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얀산맥 깊숙한 곳 타이가 지대에서 유목민들은 야성과 이해 불가능한 순종성을 동시에 갖춘 사슴이라는 특이한 짐승을 길들이면서 스스로를 바꿔놓았다. 이곳에선 인간과 사슴이 맺은 산업화 이전의 계약이 여전히 유효하다. 공원국 제공
가끔 겪고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12월 마지막 주 사얀 타이가에서 나는 달리는 사슴 위에서 네 번이나 거꾸로 떨어졌지만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나와 사슴은 서로의 말도 못 알아듣는 채 타이가에 몇 시간이나 헤맸음에도 눈 바다를 유유히 헤치고 돌아왔다.
인간과 순록이 왜 언제부터 함께한 것일까? 순록은 인간에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모든 것을 주지만 인간은 무엇을 주는가? 인간이 주는 것은 턱없이 적으나, 둘의 첫 동거 계약은 강요가 아닌 약속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아나톨리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도 늑대가 무시무시한 존재야. 곰은 밤 무렵에 야생 호두를 먹으러 주로 나타나지. 그래도 그놈들은 11월에 잠을 자서 4월에나 깨어나잖아. 그놈들에게 해마다 많이 잃지만 사슴은 매년 늘고 있어.”
인간과 함께하면서 사슴은 늘어나고 있다. 보르바굴은 이렇게 말했다. “전해에는 곰이 다섯 마리 잡아갔는데, 다행히 올해 곰은 안 잡아갔어. 그런데 늑대가 네 마리 데려갔네. 늑대가 오면 개는 몇 마리라도 짖지도 못해. 늑대가 사슴 목을 한 번 물면 바로 죽고, 뒷다리를 물면 끊어져. 살아남아도 결국은 죽지.” 그래도 순록은 늘어나고 있다. “지금은 순록 수가 너무 적어서 팔지 않아. 계속 늘려야지.”
사실 인간이 늑대를 막아줄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늑대는 인간의 냄새를 싫어한다. 영민한 순록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순록은 인간이 자신들에게 주로 원하는 것이 고기가 아님을 알았다. 예전에는 기근이 닥치거나 큰 행사를 치를 때가 아니면 순록을 아예 도축하지 않았다. 그저 짐실이로 쓰고 젖을 짤 뿐이다. 물론 지금도 다치거나 병든 개체가 아니면 도축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축이 된 순록은 인간 가까이에서 안정감을 느낀다.(정부는 마리당 3만원가량의 보조금을 해마다 제공하지만, 목동 한 명이 대략 50마리 정도를 키우니 보조금은 보잘것없다.)
녀석은 이내 나를 인정해주었다
숲에서는 모든 것이 얽혀 있어서 일방적인 원한이 없다. 늑대 덕에 인간과 순록이 동맹을 맺었으니, 사실 늑대야말로 인간에게 가축을 몰아주는 고마운 존재다. 먹이식물에게 늑대는 초식동물의 수를 통제하는 고마운 친구다. 물론 사슴은 식물을 먹고 그 씨를 숲 곳곳으로 전파한다. 오늘날 가축 순록은 형편없이 줄어들었지만 늑대와 야생 순록이 긴장을 유지하는 사이 이끼는 풍성해지고 숲에 나무가 꽉 들어찼다. 인간에게 진짜 위협적인 녀석은 의외로 순한 놈이다. 아나톨리가 말했다.
“야생 수컷 순록이 늑대보다 더 무서워. 이놈이 나타나면 암컷들과 무리를 한꺼번에 이끌고 산으로 들어가버리거든. 그놈이 오면 쏴서 잡는다.”
“야생인지 바로 알 수 있나요?”
“야생 수컷의 뿔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워. 한 번만 보면 야생인지 알 수 있지. 그 녀석들이 사실 숲의 주인이야.”
순록과 인간의 계약은 파기될 수 있다. 야생 순록이 다가와 유혹할 때, 인간이 당장 곁에 없으면 무리는 미련 없이 떠난다. 그래서 그들은 “게으름뱅이 순록치기는 없다”고 말한다. 게으름을 피우는 순간 무리는 떠날 테니까. 하지만 야생 수컷 순록은 사냥꾼들의 겨울 식량이 된다. 아나톨리는 올해 네 마리를 잡았으니 돈 없이도 겨울은 나름대로 풍족할 것이다. 그러니 야생 순록이 없으면 가축과의 계약을 지킬 수 없다. 그들의 계약은 이해할수록 복합적이다. 짐승과 인간의 계약을 이해해야 유목의 다면성이 보이리라.
순록 타기는 말이나 당나귀 타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막대기를 짚고 단번에 올라타 중심을 잡아야 한다. 공원국 제공
짐승과 인류는 오래전 계약을 맺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불평등한 계약이었지만, 그들은
인간 곁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하며
노동자의 인신과 인격까지 독점하듯
인류는 그들과 단백질 공급 계약을 맺고
그들의 동물성을 빼앗아버렸다
부인이 먼저 마을로 내려갔기에 보르바굴은 혼자다. 나는 외로운 그의 천막에서 며칠 보내면서 순록치기를 배우기로 했다. 산악 지형에서 썰매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순록을 타고 다닌다. 드디어 순록을 치러 가는 날 보르바굴이 물었다.
