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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못하는 일을 우리가 합니다”

등록 2022-08-27 10:00수정 2022-08-27 10:08

[한겨레S] 인터뷰: 윤형식 유럽인문아카데미 대표

본격 인문 강좌 표방한 대안대학
대학에 없는 마르크스·푸코 강좌
매 학기 20~50대 학생들로 북적
소외된 연구자 터전 마련하고파
윤형식 유럽인문아카데미 대표가 서울 서초구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내 유럽인문학 전문도서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윤형식 유럽인문아카데미 대표가 서울 서초구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내 유럽인문학 전문도서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유럽의 대표적 진보 철학자인 한스 외르크 잔트퀼러 독일 브레멘대학 전 교수는 ‘지식의 위기’ 시대가 오면 가난한 이들이 가장 먼저 위협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지식인이 제 기능을 못 하고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이 사라지는 지식 위기의 시대엔 지식 민주주의야말로 사회 정의의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잔트퀼러 교수의 제자로 브레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윤형식(61) 유럽인문아카데미 대표는 그런 ‘지식 민주주의’에 한발 다가가는 기획을 실천에 옮긴다. 2019년 5월 어느 날, 서울 종로구의 한 독일맥주 가게에서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중앙대), 최성만 교수(이화여대), 이재영 교수(서울대·문학평론가)와 함께 순수 인문학 교육 및 연구기관을 만들어 보자며 뜻을 모았던 것이다.

다음달 5일 개강하는 가을학기에는 스피노자 <윤리학> 읽기(진태원), 제발트 읽기(이재영), 발터 베냐민의 ‘파사주 프로젝트’ 읽기(최성만) 같은 세미나를 쟁쟁한 학자들이 진행한다. 원전 강독으로 마르크스 <자본론>(김호균), 헤겔 <정신현상학>(김동훈), 버크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등을 준비했다. 이집트 고고학의 세계(곽민수), 비엔나학파의 사상(권희진), 니체 철학 입문(정지훈) 같은 강의도 있다.

2021년 가을 유럽인문아카데미 저자 초청 기획대담 ‘내 책을 말한다’ 행사 장면. 다음달 23일 제5회 저자 초청 기획대담은 &lt;제국의 정전 셰익스피어&gt;(한길사, 2021)를 놓고 저자 이경원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와 대담자 김영아 한성대 기초교양학부 교수가 이야기를 나눈다. 유럽인문아카데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한다. 유럽인문아카데미 제공
2021년 가을 유럽인문아카데미 저자 초청 기획대담 ‘내 책을 말한다’ 행사 장면. 다음달 23일 제5회 저자 초청 기획대담은 <제국의 정전 셰익스피어>(한길사, 2021)를 놓고 저자 이경원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와 대담자 김영아 한성대 기초교양학부 교수가 이야기를 나눈다. 유럽인문아카데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한다. 유럽인문아카데미 제공

비판적 인문정신을 키우는 대안대학

―유럽인문아카데미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김누리 교수가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이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제안서를 써서 보냈죠. 처음엔 별 기대 없이 취지문을 보내고 논의를 진행했는데 뜻밖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와서 몇달 뒤인 2015년 가을에 기본 운영진을 꾸렸습니다.”

―왜 인문학이고, 왜 유럽인가요?

“저희는 처음부터 ‘본격 인문 강좌’를 하겠다는 뜻을 의도적으로 밝혔습니다. 우리가 유럽을 바라보는 건 우리의 경제적, 정치적 삶이 유럽에서 기원한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재의 삶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유럽의 제도를 각인한 인문학을 토론의 대상에 올려놓자는 거죠. 인문학이 모든 답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인문학 공부 없이 유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대학이 있는데, 왜 대안대학이 필요할까요?

“지금 대학은 인문지성의 산실 구실을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런 대학의 대안으로서 비판적 인문정신을 함양하고 실천하는 대안대학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강사진은 어떻게 구성하셨나요?

“처음엔 철학, 독문학, 사학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차차 영문학, 불문학, 미학 등 강좌를 보강했죠. 다행히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장학생 가운데 훌륭한 인문학자들이 많아 강사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수강생들은 얼마나 되나요?

“봄, 가을, 겨울 3학기제로 운영하는데 2021년 1년 총 수강인원이 802명이에요. 올해 2022년 봄 학기는 31강좌에 266명이 신청했습니다.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저희 강의가 굉장히 전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죠. 연령은 20~50대까지 고르게 많고 대학원생, 학부생, 직장인들도 많습니다.”

―올봄부터 대면 수업이 원칙이라고요.

“강사가 수도권 밖이나 외국에 있을 경우 온라인 강의를 허용합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대화와 토론이 핵심이고 이성의 연장으로서 신체성이 중요합니다. 강의 만족도도 대면 수업이 훨씬 높아요.”

“폐강되지 않는 인문학 강의

―인기 과목이 궁금합니다.

“마르크스 <자본론> 독일어 강독이 6학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독일어 강독이 5학기 진행되었어요. 칸트, 헤겔 강좌는 대학 안에서 강의가 없다며 학생들이 들으러 옵니다. 지난 학기엔 ‘마르크스와 푸코’ 강좌가 있었는데 코로나 탓에 24명까지 수강인원을 제한했는데도 정원이 꽉 찼습니다. 대학에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푸코 강좌조차 없다고 하더군요. ‘토마스 아퀴나스와 13세기 인간학의 문제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유럽과 이슬람’ 같은 과목에서 보듯 정규 대학에서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을 심도 있게 다룹니다.”

―강사료는 높은 수준인데, 수강료는 10주(매회 100분 강의)에 5만원이면 너무 싼데요.

“수강료는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청계산 매봉을 오르며 이야기하며 어울리는 행사 ‘인문산책’을 위해 씁니다. 실제 강사료는 장학재단이 투자를 하고 있는 거죠. 덕분에 수강생이 적어도 거의 폐강이 없고, 강사료도 학생 수에 따라 들쭉날쭉 달라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할 일이 궁금합니다.

“신진 연구자들을 가능한 한 발굴하여 그분들이 강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고 싶습니다. 새로운 연구자들과 그간 주목받지 못하고 소외된 연구자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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