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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로마 시대의 가도, 마담 뒤바리가 왕의 침실로 가던 길이 되다

등록 2020-02-08 10:49수정 2020-02-08 11:11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③ 생드니 길

시테 왕궁-생드니 대성전 잇는
파리의 가장 오래된 생드니 길
왕 행차 때 우유·포도주 제공

상류층 자주 다녀 성매매도 성행
18세기 구르당 부인이 대표적
타락한 루이 15세의 침실에
귀족 부인 변신한 마담 뒤바리 보내

혁명 초기 생선장수 여성들이
루이 16세 부부의 파리 이송 앞장
파리에서 생드니 무덤과 퐁투아즈를 거쳐 루앙으로 가는 큰길인 생드니 길은 로마 시대부터 발달했다. 17세기 루이 14세가 파리의 옛 성벽을 무너뜨리고 생드니 길 끝에 세운 생드니 문. 높이와 바닥 길이가 각각 약 25미터다. 게티이미지뱅크
파리에서 생드니 무덤과 퐁투아즈를 거쳐 루앙으로 가는 큰길인 생드니 길은 로마 시대부터 발달했다. 17세기 루이 14세가 파리의 옛 성벽을 무너뜨리고 생드니 길 끝에 세운 생드니 문. 높이와 바닥 길이가 각각 약 25미터다. 게티이미지뱅크

로마 시대에는 파리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생드니 무덤과 퐁투아즈를 거쳐 루앙으로 가는 큰길이 발달했다. 파리 시내에 남아 있는 길이 바로 생드니 길(rue Saint-Denis)이다. 17세기에 루이 14세는 파리의 옛 성벽을 무너뜨리고 생드니 길 끝에 기념건축물인 생드니 문(porte Saint-Denis)을 세웠다. 당시에 남긴 생드니 문의 그림에서 “루도비코 대왕”(LUDOVICO MAGNO)이라는 명문(銘文)을 읽을 수 있다. 1세기 뒤 혁명기에 제1공화국을 수립하고 나서 왕정과 신분제 사회의 구체제 유물을 없앨 때 그 명문을 지웠다.

높이와 너비가 각각 25미터 정도이며, 문안에서 문밖(Faubourg-Saint-Denis)으로 가려면 아치 밑으로 5미터를 걸어야 한다. 생드니 문의 동쪽에 생마르탱 문이 있으니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생마르탱 길에서 문밖으로 나가는 길은 파리 북쪽 55㎞에 있는 상리스(Senlis)로 가는 길이다. 로마 시대에는 파리보다 리옹이나 상리스가 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길의 오늘

8세기부터 문밖에도 사람이 살면서 생드니 길은 더욱 중요해졌다. 더욱이 10세기 후반(961년)에 파리의 중심부인 시테섬 북쪽에 그랑퐁(Grand-Pont)을 건설하면서 중요한 축이 되었다. ‘큰 다리’를 뜻하는 그랑퐁은 상대적 개념이다. 시테섬 남쪽에서 생테티엔 성당(나중에 그 자리에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었다)으로 갈 때 건너던 프티퐁에 비해 큰 다리라는 뜻이다. 그랑퐁은 12세기에 루이 7세의 명령으로 퐁토샹주(Pont au Change)가 되었다. 이 다리 위에 환전상과 금은세공인의 가게가 늘어섰기 때문이다. 왕궁과 귀족, 부유한 상인이 지나는 곳이었기 때문에 돈 냄새가 나는 다리가 되었다. 산업화 이전의 다리는 대개 주상복합형 도로였다. 그래서 화재에 취약했다.

오늘날에는 생드니 길의 동쪽에 나란히 뻗은 세바스토폴 대로(Boulevard de Sébastopol)가 교통을 원활하게 해주지만, 프랑스 왕국 시대에는 생드니 길과 생마르탱 길을 이용했다. 시테섬에서 퐁토샹주를 건너면 금세 샤틀레 광장과 극장을 만난다. 성악가 조수미나 재즈가수 나윤선이 공연한 극장이다. 19세기 초에 허물 때까지 샤틀레 재판소, 시체공시소가 있던 곳인데, 1789년 7월14일에는 그날 살해당한 귀족들의 목 잘린 주검을 늘어놓았다. 샤틀레는 12세기에 루이 7세가 그랑퐁을 보호하기 위해 생드니 길로 나가는 지점에 세운 요새로 정식 이름은 그랑 샤틀레였다. 프티퐁을 보호하려고 세운 프티 샤틀레도 있었다. 프티 샤틀레의 지하감옥 일부는 카보 데주블리에트(Caveau des Oubliettes)라는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민요를 들려주던 공연장이 재즈 공연장으로 거듭났다.

