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르도를 자주 찾는 이유는 포도주 때문이 아니다. 1990년대 초부터 몽테뉴의 성을 찾아, 몽테스키외의 생가와 그곳의 포도밭 들판을 여행했다. 그리고 고야가 망명하여 마지막 그림을 그린 집도 찾아갔다. 그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자크 엘륄이 근무한 보르도 대학교와 함께 그의 이름을 딴 중등학교도 찾아갔다. 그 학교 입구에서 만난 학생들이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라는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자크 엘륄이라는 것을 몰라서 놀란 적이 있다. 더구나 몽테뉴나 몽테스키외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 더욱 놀랐다.
내가 더 좋아하는 엘륄의 말은 “한쪽만 보지 말고 양쪽을 보고 전체까지 보라”는 말이다. 바로 변증법이다. 그래서 가령 모두가 오로지 ‘자유’를 주장할 때 그것과 ‘책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기술을 숭배할 때 기술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도 그에게는 변증법의 관계였다. 그 변증법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존재한다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저술의 주제는 자유를 위한 저항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기독교도, 마르크스주의도 자유를 위한 저항이었다.
철학, 신학, 법학, 사회학 등에 두루 통달한 20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인 그의 저서가 30권 이상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그에 대한 연구서도 많이 나왔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소수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뿐이고 철학이나 법학이나 사회학에서는 그를 철저히 무시해 유감이다. 한국의 왜곡된 전공주의가 낳은 폐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보다는 덜해도 그의 조국인 프랑스나 그의 책이 많이 번역되는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글이 기독교나 현대문명을 철저히 비판하는 저항적인 태도 탓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레지스탕스 이어 환경보호운동
1912년에 보르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994년에 보르도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엘륄은 거의 평생을 보르도에서 보냈고, 그 반 이상을 보르도 대학교에서 학생과 교수로 살았다. 한국 못지않게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에서 파리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특히 지식인에게 불리하지만, 그는 끝까지 지방을 버리지 않았다. 평생을 두고 세계적으로 생각하되 지역적으로 행동한다는 신념을 지킨 것이다. 제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반년간 보르도 부시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1944년부터 1980년 68살로 퇴직할 때까지 37년을 보르도 대학교 법학부에서 가르쳤다. 보르도 대학교에 오기 전에도 1937년부터 몇몇 지방대학에서 가르쳤다가 1940년에 학생들 앞에서 당시 나치의 괴뢰정권 수반이었던 페탱 원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해임되기도 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유대인의 도피에 필요한 가짜 신분증을 만들고 나치 감옥에서 탈출한 이들과 유대인을 안전지대로 이동시키는 등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전후에는 지역의 범죄 예방과 댐 건설 반대 등을 포함한 환경보호운동이나 농업보호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지역에서의 실천적 행동과 함께 그를 새로운 신학운동과 기술과 소외에 대한 선구적 사상가로 알린 60여권의 저서와 수백편의 논문을 저술했다.
그의 사상 형성에서 중요한 출발점은 18살에 개신교도로 회심(신앙에 눈을 뜸)하고, 19살에 마르크스 이론에 눈뜬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현실의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특히 기독교의 국교화(4세기)로 국가와 결탁한 결과 복음적인 메시지를 완전히 와해시켰다고 공격했다. 또, 마르크스 저서를 탐독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지만, 그는 그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주류와는 거리를 뒀다. 특히 소외와 같은 마르크스
의 핵심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자본가의 노동착취와 같은 주장은 배제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기술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면서 문제는 체제가 아니라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21살부터 그는 잡지 <에스프리>를 내어 미국식 대량생산 방식인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에 의해 초래된 심리적 장애와 그것을 낳은 미국 사회를 비판하면서 기술이 단순한 기계 사용을 넘어 인간의 의식에 통합되고 결국은 지배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생을 두고 기술이 인간의 욕망을 매개로 하여 무한으로 자체 증식하는 힘이 되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을 억압하는 자율적 현상으로 인간이 그것을 감지할 수 없게끔 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 의식을 넘어 기술 그 자체가 신성화되고 절대화되어 인간 역사의 모든 가치를 유용성이니 효율성이니 경제성장이니 하는 기술의 가치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기술사회가 인간의 의식에 대한 극도로 복잡한 조작 과정인 선전과 교육 등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 또는 심리적 부적응을 최대한 막는다고 주장했다. 또 인간을 완벽하게 기술사회에 통합시키며, 기술 자체의 운동 원리를 벗어나는 다른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 폭력성과 전체주의성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이 기술사회 속에서 절망하거나 외면할 것이 아니라 기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나아가 현실을 개혁할 것을 기대했다.
엘륄은 기술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신앙, 특히 기도라는 개인적 결단에서 찾았다. 성서를 인간에게 책임과 자유를 떠안기는 책, 그 내용 전개에 있어 권력을 비판하는 만큼이나 종교를 비판하고 인간과 신 사이에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 대화를 강조하는 책이라고 보았다. 반면 기독교가 지배하는 국가와 교회는 성서와 단절되었다고 하면서 “기독교가 성경대로 바르게 선포된다면 기독교는 많은 수를 얻지도 못하고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대가와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동의를 얻기 위해 그들의 기호를 맞추고 그들을 매료시켜야 한다니!”라고 탄식했다. 이러한 탄식은 마르크스 말대로 종교가 아편이 되어 세계 최대의 대형 교회를 만들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사회정의를 철저히 배신하며 오로지 돈과 권력의 주구가 되어 있는 경우에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의 저서 대부분이 외국, 특히 미국과 한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번역되고 있는 이유도 그런 점에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편애 등 흠도
프랑스에서 무명이었던 그는 20세기말 그의 사후에 미국에서 유명해진 뒤에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졌다. 프랑스의 문화집중 현상은 보르도라는 지방 출신인 그의 주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의 신학은
반교권주의가 강력한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에게 거부당했고, 마찬가지로 교회에 대한 그의 근본적이고 신랄한 비판은 그를 기독교인들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최악의 배반이다”라고 그가 주장하는 이유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 교회와 국가 사이에 맺어진 거래 이후 기독교가 권력과 돈과 기술에 추종해온 순응주의 때문이었다. 이와 반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아나키즘의 강한 유사성을 인정했다. 즉, 자유를 추구하고 국가제도 및 교회제도를 거부하거나 최소한 그 신성화를 거부하는 점에서 공통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내가 엘륄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에게는 가장 강하게 거부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엘륄에게는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갈등이 시작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는 점 외에도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등 문제점이 있지만, 이반 일리치나 닐 포스트먼을 비롯하여 많은 반산업주의적 기술문명 비판자들이나, 예수를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급진주의자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