혔다. 그의 머리가 떨어지고 피를 뿜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9개월 뒤, 여동생은 1년4개월 뒤, 왕정주의자들에게 루이 17세로 추대를 받은 아들은 2년4개월 뒤에 겨우 열 살의 생을 마감했다. 공주 마리테레즈만 살아남아 1795년 말에 오스트리아 측과 포로 교환 협상 끝에 풀려나, 숙부인 아르투아 백작(장차 샤를 10세)의 며느리가 되었다. 왕정주의자들은 루이 가족이 1792년 8월13일 밤부터 온갖 조롱과 위협을 받으면서 살았던 탕플 감옥에 자주 찾아갔다. 나폴레옹 황제는 1808년에 높이 50미터의 건물을 헐어 ‘기억의 장소’를 없앴다. 오늘날 파리 3구청사가 서 있는 곳이다.
루이 16세가 1793년 1월21일 파리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처형된 모습. 프랑스 화가인 이시도르 스타니슬라스 헬만이 그린 판화. 위키미디어
국제 은행 노릇 한 성전기사단
탕플 감옥의 역사는 1095년 11월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제창한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 목표였다. 7세기 후반 이슬람교도는 이곳을 차지하고 솔로몬 성전의 터에 알아크사 모스크를 지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2세(Baudouin II de Jérusalem, 1118~1131 재위)는 이슬람교도를 몰아내고 알아크사 모스크를 궁전으로 썼다. 그는 기사들에게 성지를 잘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샹파뉴 출신 기사 위그 드 팽(Hugues de Payns)이 1118년에 성전기사단(Ordre du Temple)을 결성했고 1120년 1월23일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공식 승인을 받았다. 성전기사단의 기사들(Templiers)은 수도사 신분의 기사들이었으며, 이들은 “성전의 기사들” 또는 “그리스도와 솔로몬 신전의 가난한 기사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가난한 기사들’은 십자군 원정 동안 수없이 공을 세운 덕에 돈과 땅을 기부받아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유럽 각지에 영지를 9천개나 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돈놀이도 했다. 루이 7세(1137~1180 재위) 시대에 성전기사단은 파리의 북쪽 경계부터 몽마르트르 언덕 사이의 숲과 늪지를 사서 탕플 수도원을 건설했다. 생트 오포르튄 교단이나 생마르탱 데샹 수도원처럼 탕플 수도원도 거의 쓸모없는 숲과 늪지(마레·marais)를 개간해서 재배지(쿠튀르)로 만들었다. ‘쿠튀르 뒤 탕플’(탕플의 재배지)도 그때 생겼다. 1147년에 그곳에서 소속 기사 130명이 회의를 했다. 그들은 “정결·순명·청빈”을 맹세하고 “끝을 생각하라”(Memento finis)라는 좌우명을 세웠다. 수도사로서 평생 살아가고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생을 마치라는 뜻이다.
1187년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 십자군이 이집트·시리아의 술탄 살라흐앗딘(살라딘)에게 패배하고 성지를 빼앗긴 뒤, 성전기사단은 파리의 탕플 수도원을 본부로 정했다. 필리프 2세 오귀스트(1180~1223 재위)는 루브르 요새, 뱅센 성, 생제르맹 데프레 수도원, 탕플 수도원에서 가끔씩 기거했으며, 십자군 원정을 떠날 때 탕플의 ‘세자르 탑’에 왕실 금고를 맡겼다. 그가 1191년부터 1212년까지 파리에 둘러친 성곽(강남 2.5킬로미터, 강북 2.6킬로미터) 밖에서 탕플은 높이 8미터의 담장을 갖춘 튼튼하고 안전한 요새였다. 성전기사단은 국제 은행 노릇을 하면서 재산을 불렸다. 가톨릭교회·귀족·민중은 부유하고 거만한 성전기사단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탕플 수도원의 건물 중 하나인 탕플 탑은 높이가 50미터나 됐다. 이곳은 프랑스혁명 때는 루이 16세 등을 가둔 감옥으로 쓰였는데, 1808년 나폴레옹 황제가 건물을 없애버렸다. 1795년경 한 무명화가가 그린 그림이다. 위키피디아
‘미남’ 필리프 4세(Philippe le Bel, 1285~1314 재위)는 영국과 전쟁을 하였고,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중재에 나서면서 왕권을 통제하려고 하자 반발했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운동을 주창했을 때와 달리 2세기 뒤에는 “영적인 검”(교황권)이 “세속의 검”(왕권)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필리프 4세는 교황의 의지에 맞서고 왕국의 교회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재정을 안정시키려고 1298년에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납세자는 세금의 탈을 쓴 수탈이라고 불평했다. 계속 돈이 필요한 그는 1302년에 신분회를 소집했고, 그의 귀족 신하들(barons)이 종교인과 부르주아 대표들을 압박해서 돈 문제를 해결했다.