1980년대에 나는 호기심 때문에 민망한 일을 각오하고 대낮에 생드니 길을 걸었다. 공권력(이라 쓰고 박정희라 읽는다)이 남성의 머리가 길다고, 여성의 치마가 짧다고, 노래 가사가 우울하다고 판단할 때 강제로 ‘정상화’되는 시절을 겪은 젊은이가 그 길을 대낮에 걸었다. 북쪽 생드니 문 쪽으로 갈수록 집 앞마다 직업여성이 있었다. 성 구매자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다가가 잠시 대화한 뒤에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성인용품 가게도 간간이 지나쳤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 성매매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신기했다. 물론 파리에는 불로뉴 숲, 뱅센 숲과 함께 여러 나라 출신별로 특화된 성매매 구역이 있다. 박정희의 수족인 김현옥 서울시장이 종묘 근처에서 성매매 구역을 쫓아낸 것만은 인정해줄 만하다.

생드니 길 근처에서 25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을 잠시 짚어보자. 18세기에 성매매 사업에서 이름을 날리던 구르당 부인은 생탄(Sainte-Anne) 길에 셋집을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옛날 루이 14세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팔레 루아얄(왕궁)이 가까웠다. 그곳에 있던 오페라극장에 상류 인사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아가씨들이 손님을 유혹하기 쉬웠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그는 ‘위풍당당한 언덕’을 뜻하는 몽토르괴유(Montorgueil) 길로 옮겼다가 마지막에 뒤수브(Dussoubs) 길에 저택을 마련해서 거물급 손님들을 접대했다. 몽토르괴유는 중세 사람들이 당당하게 대소변을 보던 곳이다. 생드니 길의 왼쪽에서 나란히 뻗은 뒤수브 길은 13세기부터 악명 높은 골목길로서 가려움증을 일으키는 ‘로즈힙’(Gratte-Cul)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성병을 연상시킨다. 이 길은 1851년에 나폴레옹 3세의 독재에 맞서다 죽은 뒤수브를 기리는 이름으로 거듭났다.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펠릭스 브누아(Félix Benoist)가 1870~1880년경에 그린 파리 중앙시장 모습.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12세기 말 생드니 길 서쪽에 허용한 시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규모가 커졌다. 위키피디아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펠릭스 브누아(Félix Benoist)가 1870~1880년경에 그린 파리 중앙시장 모습.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12세기 말 생드니 길 서쪽에 허용한 시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규모가 커졌다. 위키피디아

“세상에서 걸음이 가장 빠른 사람은?”​

구르당 부인은 최신 유행의 옷가게에 들렀다가 잔 베퀴(Jeanne Bécu)를 보고 성매매 사업에 고용했다. 그는 잔을 자기 집에 살게 하면서 고위층 인사들에게 소개했고, 특히 어수룩한 사람에게는 ‘처녀’로 속여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어느 날 단골손님인 뒤무소가 거기 나타났다. 뒤무소는 잔의 고향에서 잔의 모녀를 보살펴주던 은인이었다. 잔과 뒤무소의 관계를 알 길이 없는 구르당 부인은 두 사람을 한방에 넣었다가 화를 불렀다. 뒤무소는 잔에게 어떻게 이런 집에 있느냐고 물었고, 잔은 당돌하게도 피차일반이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뒤무소는 구르당 부인을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성매매 업자가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었다. 그때 구르당 부인은 위기를 무사히 넘겼지만 거물급 손님을 잃었다.

구르당 부인의 단골손님 가운데 바람둥이 노름꾼 뒤바리 백작이 있었다. 이 악당이 잔 베퀴를 손아귀에 넣었고, 그 시대의 말로 “젖소 노릇”을 시켰다. 말년의 루이 15세는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세상을 뜬 뒤에 파르코세르(Parc aux Cerfs, 사슴공원)라는 집에 여성들을 데려다 놓고 쾌락에 빠졌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도 점점 싫증이 났다. 시종장 르벨(Dominique Lebel)은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루이 15세를 위해 수소문하다가 뒤바리 백작과 선이 닿았다. 당시 왕이라도 처녀를 침대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에 르벨은 잔 베퀴를 부랴부랴 유부녀로 만들어야 했다. 뒤바리 백작은 친형에게 술과 돈을 약속하고 잔 베퀴와 결혼시켰다. 그렇게 해서 법적으로 마담 뒤바리가 탄생했고 당당히 루이 15세의 침대로 들어갔다.

