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좋아하는 배우는 커크 더글러스여서 <스파르타쿠스>나 <불꽃의 사람 고흐>를 비롯하여 그가 출연한 영화 90여편을 대부분 보았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1962년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에 인천의 조그마한 예술극장에서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며칠만 상영되고 만 서부영화다. 커크 더글러스가 자신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했고, 작품에 대한 평가도 대단히 높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제대로 개봉되지 않았을까? 더글러스는 <오케이 목장의 결투> 등의 서부극으로 유명하지만, 서부극치고는 이상한 제목인 <고독>이 최고라니 역시 이상하다. 원제목인 ‘Lonely Are the Brave’를 <고독>이라고 줄인 것일까? 영화의 원작인 소설을 쓴 에드워드 애비가 절대 고독으로 유명한 사람이어서일까? 그 소설의 제목인 <용감한 카우보이>가 훨씬 알기 쉽고 소설이나 영화의 내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왜 그런 제목을 영화 제목으로 택했을까? 주인공의 용기는 서부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체제적인 것이어서 그렇게 붙인 것일까?
영화의 제목으로는 ‘마지막 카우보이’도 논의되었다. 현대 기술을 거부하고 운전면허증 등의 어떤 신분증을 갖지 않고 주거가 불명해 집주소를 댈 수도 없는 카우보이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영화는 광야를 막은 철조망을 뚫고 말을 달리는 카우보이가 고속도로를 무단횡단 하려다가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욕을 먹는 장면으로 시작해, 불법이민자를 돕다가 감옥에 갇힌 친구를 구하려고 일부러 감옥에 갇히지만 친구의 탈옥 거부로 혼자 탈옥한 뒤 경찰의 추격을 당하다 부상을 입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서 카우보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곳을 제한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적극적 아나키스트인 반면, 그 친구는 시민불복종으로 스스로 감옥에 갇힌 소극적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된 아나키스트의 측면이 약화되지만, 그 대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각본을 쓴, 매카시즘의 희생자 트럼보의 솜씨는 이미 <스파르타쿠스>나 <로마의 휴일>과 같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걸작들의 각본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국립공원 순찰원 때 ‘멍키렌치 갱’ 써
원작자 애비는 192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인디애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18살에 미국 남서부를 무전여행하면서 사막을 사랑하게 된 뒤 군대에서 상관에게 반항하여 두차례 강등되고 쫓겨나면서 제도와 규율에 대한 불신을 갖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이어 뉴멕시코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면서 학교 신문에 아나키즘 글을 썼다가 압수당하고 편집장 자리에서도 쫓겨났으나 아나키즘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스탠퍼드대학교의 연구원이 되었으나 대학이 지겨워 그만두고 국립공원의 순찰원으로 생활하면서 위에서 말한 소설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썼다. 그중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섯번째 소설인 <멍키렌치 갱>(1975)을 비롯한 그의 아나키즘 소설들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다. 2003년에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한 반문명주의자의 자연예찬>은 순찰원 경험에서 나온 논픽션으로, 원작의 제목은 1968년에 나온 <사막의 고독>이었다. 소로의 <월든>과도 비교되는 이 책에서 애비는 국립공원 개발과 산업관광 및 댐 건설을 비판했다. 애비가 1982년에 <사막의 고독>이 아닌 ‘강의 고독’을 묘사한 논픽션 <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는 2004년에 번역되었다. 이어 2006년에 제임스 카할란이 쓴 그의 평전이 <사막의 아나키스트―70~80년대 미국 환경운동의 새로운 전위 에드워드 애비의 일생>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저를 대폭 축약한 편역이고 다른 책의 제목을 표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히지 않아 문제가 있는 번역이다. 이러한 번역들을 보면 한국에서 애비는 2000년대 초에 반짝했다가 그 뒤로는 사라진 듯하다.
