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4회를 맞은 부산영화제에 나는 23년을 다녔지만, 언제나 영화제가 아니라 영화를 보러 갔다. 특히 스타나 스태프 등이 요란한 옷차림으로 등장하는 빨간색 무대나 파티 따위는 질색이다. 영화제용 영화도 보지 않는다. 영화관에서는 보기 어려운 여러 나라 영화를 본다. 하나 영화제에 나오는 약 300편 중 아무리 열심히 보아도 개인이 볼 수 있는 영화는 30편쯤이고 3편 정도에 만족할까. 그중 변함없는 하나가 켄 로치 영화다. 지난 40여년 노동법과 사회보장법을 공부하고 가르친 나에게 그의 영화는 기본 교재였을 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고와 실천의 기준이었다.
옥스퍼드 법학도 출신의 이단아
그는 1936년생으로 올해 83살이지만, 지금도 노동을 하듯이 매년 한 편 이상 영화를 찍는다. 영국 중부 시골의 보수적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계급이 분명한 영국에서 노동자 아들로는 보기 드물게 옥스퍼드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법 공부가 아니라 연극에 빠져 법률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대학 졸업 후 1963년 <비비시>(BBC)에 입사해 정치적인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그리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것은 이듬해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가 13년 만에 출범한 것과 무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평생 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공산당의 스탈린주의는 더 싫어했다. 둘 다 다수 피지배계급인 노동자들과는 무관하게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권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대의 대처 보수당 정권하에서 여러 번 검열과 방영 금지를 당하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상영되기 시작한 그의 영화는 그가 영화감독으로 부활했다고도 평가되는 199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특히 스페인 시민전쟁을 다룬 1995년작 <랜드 앤 프리덤>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에서 본 그 영화의 제목은 <대지와 자유>였다. 니카라과 민중투쟁을 다룬 1996년작 <칼라의 노래>나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다룬 2006년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도 대지와 자유라는 주제였다. 자신들의 땅에 사는 사람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다룬 그 영화들을 통해, 스페인 시민전쟁의 해방자라고 주장한 소련이나, 남미의 해방자라고 자위한 미국이 실제로는 가해자라고 폭로했다. 또 700여년 아일랜드를 지배한 영국이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이라고 폭로했다. 일본인 감독이 조선 독립전쟁을 찬양하거나, 한국인 감독이 베트남의 한국군이나 한국 기업을 비판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켄 로치 영화의 대부분은 노동자의 작은 일상 속 자유를 위한 투쟁을 다룬 작품들이다. 우리에게 소개된 것만 보아도 1993년작 <레이닝 스톤>, 1994년작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1998년작 <내 이름은 조>, 2013년작 <앤젤스 셰어>, 2014년작 <지미스 홀>, 2016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이 밑바닥을 그린 영국은 한국인의 젠틀맨 영국 이미지와 철저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2000년작 <빵과 장미>처럼 미국에 온 이민노동자의 노동조합 투쟁을 보여주는 영화도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시골 탄광촌을 무대로 하여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교육시스템을 비판한 1969년작 <케스>처럼 1990년대 이전의 작품들도 그 뒤에 차차 소개되었지만, 초기의 티브이드라마나 영화, 특히 다큐는 여전히 우리가 보기 어렵다. 게다가 그 작품들은 발표 당시 대부분 정부는 물론 노사 양쪽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국가나 자본만이 아니라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존재하는 관료권력이나 노동권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케스>에서는 부모가 형제나 자녀의 자존심을 짓밟고, <사냥터의 관리인>에서는 노동자 출신의 관리인이 유한계급의 사냥감을 키우며, <희망의 나날>에서는 법과 질서를 지킨다는 미명의 영국군이 아일랜드나 북아일랜드 주민을 탄압하고 살해한다. 그래서 켄 로치는 자본주의는 물론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부터도 비난을 받기 일쑤다. 그에게 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휴머니즘이다. 물론 진보적 휴머니즘이다. 양식으로는 비판적 리얼리즘, 사회비판을 위한 실험적 자연주의다.
그의 영화에는 소위 스타도, 시나리오도, 스릴도, 서스펜스도, 스펙터클도, 섹스도 없다. 그는 평범한 피플(민중)에게 사전 시나리오도 없이 피플의 일상을 그대로, 어떤 꾸밈도 없이 연기 아닌 연기를 하게 한다. 그러니 철저히 민주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영화를 만든다. 한두 스타에게 준다는 엄청난 출연료와 함께 수많은 스태프의 노동착취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상업주의나 대중적 흥행이나 인기와는 담을 쌓은,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모범으로 언제나 보통사람들의 삶을 말하지만 결코 보통 영화는 아니다. 그는 초기에 티브이드라마를 만들었지만 우리가 매일 보는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다. 다큐멘터리도 많이 찍었지만 역시 다르다. 다양한 삶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여주면서 양식화의 유혹이나 해피엔드식의 위안 또는 환상적 구제를 철저히 거부하기에 편안함이나 해결의 희망을 주지 않는다. 대안이 없는 비판이라거나 너무 어둡다는 등의 비판도 있지만 자유를 향한 싸움은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울면서 본 ‘소리 위 미스트 유’
그는 스캔들로 요란한 예술파 감독이나 작가 감독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겸손한 얼굴과 모습의 피플이기에, 그러면서도 평생 오로지 피플에 대한 일관된 공감을 철저히 고집한다.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이 피플을 착취하는 착취세계에서 지난 반세기, 오로지 비주류의 이의신청 수단으로 시종일관 이단적 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은 그밖에 없다. 그런 영화를 한두 편 만든 사람들이야 더 있지만, 근 60년 동안 거의 매년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사람은 그밖에 없다. 흔히 사회파 감독이나 정치적 영화감독으로 평가되지만, 그는 웅변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그야말로 피플의 삶, 하층계급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교조적인 도그마와는 무관하다. 굳이 무슨 주의라고 해야 한다면 노동주의나 아나키즘이다. 그의 싸움은 끝이 없다. 본질은 근본적 착취이기 때문이다. 노동, 실업, 불평등, 환경파괴 등을 낳는 틀을 변화시킬 힘을 잃고 인기투표에만 매달리는 가짜 좌파에게 희망은 없다고 그는 본다.
얼마 전 부산영화제에서 본 택배기사의 노동착취를 다룬 그의 새 영화 <소리 위 미스트 유>(Sorry We Missed You, 집주인이 부재중이어서 배달을 못한다는 쪽지 위에 나오는 말, 국내 개봉명은 <미안해요, 리키>)는 독립된 자영업자인 양하지만 실상은 철저히 종속된 노동자에 불과한 택배기사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여준다. 몇 번이나 울면서 신사 숙녀 관객 중에 택배기사나 그 가족은 없을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팠고, 영화제가 열리는 화려한 아시아 최대 백화점의 뒷구멍 같은 곳에서 짐을 싣고 있을 택배기사들에게 미안했다. 소리 위 미스트 유. 그래서 다시는 그 화려한 영화제에 안 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의 영화는 내가 30년 전 처음 켄 로치 영화를 보았던 영국 노팅엄 로빈후드 마을의 노동자 빈민굴, 초라한 선술집에 앉아 주인공 노동자들처럼 싸구려 술을 마시며 욕을 하면서 봐야 제격이다. 24년 전 부산영화제가 처음 열리던 자갈치시장의 펄펄 살아 있던, 가난하면서도 질긴 생명력이 더욱 그립다. 소리 위 미스트 유.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