필리프는 1303년에 루브르 요새에서 다시 신분회를 소집했다. 거기 모인 대표들은 교황의 죄상을 과감히 지적했다. 그를 파문했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1303년에 죽었다. 후임인 베네딕토 11세는 파문을 철회해주고 나서 1304년에 죽고, 1305년에 보르도의 주교가 리옹에서 교황 클레멘스 5세로 등극했다. 그는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에 머물면서 필리프에게 마구 휘둘리지 않는 한에서 교황의 역할을 했다. 왕과 교황은 성전기사단을 박해했다.
1240년대에 부르고뉴 지방 롱비(Longvic)의 영주 가문에서 태어난 자크 드 몰레는 스무 살 조금 지나 성전기사단에 들어갔다. 프랑스가 정치적으로 봉건왕국에 머물러 있을 때, 성전기사단은 귀족공화주의 체제의 조직을 갖추고 스스로 단장을 뽑았다. 몰레는 원정에 참여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냈고, 곧 기사단장으로 뽑혔다. 1299년에 그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하고 키프로스섬으로 밀려났다. 성지를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성전기사단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 1305년에 교황은 몰레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몰레는 기사 60명과 막대한 재물을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필리프 4세는 그를 환대하고 왕자의 대부(代父)로 선정했다. 왕은 성전기사단의 재물을 파리로 옮기도록 했다.
파리 상인대표(왕이 임명하는 시장)였던 튀르고는 1734년부터 1739년까지 예술가와 장인들을 동원해 정밀한 파리 지도를 만들었다. 지역을 20개로 나눠 따로따로 만든 지도에는 건물의 층수뿐 아니라 창문 수, 정원의 나무까지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약 400분의 1 축척인 이 지도는 동판에 판화 기법으로 제작됐으며, 모든 조각을 합하면 가로 3.2미터, 세로 2.5미터이다. 위 사진은 20개의 조각 지도를 붙여서 합성한 사진이다. 위키피디아
18세기 초반 탕플 수도원 주변의 모습. 파리 상인대표(왕이 임명하는 시장)였던 튀르고의 주도로 만들어진 파리 시와 주변 지도(튀르고 지도)의 일부. 위키피디아
“고문이 심문하고, 고통이 진술”
1306년에 화폐 가치를 루이 9세 시대로 되돌리는 정책 때문에 집세가 세 배나 올랐고, 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필리프는 황급히 성전기사단의 본부로 피신했고, 기사단의 권력과 재력이 국가에 버금갈 정도임을 확인했다. 14세기에 성전기사단의 수입은 5700만리브르였다. 1리브르의 가치를 13세기보다 절반 이하인 황금 4그램으로 평가해도 황금 22만8천톤이었다. 게다가 성전기사단은 오직 하느님만 섬긴다고 했으며 왕에게 세금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왕국 속의 왕국이었다. 필리프는 루이 9세가 제7차 십자군 원정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성전기사단이 몸값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필리프는 교황과 전쟁을 벌이면서 돈이 궁해진 나머지 성전기사단과 원호기사단(Hospitaliers)을 통합한다는 구실을 찾았다. 원호기사단은 11세기 초부터 활동하던 교단이었는데, 이탈리아 출신의 수사 제라르도가 예루살렘에 구호소를 설치하고 1113년에 교황 파스칼 2세의 승인을 받아 ‘생장 드 제루살렘 교단’(Ordre de Saint Jean de Jérusalem, 예루살렘의 세례자 요한 교단)이 되었다. 이 교단 소속 종교인들도 군사적인 임무를 함께 수행했다. 필리프는 교황과 함께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는 두 기사단을 통합해서 맏아들인 루이 드 나바르(장래의 루이 10세)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자크 드 몰레가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필리프는 성전기사단에게 도덕적 타락의 혐의를 씌워 1307년 10월13일에 그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그들을 체포해서 혐의를 추궁하라고 명령했다. 파리 남서부의 푸아티에에서 교황은 72명을 심문했다. 1308년 교황은 프라토 추기경과 상의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마인의 왕’)로 하인리히 7세를 임명하고 아비뇽에 교황청을 마련했다. 1310년 5월12일에 필리프는 신성모독죄·불경죄·동성애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기사단의 140명 가운데 54명을 파리 생탕투안 수도원 근처에서 산 채로 화형시켰다. 18세기 역사가·극작가인 레누아르(F. Raynouard)는 5막 연극 <신전기사단>(Les templiers, 1805)에서 “고문이 심문하고, 고통이 진술한다”고 정곡을 찔렀다.