애비를 흔히 자연주의 또는 녹색환경주의 작가라고 하지만, 그가 다룬 자연은 녹색의 숲이나 초원이 아닌 적색의 협곡과 사막이었다. 유타주 국립공원 아치스의 경우는 그에게 “도로가 끝나는 그 너머에 있는 붉은 먼지와 땡볕에 그을린 절벽, 막힘없이 펼쳐진 하늘”이다. 그곳에는 녹색의 평화나 풍요나 조화가 아니라 적색의 충격과 압박과 공포가 지배한다. 흔히들 ‘큰바위 얼굴’ 등과 같이 자연을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것을 자연주의 문학이니 철학이니 하지만, 애비는 그것을 철저히 경계하며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라고 말한다. 자연은 인간이 부여하는 모든 의미를 초월해서 존재하기에 신성하다고 보는 애비는 적색 사막이 녹색 평원보다 훨씬 더 쉽게 훼손되고 파괴될 수 있으며, 특히 그곳에 사는 생물들이 쉽게 죽어간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그는 국립공원의 오지에 관광객을 들어오게 하여 사막의 생태를 파괴하는 도로 건설에 반대하고, 콜로라도강에 댐이 건설되면 범람과 수몰로 자연생태계가 파괴될 것을 우려해 댐 건설에 반대한다. 그러나 애비는 위 번역서의 부제처럼 ‘반문명주의자의 자연예찬’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의 위험성을 알고, 인디언이나 카우보이들의 삶이 변질되었다고 보는 그는 자연과 구별되는 자아를 찾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가 복지사로 일하면서 자연과 문명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기도 했다.
모순적 삶 반영한 묘비명
환경 파괴에 반대하여 테러를 범하는, 그의 소설 중 대표작인 <멍키렌치 갱>은 1979년에 출범한 ‘어스 퍼스트!’(earth first: 미국 남서부에서 창립된 급진적 환경보호단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지만, 그것도 ‘반문명주의자의 자연예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소설에는 댐을 폭파하려는 네명의 에코타지(ecotage: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가속화하는 시설물들을 상대로 벌이는 환경보호단체들의 파괴 행위)와, 그들의 반대편에서 개발논리와 산업주의를 맹신하는 러브 주교가 그들을 뒤쫓는 자로 등장한다. 네명의 에코타지는 자유 수호의 이념을 공유하지만 차이가 있다. 그중 대조를 이루는 두 사람은 25살 월남전 포로 출신으로 가장 급진적인 헤이듀크와 50살 외과의사로 헤이듀크의 급진성을 제어하는 사비스다. 헤이듀크가 불도저 파괴를 일삼고 인명 살상도 마다하지 않는 반산업주의자이자 인디언을 멸시하는 반면, 모두의 정신적 지주이자 재정적 지주인 사비스는 고속도로 주변의 광고판을 불태우는 것을 취미로 할 정도로 단순한 회의적 아나키스트다. 두 사람 외에도 스미스와 수잔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남녀관계는 물론 환경보호에 대한 묘사도 자가당착이거나 상호모순을 보이기 일쑤여서 이 소설은 다른 소설들과 함께 많은 비난을 받았다. 가령 주인공들이 맥주 캔을 고속도로에 버리면서 고속도로 건설 자체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합리화하는 것인데, 이는 애비 자신이 받은 비난이기도 했다.
1984년부터 애비는 애리조나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면서 이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여러 논쟁에 휩싸였다. 그중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은 사회생태주의자인 머리 북친이 그를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생태테러주의자, 원시회귀주의자 등으로 비난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애비는 이민자들이 자기 나라에서 저항하기를 희망했고 테러를 무조건 찬양한 것도 아니었다. 여하튼 사막과 협곡과 강을 애비만큼 좋아한 사람은 없다. 자신이 사랑한 자연만큼 문제가 많았던 그는 1989년에 애리조나 투손에 있는 집에서 62살의 나이로 죽었다. 나는 그곳 사막 한구석 선인장 옆의 무덤에서 ‘노코멘트’라는 묘비명을 보고 그냥 웃었다.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