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973년 7월 13일,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155호분에서 금제관식 출토
이후 8개월 동안의 발굴 작업에서 신라 최대 금관과 천마도도 발견돼
이후 8개월 동안의 발굴 작업에서 신라 최대 금관과 천마도도 발견돼
“외형은 많이 파괴됐지만 비교적 규모가 큰 155호분을 시험 발굴해 경험을 축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시험 대상의 발굴 무덤에서 뜻밖에 대박이 터질 줄이야.”
고고학자 조유전씨는 자신의 발굴담을 담은 책에서 1973년 발굴한 이 ‘155호분’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시험용 발굴’을 하다가 ‘대박 발굴’을 터뜨렸다고 말한 155호분이 바로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천마총’의 발굴 당시 명칭이다. 45년 전 오늘인 1973년 7월13일, 천마총에서 금제관식(왕관의 장식) 2개가 출토됐다. 조사팀은 이날 관식의 출토위치 등을 통해 이들 관식이 피장자(무덤에 묻혀있는 사람)가 직접 착장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추정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155호 천마총 고분에서 보물급 유물이 출토됐다는 소식에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발굴 현장에서 ‘보안’은 필수라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현장을 중계하듯 특정 신문에 관련 내용이 잇따라 보도되고, 그에 대한 반박 보도가 실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 시기에 잘못 보도된 기사 내용은 고쳐지지 않은 채 아직도 일부 언론사 보도와 책 등에 그대로 실려 있기도 하다.
최초 학술적 발굴 시도였던 155호분 ‘천마총’을 발굴한 조사팀은 1973년 4월6일부터 같은 해 12월4일까지 약 8개월 동안 이어진 발굴 조사 과정을 매일 기록해 나갔다. 출토한 유물의 특징은 물론이고 발굴 위치와 발굴 당시 상황, 유물의 후속 처리 작업과 날씨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수기 형식으로 상세하게 썼다. 아울러 모든 발굴 기록은 영상 자료로도 남겼다. 그 기록을 통해 155호분 ‘천마총’ 발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잘못 알려진 오류도 바로잡을 수 있다. 500여 장의 보고서로 남은 155호분 ‘천마총’의 발굴 조사 당시 주요 내용을 다시 짚어봤다.
발굴 당시
앞서 언급했듯이 155호분은 애초에 경주 평지에 남아있는 신라 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쌍분인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예비지식’을 얻기 위한 곳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큰 규모의 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98호분과 약 130m 떨어져 있는 155호분은 거리나 크기를 감안할때 ‘발굴 연습’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게다가 무너져 내린 봉분의 모습은 이미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됐다는 표식처럼 보여 ‘연습용’으로 삼기에 더욱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발굴 조사가 시작되자 이곳은 도굴의 화를 전혀 입지 않은 곳으로 확인됐다.
8개월 동안의 155호분 발굴 조사에서 금관 등 금제품 780점을 비롯해 모두 1만1297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새와 나비의 날개를 편 모양을 딴 영락(꽃 모양으로 만든 금속 장식이나 주옥을 섞어 쓰는 것)이 무수히 달린 관식이 여럿 출토됐다. 그리고 유리구슬과 영락이 달린 목걸이, 그 외에도 각종 귀걸이, 금제 허리띠에 드리웠던 열 줄이 넘는 요패(허리띠에 늘어뜨린 패물) 장식 등도 나왔다.
1973년 ‘압수’한 신라금관과 ‘출토’한 신라금관
1973년 여름은 유난히 가물고 더웠다. 이는 야외 발굴 현장 조사팀에게는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왕릉을 파헤쳐 큰 가뭄이 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그럼에도 발굴 현장 조사팀 입장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를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주 고분에 대한 학술적 발굴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도굴꾼들에 의한 훼손이 횡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도굴꾼 최아무개씨의 집에서는 1972년 말부터 이듬해인 1973년 1월까지 6백점이 넘는 보물급 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압수된 유물 가운데는 신라시대 금관 중 가장 형태가 단순하며 오래된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자 압수 유물에 대한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최씨가 도굴한 금관 이외에 도굴된 또 다른 금관 2점에 대해 검찰이 추적 중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금제관식 출토
도굴꾼에 대한 기사가 보도될 시점에 155호분 발굴 현장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었다. 7월13일에는 금제관식(왕관의 장식) 2개가 출토됐다. 조사원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 관식은 금판 전면에 투조(금속판의 일부를 끌이나 톱으로 도려내고, 그 남은 부분을 무늬로 나타내는 조금 기법)로 장식된 것이었다.