필리프가 교황에게 요구한 대로, 1312년 비엔 공의회는 기사단의 해산을 결정하고 4월3일에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5월3일에 교황은 성전기사단의 재물을 원호기사단에 넘기라고 명령했다. 원호기사단은 재물을 받은 뒤 필리프에게 20만리브르를 주었지만, 훗날 아들 루이 10세는 부족하다고 주장해서 5만리브르를 더 받아냈다.
역사가들은 자크 드 몰레가 1314년 3월18일에 화형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페 왕조 시대에는 부활절을 새해 첫날로 정했다. 1314년의 첫날인 부활절은 4월7일이었다. 따라서 화형 날짜인 3월18일은 1313년에 해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날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세운 처형대에 몰레와 형제들을 끌어다 놓고, 교황과 필리프가 합의했던 대로 “이들을 종신형에 처한다”고 선언했다. 갑자기 몰레는 강요 때문에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고 대중에게 말했다.
필리프는 급히 회의를 열고 시테 왕궁 앞의 작은 섬(일오쥐·Ile-aux-juifs, ‘유대인들의 섬’)에서 몰레와 노르망디 기사단장 조프루아 드 샤르네를 산 채로 태워 죽였다. 17세기 초 퐁뇌프(Pont-Neuf) 다리를 건설할 때 그 섬과 시테섬 사이를 매립했기 때문에 화형장은 앙리 4세 기마상의 아래에 묻혔다. 몰레는 불에 타죽으면서 교황에게는 40일 이내, 왕에게는 1년 안에 하늘에서 보자고 말했다. 교황은 한 달 뒤인 1314년 4월20일에, 필리프 4세는 1314년 11월29일에 죽었다. 족집게 예언인가, 맞춤형 전설인가?
19세기 초의 탕플 대로. 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게르가 1838년쯤에 찍은 작품(‘탕플 대로의 광경’)으로, 당시 사진 촬영에는 오랜 노출이 필요해서 거리에는 구두를 닦는 사람만 찍혀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수도원 주위에도 부르(마을) 형성
중세에는 파리의 변두리에 있는 수도원 주위에 이른바 ‘부르’(bourg, 마을)가 형성되었다. 강남의 생제르맹 데프레 부르, 강북의 탕플 부르, 생트 오포르튄 부르, 생마르탱 데샹 부르가 각각 수도원의 통제를 받았다. 13세기에 가죽종이 제조업자들의 ‘파르슈미느리 길’이 있었다. 양피지·송아지피지는 수도원의 필사실에서 쓰던 물건이다. 그런데 1258년에 루이 9세가 흰옷의 탁발수도회인 ‘성모의 농노들’(Serfs de la Vierge Marie)에게 수도원을 세워준 뒤 그 길은 ‘블랑 망토 길’(흰 외투의 길)이 되었다. 이 길은 남북으로 난 탕플 길의 동쪽에서 시작한다.
블랑 망토 길에서 “울 아줌마”(Ma Tante)라는 별명의 ‘국립전당포’(Mont-de-Piété, 1777년 설립)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술꾼은 파경을 각오하면서 침대까지 맡겼다. 이자율은 1리브르에 2드니에(한 달 0.83퍼센트, 1년 10퍼센트)였다. 그곳에 ‘파리시립은행’(Crédit municipal de Paris)이 있다.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성벽의 북쪽 한계선이었던 이 근처에는 유서 깊은 건물이 즐비하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