“몸무게가 얼마냐?”
“75킬로그램.”
내가 보르바굴보다 무거워서 제일 큰 녀석을 탔다. 당나귀보다 키는 약간 크고 덩치는 약간 작은 이 사슴은 마치 성대가 없는 듯 어떤 경우에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녀석은 이방인이 불편했는지 빙글빙글 몇 바퀴 돌았지만 이내 나를 인정해주었다. 순록 타기는 말이나 당나귀 타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순록은 눈밭을 거침없이 달리지만 등이 둥글지 않고 몸체가 가볍다. 그래서 막대기를 짚고 단번에 올라타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균형을 못 잡아 넘어지면 사람도 다치지만 순록의 등도 다친다. 재갈 없이 얼굴에 씌운 가죽끈 하나로 섬세하게 통제하면서 녀석과 한몸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당장 떨어진다. 다행히 좁은 어깨뼈의 근육이 그대로 느껴져서 보지 않고도 녀석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녀석은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의 키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낮은 나뭇가지 아래로 녀석이 지날 때 온몸을 숙이지 않으면 걸려 떨어진다.
나는 벌써 한 번 걸려 떨어졌지만 보르바굴은 능란하게 가지를 피해 몰아간다. 방목지 주위의 숲에는 이끼도 많고 습지에 건초도 풍부했다. 순록 무리는 그곳이 마음에 들어서 이틀 간격으로 야영지로 와서 소금을 보충하고 바로 돌아간다고 했다. 물가 순록 떼를 점검하고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보르바굴이 멀어졌다. 숲속에 흩어진 순록을 모으러 가는 것이었지만 나는 영문을 몰라 무턱대고 그가 간 방향을 쫓고자 했다. 하지만 눈 날리는 타이가에서 숲으로 사라진 사람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멍청하게도 나는 방목지로 오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 그동안 살뜰히 챙기던 덧버선을 신지 않았다. 동상의 공포가 떠오르자 허둥지둥 이성이 마비되었다.
보르바굴의 천막. 그의 천막에서 며칠 머물며 순록치기를 배웠다. 공원국 제공
놈이 한발짝만 더 뛰었더라면…
길을 인도하던 보르바굴이 숲으로 사라지자 나를 태운 녀석은 고삐질을 무시하고 습지의 무리 쪽으로 방향을 바꿔 뛰었다. 순록이 사람을 태우고 물가를 움직이면 안 된다. 얼음이 꺼져 순록의 발목이 부러지거나 물에 빠지면 대단히 위험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무턱대고 보르바굴이 떠난 숲 방향으로 녀석을 강제로 끌었다. 사방이 똑같은 눈밭인데 눈발마저 날려 해를 가리니 방위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고래고래 보르바굴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녀석은 내 불안을 알아차렸는지 고삐질을 따라 달려주었지만, 나무를 피하고자 녀석이 휘청거리며 급히 방향을 틀었고 나는 여지없이 떨어졌다. 낙마의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식겁을 했다. 다행히 눈이 깊어 몸은 다치지 않았지만 등자가 아직 발에 걸려 있었다. 그놈이 한발짝만 더 뛰었더라면 내 발목이 부러지거나 녀석의 등뼈가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달리던 녀석이 내가 떨어지자 한걸음에 멈췄다. 녀석의 제동력은 탁월했다. 장화 안으로 눈이 들어오자 예전 동상이 걸린 발이 또 쓰려왔다. 숲으로 들어가 보르바굴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지만 내 고삐질이 방향을 잃으니 녀석도 이리저리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녀석이 고집을 부리며 멈췄다. 차마 때리지 못해서 잠시 멈추니 녀석은 다시 몸을 돌려 무리 쪽으로 뛰었다. 그리고 녀석이 가지 밑으로 뛰어들 때 다시 걸려 떨어졌다. 등골이 서늘했다. ‘놈이 그대로 떠나면 나는 여기서 끝이구나.’ 하지만 눈에 파묻힌 채 올려다보니 녀석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이라면 이방인을 버렸을 테지만 사슴은 달랐다. 시커먼 눈동자는 분명 이야기하고 있었다. ‘멍청이, 너를 버리고 가지는 않겠다.’
