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사라마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단이었다. 사라마구라는 성은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별명으로, 식량이 부족할 때 빈민이 대용식으로 먹던 야생무를 일컫는 포르투갈 말이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출생신고를 할 때 실수로 쓴 것이었다. 그것을 그대로 둔 부모나 관료, 게다가 평생 그것을 성으로 삼은 사라마구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도록 한 것은 국가가 개인의 신원 확인을 위해 강요한 것이라는 점에서 사라마구는 태어날 때부터 반국가적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농담일까? 아니면 서민적이라는 이유에서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 데 ‘당당한 겸손함’을 지녔다고 보아야 할까? ‘성을 갈다’는 말에서 보듯이 성이 인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나라에 사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노동자로 출발…평생 가난한 글쟁이
1998년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그는 16세기의 어느 시인이 자기 책의 출판을 위해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당당한 겸손함’을 잃지 않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 자신의 삶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겸손함’이었다. 그 연설에서 76살의 그는 아들의 출생신고도 제대로 못 하는 포르투갈 시골의 가난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 단기 직업학교를 졸업한 뒤 밑바닥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평생을 가난한 글쟁이로 살았다고 회고했다.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밤에 도서관에 앉아 혼자 독서를 통해 글을 쓰기 시작해 문학잡지와 일간신문의 평기자나 번역가로 일하다가 52살이 된 1974년에 터진 4월혁명으로 우익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공산당의 추천으로 소규모 일간신문사의 부주간으로 취임한 것이 그 생애 최초의 자리였다. 그러나 신문사 내부의 좌우익 갈등으로 해직된 뒤 생계를 위해 소설을 써야 했고, 60살이 된 1982년에 낸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비로소 소설가로 인정을 받기까지 무명으로 살았다.
게다가 1998년에 노벨상을 타면서 우리에게는 처음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요즘은 노벨상을 타도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20세기가 끝나기 전에는 노벨상 수상 뉴스가 포르투갈 같은 변방의 문학을 알게 되는 유일한 계기였다. 그때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그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 후속편으로 나온 <눈뜬 자들의 도시>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처럼 마치 ‘도시’ 시리즈의 처음인 듯 보이지만, ‘도시’는 한국어 번역판에 붙은 제목일 뿐이고 <눈먼 자들의 도시> 본래의 제목은 그냥 ‘맹목’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멀어지는 전염병이 휩쓸어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지를 비판한 그 소설에서 다행히도 한 여인만은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아 마지막 희망을 주지만, 소설은 너무나 어둡다. 삶이 비참해지면 인간은 이성을 잃게 되고, 권력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짓밟으며, 소수의 거짓말이 다수의 진실을 대신하고, 이웃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면 자신도 존경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20년 전에 읽고 받았던 감동은 2020년에는 더욱 심한 전율로 나에게 다가온다.
지금, 우리야말로 ‘눈먼 자들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볼 줄 모르는 사람들, 아니 보기를 거부하는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적 관계와 유대를 형성하는 공동체도 상실하고, 자신처럼 인간으로 인정하는 타인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인간성의 인식에서 비로소 가능한 사회의 형성에도 실패하고, 국가니 기업이니 교회니 언론이니 하는 제도가 만들어낸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도, 삶의 의미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쓰고 그 이후에 낸 <눈뜬 자들의 도시>에는 잔인한 권력이 전면에 대두하는 백색혁명을 묘사하는데 그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최근 어느 인터넷신문에서 조제 사라마구를 공산주의자라고 쓴 글을 보았다. 유럽인들이 스스로를 코뮤니스트라고 말할 때 그 말을 공산주의자라고 번역하면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 한국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어서, 언제나 그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소심한 나로서는 그런 단정에 몹시 신경이 쓰인다. 그가 47살의 나이에 포르투갈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산당은 가령 북한 공산당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는 그의 모든 작품을 어떤 의미에서도 그런 공산당의 선전물과 같은 것으로 읽어본 적이 없다.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우상의 권위에 대항하는 개인의 외로운 싸움,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자유를 추구하는 그의 모든 작품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극도의 권력주의이자 권위주의의 표상인 공산당을 그와 연관시키기 어렵다. 조지 오웰의 <1984>,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같은 반권력의 작품인 그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비롯한 모든 작품은 국가, 교회, 사유재산이 아니라 수평적 연대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 공동 소유와 생산 및 소비의 자주적 협의를 지지했다.
사라마구에 대한 또 하나의 한국식 편견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포르투갈이 유럽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대서양을 표류한다는 내용의 <돌뗏목>과 같은 초기 작품이 그의 조국을 배경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것은 애국심과 무관하다. 도리어 70살의 나이에 출판한 <예수복음>에서 예수와 신을 타락하고 잔인한 인간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가톨릭교회와 보수정권의 탄압을 받아 스페인령의 뜨거운 모래섬으로 망명을 해야 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수복음>은 신들과 축복받은 자들의 전설이 아니라, 치열하게 싸웠지만 이길 수 없는 절대 권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 했던 인간들의 이야기이기에 감동적이다.
“과거의 자기에 침뱉는 자들”을 경멸
그 6년 뒤인 199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자 그의 조국은 그를 비로소 반갑게 맞았지만, 결국 그는 망명지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그의 “상상력, 연민, 그리고 아이러니로 뒷받침된 비유”와 공식적 진실에 대한 “현대적 회의론”을 찬양하면서 스웨덴 아카데미가 사라마구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자 바티칸 당국은 <예수복음>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사라마구는 “그들은 기도에 집중하고 사람들을 평화롭게 해야 한다. 나는 신자들을 존중하지만 그 기관을 존중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사라마구는 2006년에 <업저버>와의 인터뷰에서 “예술가는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시민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시민으로서 우리 모두는 개입하고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물을 바꾸는 것은 시민이다. 나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 참여 외에는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유럽연합 및 국제통화기금과 같은 기관들도 비판한 사라마구는 2002년에 80살의 나이로 팔레스타인의 라말라를 방문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일상적 범죄가 되었음에도 이스라엘 국민과 그 군대는 죄의식이 마비되었다고 비판했다.
죽기 직전까지 현실 참여를 멈추지 않은 그는 맹목의 세상에서 진보주의자연하며 살았던 젊었을 때와 달리 늙어서는 자기중심의 보수주의자가 되어 돈과 권력만을 밝히고 양심이 마비되어 사는 인간들을 경멸하면서 말했다. “예의를 조금 걷어내고 말하자면, 이런 자들은 자신의 삶이라는 거울 앞에서 매일 현재의 자기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에 침을 뱉고 있다.” 88살로 죽기 직전까지 눈을 뜨고 살았던 사라마구야말로 눈먼 사람들의 시대를 투시한 우리 시대의 이단인 자유인이었다.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