이날 금제관식이 출토되면서 ‘155호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다’는 잘못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금제관식과 금관은 엄연히 다른 유물이다. 하지만 45년이 지난 지금도 ‘1973년 7월13일 금관이 출토’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앞서 도굴꾼에 의해 ‘압수’된 금관과 혼선을 빚어 일어난 일로 보인다.
더구나 당시 확인되지 않은 유물 출토 기사가 특정 언론에서 쏟아지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발굴 현장은 ‘보안’ 때문에 통제되고 있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발굴 과정에 일어난 중요 사항은 모두 허가기관인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해야 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없던 당시엔 직접 우체국을 방문해 교환원을 통해야 가능한 일이다. ‘보안’ 사항이었던 특종을 포함한 확인되지 않은 기사를 쓴 사람은 한 보수언론사의 경주 주재 기자였다. 이 기자는 우체국 교환 실장의 남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들은 “당시에는 서로를 의심했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1500년 긴 잠에서 깬 신라금관
1973년 7월26일, 드디어 1500년간의 긴 잠에서 깬 신라금관이 출토됐다. 신라금관으로는 7번째, 광복 이후로는 최초였다. 당시 발굴을 주도했던 고고학자 조유전씨는 발굴담에 신라금관 출토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73년 7월 26일 오후, 연신 땀을 닦아가며 땅을 파던 조사원 윤근일은 흙더미 사이에서 눈부신 금빛 유물을 발견했다. “뜻밖의 금관이 눈앞에 나타나자 너무나 놀라 말문이 막혔습니다. 가슴이 얼마나 쿵쿵 뛰는지... ... . 무엇에 홀린 듯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김동현 발굴단 부단장에게 살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금관이 나왔어요’ 했죠. 그분 역시 놀랐는지 ‘이 사람아. 무슨 금관이야. 사람 놀리는 거야’했어요. 그분도 귀를 의심했던 거지요.”
3개월을 넘어가던 발굴조사 기간 동안 수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날 금관의 출토는 조사원들조차도 믿기 어려울 만한 놀라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출토된 금관은 우리나라 금관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것으로 찬란한 신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재였다.
이날 신라금관의 출토는 가뭄에 시달렸던 경주에 비를 뿌리는 기적도 가져왔다. 금관을 담은 상자를 무덤 밖으로 옮기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유물 상자를 옮기던 조사원과 인부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왕 무덤을 건드리는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이른바 ‘왕릉 발굴의 저주’를 떠올렸다. 수습한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현장사무실로 대피하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그런데 금관이 출토되고 난 뒤 흉흉했던 유언비어도 사라지고 가뭄도 해소됐다.
천마도 출토
신라금관이 출토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1973년 8월22일, 또 한번 발굴단의 눈을 의심케 하는 유물이 출토됐다. 155호분의 이름의 유래가 된 천마도가 출토된 것이다. 천마도는 말을 탈 때 필요한 안장의 부속구인 말다래(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져 있었다. 부장품을 넣어둔 궤짝에서 1쌍이 발견됐는데 발굴 현장에서는 “출토 당시 마치 천마가 환생해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고신라시대 벽화는 그때까지 발견된 것이 없었다. 고구려 벽화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발견된 천마도는 엄청난 수확이었다. 천마도는 155호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서 금관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단됐다. 전문가들은 문화재 발굴 뒤 학술적인 명칭을 정할 때 누구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대표성을 띤 이름을 찾는다. 그래서 1974년 9월 23일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천마도가 삼국, 특히 고신라시대의 회화 수준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그림으로 판단했다. 이후 155호분은 천마도가 발견된 큰 무덤이란 뜻에서 ‘천마총’으로 명명됐다.