멀뚱멀뚱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퍼뜩 이성이 돌아왔다. 사슴 떼와 함께 있으면 보르바굴은 결국 돌아올 것이다. 대신 녀석의 몸에 다리를 밀착해서 동상을 막자. 내가 몸에 힘을 빼고 고삐질을 멈추자 녀석이 무리를 찾아 나섰다. 녀석이 옳았다. 한참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더니 멀찍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먹이를 찾느라 멈춰 있었다. 우리는 늪가에서 무리에 합류하여 함께 흘렀다. 동상이 두려워 나는 미안했지만 내릴 수 없었다. 그날 녀석은 나를 태우고 이끼를 찾아다녔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나 눈에 닿은 발이 아파올 때 주위의 무리가 서서히 불어났다. 누군가 사슴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한참 후 보르바굴이 내 소리에 응했다. 타이가에서 아는 사람을 다시 봤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유목민들이 추위와 동상을 피하기 위해 신는 덧버선. 공원국 제공
그는 나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치고 떠났으나 내가 오해하고 그를 따랐기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저녁 눈을 맞으며 우리는 사슴 무리를 이끌고 물가를 따라 야영지로 돌아왔다. 놈이 옳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만이 정답이었다. 그 순한 녀석이 고집을 피울 때는 이유가 있다.(안타깝게도 그날 사슴 한 마리가 발굽을 다쳤다. 타이가에서 발굽을 다친 사슴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보르바굴이 설상차에 태워 마을로 내려가 도축하려는 걸 간곡히 만류했다. ‘새해가 시작된다. 곧 죽을 놈하고 한 짐칸에 타기 괴롭다. 나을지 모르니까 좀 기다려 보자.’ 보르바굴은 내 청을 들어주었다. 녀석의 발굽은 나았을까?)
차지도 물지도 받지도 않고 묵묵히 옮겨주는 친구, 실패를 나무라지 않고 번번이 기다려주는 친구, 그리고 친구의 잘못을 단호히 고쳐주는 친구. 승마용 순록은 친구 그 이상이었다. 내 인간 친구들 중에 그런 이가 얼마나 될까? 나 자신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였던가?
짐승과 인류는 오래전 계약을 맺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불평등한 계약이었지만, 그들은 인간 곁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 맞게 계약은 갱신됐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하며 노동자의 인신과 인격까지 독점하듯 인류는 그들과 단백질 공급 계약을 맺으며 그들의 동물성을 빼앗아버렸다. ‘탄수화물을 무한대로 주마, 단백질을 내놓아라. 다만 너희들은 움직일 수 없다.’ 동물임에도 식물처럼 못박혔으나, 그나마 식물이 누리는 일조권마저 누리지 못하는 동물. 고통 없이 살고자 하는 그 본성은 ‘적정도축연령’이라는 지상의 명령에 의해 무시된다. 그들이 실제로 몇 살인지는 상관없다. 간이 충분히 부은 거위, 갓 태어난 수송아지, 우리에 몸이 꽉 들어찬 돼지는 이미 적정 연령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가축의 삶이다.
‘나의 친구’. 이방인이 불편했는지 나를 등에 태우자마자 빙글빙글 몇 바퀴 돌았지만, 이내 나를 인정해주었다. 공원국 제공
순록이 원하는 최고의 특식, ‘오줌’
많은 사람들은 유목민의 식생활을 오해한다. 산업화 이전의 유목민은 고기가 아니라 주로 젖에 의존한다. 그들은 겨울이 시작될 무렵 단 한 차례 양식을 얻기 위해 도축한다. 여름 동안 유목민도 왕성한 채집 활동을 한다. 버섯이든 약초든,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모은다. 그리고 그들은 머나먼 시장에서 여전히 고기보다는 싼 곡물을 구입한다. 물론 유목지대가 동물의 천국은 아니다. 수컷들은 더 빨리 팔리거나 거세당한다. 수천마리의 가축을 끌고 다니는 기업형 방목가들이 분명 있다. 양모 생산을 위해 육성된 양들이 초원을 황폐화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가축이 처한 일반적인 숙명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그들은 태양 아래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다니는 ‘동물’이다.
이 사얀산맥 깊숙한 곳, 인간과 동물이 맺은 산업화 이전 태고의 계약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야성과 이해 불가능한 순종성을 동시에 갖춘 사슴이라는 특이한 짐승을 길들이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바꾸었다. 이곳에서 동물과 인간은 제3의 언어를 개발하여 약속으로 서로를 속박하여 친구로서 공존한다. 새끼는 안아주고 더 맛있는 것을 줘서 달래고, 타고 다니는 녀석들은 오직 이름만 부르고 그토록 원하는 오줌(최초의 가축 순록은 오줌 때문에 인간 곁으로 온 것이 틀림없다!) 특식을 준다. 무리를 이끄는 수컷 우두머리의 뿔은 남기고 장식을 달아서 권위를 세워준다. 강제로 모으고 끌어서 병들고 지치게 하지 않고 그들이 다니는 길목으로 먼저 가 ‘만남 놀이’를 한다. 과연 그들은 때가 되면 만남의 장소로 나타난다. 찬 바람 부는 언덕에 야영지를 잡아 벌벌 떨면서도 짐승에게 모기와 각다귀의 괴로움을 없애준다. 그리고 저녁에도 쉬지 않고 모깃불을 피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고역스러운 일이 있다. 아무리 몰래 해결하려 해도 소변을 볼 때면 소금에 사족을 못 쓰는 녀석들이 몰려든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대변을 볼 때다. ‘녀석들아, 오줌이 아니라 이번엔 똥이라고!’ 소리쳐도 녀석들은 소리 없이 눈으로 대답한다. ‘어차피 오줌도 눌 거면서.’ 그러다 의도치 않게 뿔에 바지가 걸려 찢어져도 화내서는 안 된다. 이 오줌 한줄기에서 타이가의 신성한 계약이 시작되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