루이 15세는 황홀한 밤을 보낸 뒤에 르벨에게 만족감을 표현했다. 시종장은 전하께서 ‘그런 집’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특히 놀라운 기술을 맛보았을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그 후에 루이 15세는 마담 뒤바리를 공식 애첩으로 삼았다. 나중에 사교계에는 수수께끼가 생겼다. “세상에서 걸음이 가장 빠른 사람은?” “마담 뒤바리.” “왜?” “그는 튀일리 정원에서 트론까지 한걸음에 갔으니까.” 잔 베퀴 모녀가 성매매 상대를 찾으려 튀일리 정원을 거닐었다는 사실을 사교계 인사들은 모두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트론’은 오늘날 나시옹 광장인데, 실제로 튀일리 정원에서 한걸음에 가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트론’은 왕좌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으니, 수수께끼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1919년에 에른스트 루비치가 만든 영화 <뒤바리 부인>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19년에 에른스트 루비치가 만든 영화 <뒤바리 부인>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세자빈 시절,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을 “매춘부”라고 경멸했다. 쿠하르스키가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 &lt;한겨레&gt; 자료사진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세자빈 시절,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을 “매춘부”라고 경멸했다. 쿠하르스키가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 <한겨레> 자료사진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0년에 왕세자(훗날 루이 16세)빈이 되어서 베르사유궁에 들어갔을 때부터 마담 뒤바리를 깔보았다. 루이 15세는 세자빈이 한 번만이라도 마담 뒤바리에게 알은체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자빈은 어머니인 오스트리아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편지를 쓸 때 마담 뒤바리를 “매춘부”(la créature)라고 멸시했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베르사유 주재 대사 메르시 아르장토를 눈과 귀로 삼아 프랑스 소식을 들었다. 대사가 보낸 편지에서 루이 15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된 황제는 딸에게 한 번만이라도 마담 뒤바리를 인정해주라고 말했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한 지 1년 반이 지난 1772년 설날에 마담 뒤바리에게 “궁궐에 사람이 많군요”라고 인사말을 건넸고, 루이 15세는 몹시 기뻐했다. 열여섯 살짜리 오스트리아 대공녀가 거의 서른 살인 애첩보다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마담 뒤바리는 왕의 애첩이며 실세로서 법적 시동생인 뒤바리 백작이 나라살림을 축내는 데 한몫했다.

철거는 피했지만 골목길로 연명

마담 구르당, 마담 뒤바리, 난봉꾼들이 오갔을 생드니 길에서 나는 살 냄새에 대해 길게 얘기하면서 정작 그 길의 중요성을 잊을 뻔했다.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1186년에 도로를 포장하기로 결정했다. 로마인들이 깔았던 포석은 낡고 깨지고 흙 속에 파묻혔으며, 비라도 내리면 진흙이 행인의 발목까지 덮을 지경이었고 악취도 진동했기 때문이다. 12만명이 사는 대도시의 모든 길을 다 포장할 수 없었으므로, 성문이나 다리와 연결되는 주요 도로만 덮기로 했다. 생드니 길은 말끔히 포장되었고, 그 흔적은 오늘날 거의 80센티미터 깊이에 남았다.

생드니 길은 왕도(王道, voie royale)였다. 봉건왕국에서 통일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왕이 시테 왕궁에서 생드니 대성전으로 다녀올 때 사용하는 길이었다. 역사학자인 일레레(Jacques Hilairet)는 왕이 입성할 때 대대적인 잔치를 벌였다고 말한다. 파리의 거물급 상인들은 몇 주나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다. 호화로운 천을 깐 길을 따라서 개선문을 세우고, 포도주와 우유를 샘처럼 흘려서 모두에게 제공했으며, 네거리마다 신비극(神秘劇)·성사극(聖事劇)을 공연했다. 왕을 보려고 인근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왕을 본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라는 기억을 물심양면으로 각인시켜주는 행사였다.

중세에 파리와 주변에 길이 더 많아지면서 중요한 지점에 시장이 생겼다. 상인들은 왕과 수도원에 세금을 내면서 장사했다. 생드니 길의 시장과 생마르탱 길의 시장도 발달했고,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생드니 길 서쪽에 거의 100미터에 달하는 시장 건물(알, halle)을 짓게 했는데, 유럽의 주요 도시는 파리를 본받았다. 시장 건물은 계속 늘어나 중앙시장(레알, les halles)으로 발전했다. 건물 안에 점포를 가지지 못하는 소상인은 건물 사이에 노점을 차렸다.

생드니 길의 초입부 번화가에는 12세기부터 시장이 형성됐으며, 이후 건물이 늘어나 파리 중앙시장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현대식 복합쇼핑센터(웨스트필드포럼)로 변신했다. 웨스트필드포럼 누리집(westfieldforum.com)
생드니 길의 초입부 번화가에는 12세기부터 시장이 형성됐으며, 이후 건물이 늘어나 파리 중앙시장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현대식 복합쇼핑센터(웨스트필드포럼)로 변신했다. 웨스트필드포럼 누리집(westfieldforum.com)

가장 부유한 포목상들은 한가운데에 전용건물을 가졌고, 보베의 포목상들도 그 남쪽에 건물을 가졌다. 심지어 브뤼셀과 메헬렌 상인들도 물건을 가져왔다. 중앙시장에서 온갖 물건을 거래할 뿐 아니라 소문도 풍성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생선장수 아낙네의 활동은 눈부셨다. 1789년 10월6일 그들은 사방에서 모인 여성들과 함께 베르사유궁에서 왕 일가를 파리로 데려가면서 혁명을 다시 한 번 급진화시켰다.

혁명 전까지 샤틀레는 파리의 동서축과 남북축이 교차하는 중요지점이었는데, 나폴레옹 1세 시대에 허물었다. 통일왕국을 이루는 절대주의 시대부터 도시를 정비하고 직선도로를 만들던 계획을 진행했는데, 샤틀레가 파리의 팽창을 방해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조카(3세) 시대에도 대대적인 도시계획을 실시했다. 생드니 길과 생마르탱 길을 철거하는 대신 1858년 4월5일 두 길 사이에 세바스토폴 대로를 시원하게 뚫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생드니 길과 생마르탱 길은 골목길처럼 뒤로 밀려났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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