하지만 이를 두고 ‘천마총의 이름을 바꿔달라’는 국회 청원이 나오기도 했다. 985명의 경주 김씨의 명의로 낸 청원은 사람의 무덤이 분명한 고분인데 마치 말의 무덤인 것처럼 이름을 짓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981년 10월1일 문화재위원회는 “발굴조사 결과 묻힌 주인공을 왕으로 확정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며 155호분의 이름을 ‘천마총’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1973년 발굴 조사로 천마총에서는 신라금관과 천마도를 비롯해 유리잔, 계란 등 당시를 짐작해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 1만1297점이 발견됐다. 특히 금모(금으로 만든 관 안에 쓰는 모자의 일종)와 금제 허리띠 등 수많은 금장식품은 지금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고 화려하다.
발굴조사로 수습된 유물은 1976년 천마총 내부를 복원한 전시관과 박물관 등에 나눠 전시됐다. 하지만 전시관은 발굴 당시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경주시는 지난해 9월, 45년여 만에 천마총 전시관에 대한 보수에 들어가 현재 공사 마무리 단계에 있다. 오는 7월27일이면 10개월여 간의 보수공사를 거쳐 좀 더 본래 모습에 가까워진 천마총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예정이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천마총 발굴 영상 갈무리.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천마총 발굴 영상 갈무리.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천마총 발굴 영상 갈무리.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1973년 7월 23일 치 <동아일보>보도 내용.
7 월 13 일 맑음
연일 혹서가 계속된다 . 잔존한 남 · 북 · 서측 벽의 정리와 함께 동측 벽 노출에 온 힘을 기울였다 . ( 중략 ) 오후 5 시경 이곳 판재위에 박힌 낙석을 제거하다가 앞서 금동관이 발견된 위치에 서북편으로 약 20cm 되는 지점에서 찬란한 금제관식 1 개가 출토되었다 . ( 중략 ) 발굴과정의 기록영상을 찍고 있는 촬영기사의 신명 나는 카메라 소리와 함께 먼저 발견된 관식의 바로 남쪽에서 또 하나의 금제관식이 나타났다. -천마총 발굴 조사 보고서 중-
1973년 7월 14일 <경향신문> 보도 내용.
7 월 26 일 맑음
아침부터 금관의 노출작업과 함께 관 내부 조사를 계속하였다 .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 금관은 ( 중략 ) 조사자는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유골의 검출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 시신의 상반신 장신구류가 모두 드러났다 . 그러나 그 누렸던 영화의 상징인 각종 장신구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시신의 흔협이라 할 만한 것은 단 한 편도 찾아낼 수 없었다. -천마총 발굴 조사 보고서 중-
천마총 발굴 영상 갈무리.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천마총에서 출토된 5∼6세기 신라 금관. <국립경주박물관>제공.
8 월 22 일 맑음
오늘은 날씨도 청명했지만 아침부터 현장은 다시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그것은 며칠 전 그 일부가 보였던 것이지만 오늘 동편 중앙의 장니를 들어내자 그 밑에서 하늘을 나는 천마가 채색된 ( 중략 ) 천년이 넘는 세월을 지하에 묻혀 있던 천마도 장니가 갑자기 외기에 접하게 되어 건조와 조색이 심할 것 같아 보존책이 시급해졌다. -천마총 발굴 조사 보고서 중-
천마총 천마도. <한겨레> 자료 사진.
천마총. <한겨레> 자료 사진.
천마총에서 출토한 금모(왼쪽)와 유리잔. <문화재청>
천마총 봉분 안에 있는 전시관 모습. 진열장 목곽 위에 쌓인 상부 돌무지(적석)의 모양을 최근 고분 발굴 성과에 따른 고증을 반영해 반원형에서 사다리꼴로 바꾸게 된다. <한겨레> 자료 사진.
참고문헌
<한국사 미스터리 > 조유전 ·이기환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 이덕일 ·이희근
<천마총 발굴조사 보고서 >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공식 누리집
도움 주신 분
국립경주박물관 신광철 학예연구사
연재역사 속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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