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에 만들어진 파리의 생드니 대성전은 프랑스가 낳은 고딕 건축양식의 기원이다. 생드니 대성전을 만든 쉬제는 더 많은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치를 더 뾰족하게 만들었으며, 벽을 지탱하기 위해 건물 바깥에 버팀도리를 보강했다. 게티이미지뱅크
250년께에 드니는 파리 첫 주교로 임명받았다. 300년 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던 갈리아 지방에서 파리는 리옹보다 오지였기 때문에 드니의 앞길은 어두웠다. 로마인들이 시테섬에 유피테르 신전, 파리 북쪽의 오른쪽 언덕(오늘날의 메닐몽탕)에 상업의 신인 메르쿠리우스 신전, 왼쪽에는 농업의 보호자이며 전쟁의 신인 마르스 신전을 세웠다고 역사가 부르농은 밝힌다.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라고 명령을 내린 데키우스 황제의 칙령이 250년에 나온 뒤 파리 주교 드니는 부제(副祭)인 뤼스티크, 엘뢰테르와 함께 왼쪽 언덕에서 처형되었다.
사람들은 그 언덕을 “순교자의 언덕” 즉, 몽마르트르라 불렀다. 후세에 드니 주교를 성인품에 올리고 생드니라 불렀다. 오늘날 정치 박해에 맞서 순교하겠다고 떠드는 목사가 있는데, 과연 누가 박해하는지, 또 얼마나 끔찍한 고문을 받아야 순교할 수 있는지 알고 하는 말인지 물어보고 싶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제국은 왜 기독교를 박해했을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도는 다신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더욱이 황제를 신격화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독교도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주라”고 하면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했다. 정치적 약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황제부터 속지의 총독까지 그들을 박해했다. 로마제국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원칙은 “신들의 평화”(pax deorum)였지만, 기독교도의 하느님은 거기 포함되지 않았다.
역대 왕들의 유해 안장
해발 130미터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머리가 잘린 드니 주교는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들고 북쪽을 향해 한참 걷다가 벌판에 쓰러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0킬로미터 지점에서 북쪽으로 9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신심 깊은 귀족 부인 카툴라가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고이 묻어주었다. <황금전기>(13세기에 만들어진 기독교 성인에 대한 책)에 나오는 얘기다. 이 이야기를 곧이들을 사람이 있을까? 카툴라가 드니와 부제들의 주검을 몽마르트르 언덕에 묻어주었다는 설, 또는 9킬로미터 북쪽으로 운구해서 카툴라가 소유한 경작지에 묻어주었다는 설이 차라리 더 믿음직하다. 몽마르트르에서 이장했건, 처음부터 그곳으로 모셔갔건, 드니 주교와 부제들을 최종적으로 묻은 곳이 성지가 되었다. 기독교도들은 거기서 종교의식을 몰래 거행했다.
생드니는 고대 로마의 박해로 몽마르트르에서 목이 잘려 숨졌다. 파리 노트르담 사원의 정면에 조각돼 있는 자신의 목을 들고 있는 생드니의 상. 게티이미지뱅크
451년에 귀족 출신의 신심 깊은 준비에브는 파리 시민들을 설득해서 생드니 무덤에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준비에브는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여성이다. 6세기에 수아송 수도원을 세운 메로빙 왕조의 클로테르 1세는 생드니 교회를 후원하고, 다고베르 1세는 625년에 생드니 수도원을 세워주었다. 754년에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꼬마’ 피핀(페핀)과 두 아들은 교황 스테파노(또는 에티엔) 2세의 집전으로 수도원 부속교회에서 축성식을 거행했다. 피핀이 768년에 생드니 수도원에서 죽고, 그의 아들 샤를(미래의 샤를마뉴)이 왕위를 계승했다. 수도원장은 부속교회를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 775년 2월24일에 샤를에게 봉헌했다.
