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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하워드 진, 몸으로 쓴 ‘주관적인’ 피플의 역사

등록 2020-02-08 13:51수정 2020-02-08 13:53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⑬ 하워드 진 (1922~2010)

<미국민중사> 쓴 비주류 역사학자
민중 시각으로 엘리트 지배 비판
흑인 민권운동·반전운동에 앞장
평생 피플의 삶을 산 대학교수
하워드 진. &lt;한겨레&gt; 자료사진
하워드 진. <한겨레> 자료사진

정치인들은 항상 자기들만이 ‘국민’의 편이고 반대자는 ‘국민’의 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정도로 파렴치하게 거짓말을 일삼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신이야말로 객관적이라거나 중립적인 반면 남들은 주관적이라거나 편향적이라고 비난하기 일쑤다. 특히 학자들이나 언론인들이 그렇다. 통계나 숫자, 또는 역사나 현실을 들먹이며 그렇게 강변한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사실은 철저히 주관적이고 편향적이다. 역사나 뉴스라고 하는 것도 수많은 사실 중에서 취사선택된 것일 뿐이다.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진영적’이다. 더 쉽게 말하면 ‘당파적’이고 ‘이기적’이고 ‘적대적’이다. 통계나 숫자도, 역사나 현실도 그렇게 악용할 뿐이다. 그러니 대부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

“가르치는 자로서, 그리고 글 쓰는 자로서 나는 단 한 번도 ‘객관성’에 집착한 적이 없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정직하게 말한 사람은 하워드 진이다. 그는 피플이라는 명확한 관점과 신념을 밝히면서 말을 하고 책을 쓴다. 피플을 국민이나 민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하워드 진에게는 엘리트 지배층이 아닌 비엘리트 피지배층이나 하층계급, 특히 노동자계급이다. 그는 미국을 피플의 나라가 아니라 엘리트의 나라라고 비판한다. 피플에 의한 나라도, 피플을 위한 나라도 아니고 오로지 엘리트에 의한, 엘리트를 위한 나라라고 한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말하는 미국은 물론이고, 그 미국을 닮고자 하는 한국이 더욱 그렇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이야말로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에 의한, 엘리트의 나라라고 보기 때문이다.

노동하면서 대학생활

하워드 진은 1922년 가난한 피플로 태어나 평생 피플로 살다가 2010년 88살의 피플로 죽었다. 한국에서는 교수가 엘리트라지만 하워드 진은 평생 피플로 산 교수다. 부모는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 노동자였고, 진도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면서 찰스 디킨스 등의 소설을 읽고서 자본주의와 사법이 항상 피플을 억압함을 알았다. 17살 때 공원에서 열린 평화집회에 갔다가 경찰의 곤봉 세례를 받은 뒤 진보적 자유주의자에서 급진주의자로 바뀌었다. 이듬해 수업료가 무료인 뉴욕시립대학에 들어갔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조선소에서 3년간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이어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좋은 전쟁’에 대한 회의로 평생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제대 후에도 3년간 노동을 한 뒤 뉴욕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밤에는 노동을 해야 했다. 1951년 대학 졸업 후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광산 파업에 대한 석사 논문을 쓴 뒤,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1956년부터 애틀랜타의 흑인 여자 대학인 스펠만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당시의 흑인 차별의 중심지였던 애틀랜타에서 차별에 반대하는 내용의 수업을 하고,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면서 흑인 민권운동의 중심에 선 진은 결국 1963년에 해직당했다.

이어 1963년부터 1988년까지 26년간 보스턴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이론서보다도 문학작품을 많이 읽게 하고 즉흥적으로 강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뛰어들어 관련 글을 많이 썼고, 1968년에는 베트남을 방문하는 등의 경험을 통해 최초로 피플의 입장에서 미국의 역사를 본 <미국민중사>를 1980년에 냈다. 미국에서 해마다 10만 부씩이나 팔린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였던 그 책은 1986년 우리나라에서 <미국민중저항사>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콜럼버스를 잔인한 침략 정복자이자 학살자로 비판한 첫 부분부터 기존의 생각을 뒤바꾼 그 책은 그 뒤 내가 미국을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자주 참조한 책이다. 소위 통사적인 교과서가 아니기에 유명한 사건이나 인물은 대폭 생략하거나 비판하는 반면, 기존의 주류 역사에서 무시된 사건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여 철저히 주관적인 책임을 과시한다. 그러니 주류 학계나 언론에서는 그 책을 빨갱이 책이라고까지 극언하며 매도하기 일쑤인, 비주류 이단의 역사서다.

하워드 진. &lt;한겨레&gt; 자료사진
하워드 진. <한겨레> 자료사진

진은 노예제도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미국처럼 인종차별이 오랫동안 문제된 나라는 없었다고 하면서 그 점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미국보다 한반도에서 그런 문제는 더욱 심각했지만 우리 역사책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진에 의하면 신대륙에는 언제나 노동력이 부족했는데 인디언이나 백인은 노동력으로 부리기 쉽지 않아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즉 미국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꿈의 땅이 아니라 처음부터 영국의 계급제도를 고스란히 이식했고 열악한 조건으로 인해 계급 질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인디언과 노예는 물론이고 가난한 백인까지 저항하자 지주들은 그들을 의도적으로 분리시켰다. 즉 백인 빈민에게는 약간의 권리를 주되 빈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 그들보다 더 비참한 흑인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흑인 노예를 감시하게 했다.

특히 미국 독립이란 지주들이 하층민을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즉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기득권층 중심의 공화제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노예나 여성은 물론 재산이 없는 빈민도 제외되었다. 독립 이후 미국은 인디언에 대한 속임수, 약속 파기, 학살, 세균전 등 다양한 술수로 서부를 개척했다. 남북전쟁도 노예해방과는 무관하게 시작되었다. 북부는 남부의 시장과 자원을 얻으려고 싸웠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남부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회복했고, 토지 소유나 임대차를 금지당한 흑인은 다시 노예로 돌아갔다. 남북전쟁은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토대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남북전쟁이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듯이 양차 대전도 평화나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제국들의 전쟁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제국들의 전쟁은 냉전으로, 그리고 1990년대부터는 이라크 침공 등 다시 열전으로 이어졌다.

“미 양당제는 적대적 문화의 공유자”

평생 전쟁에 반대한 진은 2003년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도 반대하면서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폭력배들에게 둘러싸인 대통령의 손아귀에 있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1998년 인터뷰에서 “거대 기업이 경제를 지배하지 않는 세상, 기업이 일하는 사람들의 통제를 받고 노동자와 소비자 대표가 의사결정 기구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세상”을 꿈꾼다고 말하면서 그런 세상에서 4년 만의 선거가 아닌, 1871년 파리코뮌에 존재한 것과 같은 풀뿌리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등을 돌려주고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으며 진료비 부담이나 복잡한 행정절차 없이 의료 혜택을 받고 국경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그런 상상이 없다면 오늘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가 승리하자 그가 패권주의적 외교정책을 바꾼다면 위대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진이 말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는 물론 죽고 나서도 그런 변화는 없었다. 미국의 양당은 자본주의와 군사력 유지라는 ‘영원한 적대적 문화’의 공유자로 피플을 적대한다는 진의 비판은 지금도, 그리고 미국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여전히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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