생드니 수도원의 교회는 여느 교회처럼 ‘바실리카’로 불리었다. 바실리카는 다신교 시대 로마의 공회당을 뜻하다가 기독교도들이 기도하는 교회를 뜻하게 되었다. 또한 바실리카는 교황이 신앙·역사·예술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특전을 부여하는 대성전(大聖殿)을 뜻한다. 순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성모·성인과 관련한 보물에 참배하려고 대성전을 찾는다. 그럼에도 샤를마뉴 황제가 파리에서 엑스라샤펠(오늘날 아헨)로 수도를 옮긴 뒤에 프랑스는 제국의 변방이 되었고 생드니 수도원은 쇠락했다.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고 843년에 제국이 셋으로 쪼개진 뒤에 프랑스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의 후손들이 로베르 가문과 권력을 다투었다. 결국 987년에 카롤링거 가문의 마지막 왕인 루이 5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로베르 가문의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위그는 왕조를 만들려는 야망을 품었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그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선출직 왕이 세습직으로 전환됨으로써 카페 왕조가 메로빙·카롤링거 왕조의 뒤를 이어 제3왕조가 되었다. 파리가 왕국의 중심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생드니 대성전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더욱이 대성전은 프랑스 역대 왕들의 무덤이 되었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왕 46명, 왕비 32명, 왕자와 공주 63명, 대귀족 10명이 묻혔다.
생드니 대성전은 역대 프랑스 왕들의 유해를 안장하기도 했다. 지하 묘실의 모습. 위키피디아
프랑스 혁명 때 유물 약탈되기도
원래 생드니 수도원의 상징인 삼각기(三角旗)는 황금색 창끝에 매달면 불꽃처럼 펄럭였으며,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이었다. 1124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샹파뉴를 침공하고 파리를 위협할 때, 수도원장 쉬제(1081~1151)는 루이 6세에게 깃발을 들고 전장에 나가면 은총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해서 붉은색 국왕기(oriflamme)가 탄생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왕은 그곳으로 가서 조상들에게 가호를 빈 뒤에 국왕기를 꺼내들고 전장에 나갔다.
쉬제는 성모를 상징하는 푸른색을 카페 왕조의 색으로 천거했다. 또 왕의 백합꽃 문장(紋章)은 성모의 순결을 뜻한다. 그런데 14세기에 파리 상인 대표인 에티엔 마르셀은 반란을 일으키면서 푸른색과 붉은색의 깃발을 만들었다. 파리의 색에도 이처럼 종교적 연원이 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파리 시민들은 파리의 색 사이에 왕의 색을 넣어 삼색 표시를 만들었다. 바스티유를 정복한 지 3일 뒤인 7월17일에 루이 16세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파리의 초대 민선시장 바이는 왕의 모자에 삼색 표시를 달아주었다. 1794년에 국민공회는 5월20일(공화력 2년 프레리알 1일)부터 모든 함선에 삼색기를 달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국기가 정식으로 탄생한 날이다. 삼색과 자유·평등·우애를 연결하는 이도 있지만, 내겐 그 관계를 밝힐 근거가 없다.
공학자이자 역사가, 언론인인 라라네가 “생드니, 고딕 예술의 발상지”(herodote.net)에서 말했듯이 생드니 대성전은 고딕 양식의 기원이다. 라라네는 고딕 양식이 프랑스산이라고 자부한다. 고딕이라는 말은 고전고대의 문화를 부흥시킨 르네상스 시대에 야만인들의 문화를 얕보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고딕이 유럽에 유행한 고트족의 문화라는 보편성을 함축하는 말이긴 해도, 봉건왕국 프랑스가 정체성을 갖추어 나가던 시기에 탄생시킨 양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라라네의 말에 찬성할 수 있다.
농부 출신으로 1122년에 생드니 수도원장이 된 쉬제는 이전 4세기 동안 너무 피폐해진 수도원 부속 교회를 새로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생드니 대성전의 성직자석이 있는 내진(Choeur·성직자와 성가대 자리)을 1132년부터 고치기 시작해서 1144년 6월11일에 완공했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반영시켰다. 그는 하느님을 빛이라고 생각했고, 교회 안으로 빛을 더 많이 들이는 방법을 고안했다.
쉬제가 교회의 아치를 과감하게 변형시킨 이후 일드프랑스 지역에 새로운 양식의 대성당이 잇달아 들어섰다. 고딕 양식은 세가지 요소를 갖추었다. 첫째, 종래의 완만히 둥근 아치의 꼭짓점을 더 높이 올려서 ‘뾰족한 아치’(첨두홍예)를 만들었다. 첨두홍예는 “끊어진 아치”(arc brisé)이며, 아치 선이 끊어지는 꼭짓점에 쐐기돌을 박았다. 둘째, 건물 내부에서 첨두홍예를 교차시켜 예전보다 천장이 더 높은 공간을 확장시켰는데, 이것을 첨두형 궁륭이라 한다. 셋째, 지붕의 무게 때문에 벽이 바깥으로 넘어가는 일을 막으려고 버팀도리(arc-boutant)를 대서 보강했다. 높게 지은 대성당은 사방에 큰 창문을 내고 성경의 장면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표현한 채색유리를 달아 실내에 빛을 더 많이 받아들였다.
대성전은 역대 왕들의 무덤이었으므로, 수많은 석관묘와 장식물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왕은 심장을 꺼내 단지에 넣어서 따로 안치하고 시신을 석관묘에 넣었다. 1774년 4월 말에 64살의 루이 15세는 베르사유궁 근처 마을 목수의 10대 딸로부터 천연두를 옮겨 받고 열흘 만에 사망했다. 바람둥이 왕의 시신이 빨리 썩는 바람에 파리에서 가장 천한 직업인 변소 치는 인부 두 명을 불러다 염을 하고 납관에 넣어 봉인했다. 그는 방부처리를 하지 못한 채 심장을 가지고 생드니 대성전에 간 드문 사례다.
혁명기에 생드니 대성전도 문화파괴주의(반달리즘)의 참화를 겪었다. 1790년에 제헌의회가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지하고 성직자시민헌법을 제정해서 제1신분이었던 종교인들을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만들 때, 생드니 수도원도 폐지했다. 1793년 10월21일에 생드니 코뮌의 주민들은 성당의 묘지에서 다량의 물건을 국민공회로 가져왔다. 샤를 5세(1338~1380)의 왕홀과 정의의 손, 루이 16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장 하나씩, 은제 창 일곱개, 황금덩이, 루이 10세(1289~1316)의 왕관과 왕홀, 필리프 4세(1268~1314)의 왕홀·반지·단장·팔찌, 안 드 브르타뉴(1477~1514)의 관(冠), 루이 12세의 관과 온전치 못한 물건이었다. 국민공회는 왕과 종교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혁명의 이름으로 바꿀 때 생드니를 프랑시아드로 바꿔주었다.
사라진 앙리 4세의 머리
왕정복고 시기에 생드니 대성전도 다시 제모습을 찾았다. 루이 18세는 혁명의 와중에 혁명광장(오늘날 콩코르드 광장)에서 처형당한 형 루이 16세(1793년 1월 처형)와 형수 마리 앙투아네트(1793년 10월 처형)가 묻힌 마들렌 공동묘지를 발굴하고 둘의 시신을 생드니 대성전에 안장했다. 생드니 대성전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기도상을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공동묘지 자리에는 “속죄의 예배당”(Chapelle Expiatoire)을 세웠다. 오늘날 예배당은 ‘루이 16세 공원’에 있다. 지하철 9호선 생토귀스탱 역에서 가깝다.
왕의 무덤에서 시신을 훼손당한 왕도 있었다. 앙리 4세는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파리 주민들의 배척을 받다가 1593년 7월25일에 생드니 대성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파리에 입성했다. 그는 1610년에 파리 생드니 길 근처에서 살해당하고 생드니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793년 10월에 왕들의 무덤을 파헤칠 때 누군가 석관묘에서 그의 머리를 잘라 갔다. 20세기에 그의 머리는 경매로 넘어갔다. 2010년에 머리 소장자가 의뢰한 유전자검사 결과 현존하는 후손과 앙리 4세의 유전자가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이를 부정하는 검사 결과도 나왔다. 설령 유전자가 일치한다고 해서, 그 머리가 과연 앙리 4세의 것인가라는 합리적 의심을 해소할 길은 없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