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M. 포스터가 쓴 <모리스>(1914년 집필, 1971년 출판)는 우리에게 동명의 영화(1987)로도 소개되었지만, 그 실제 주인공인 에드워드 카펜터는 우리에게 소개된 적이 거의 없다. 2017년에 나온 퀴어 시선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에서 ‘여름의 열기’라는 제목의 카펜터 시 한편을 보았을 정도다. 그러나 레프 톨스토이와 표트르 크로폿킨, 월트 휘트먼과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윌리엄 모리스와 엠마 골드만, 헨리 솔트와 마하트마 간디의 친구였던 카펜터의 삶과 생각은 포스터만이 아니라 올더스 헉슬리와 D. H. 로런스, 특히 후자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집필에 영향을 끼쳤다. 또 20세기의 동성애 운동이나 동물권리 운동은 물론 자연주의, 페미니즘, 평화주의, 생태주의, 반제국주의 등에도 큰 영향을 줬다.
미남미녀를 좋아하는 사회풍조에 비추어보아도 영화 <모리스>에 나오는 배우들보다 카펜터나 그의 파트너 메릴이 훨씬 미남자들이다. 그러나 명문대 대학생들 사이의 동성애를 다루는 <모리스>의 사랑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스물두살의 나이 차와 지식인과 노동자라는 신분 차를 초월한 공개적인 사랑이라는 점이다. 10대 사춘기 때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으며 나도 그런 초월의 사랑을 꿈꾸었고, 학생들에게 권하기도 했으나 반발을 샀다. 카펜터는 그 초월의 사랑 때문에 평생 이단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의식주뿐 아니라 사랑까지 포함한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오도록 평생 노력했다.
1844년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의 성직 펠로라는 영국 최고의 출세 코스를 버리고 평생 시골에 은둔하면서 시를 쓰고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돌집을 짓고 소박한 채식을 하며 샌들을 만들고, 쉼 없이 사회주의 운동을 한 것은 그런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동성애는 물론 사회주의까지도 여전히 금기이고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소박한 삶 대신 모든 생활을 타인의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는 21세기 한국의 문명사회에서 그의 삶과 생각은 너무나도 이단적이다. 문명의 극단인 빅토리아 사회를 버리고 반문명으로 돌아간 그는 당시 사회의 과학과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신념에 반대하고 외부에서 강요되는 법은 언제 어디에서나 거짓이라고 비판하면서 자기표현의 내적 법만을 인정하였다. 남녀가 연인이자 친구가 될 수 있는 사회를 원한 그는 <미래의 사랑>(Love’s Coming of Age, 1897)에서 새로운 형태의 남성과 여성의 결합인 중간성의 창조를 촉구했다.
출세 버리고 농사지으며 시 써
공개 동거로 19세기 금기 깨고
평화·생태·페미니즘에 큰 영향 줘
소설과 영화 ‘모리스’의 주인공
그의 여러 책을 애독한 간디를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특히 깊은 영향을 준 <문명: 원인과 치유>에서 카펜터는 루소와 셸리를 따라 문명이 자연인을 타락시키고 와해시켰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제가 인간의 완전성을 깨뜨리고 진정한 자아로부터 끌어내려 모든 형태의 질병 먹잇감으로 만들었다고 봤다. 그처럼 그에게 문명의 근본문제는 사유재산이었다. 사유재산에 기반을 둔 문명은 노예, 농노, 임금노동 등의 여러가지 지배-피지배 계급 사이의 갈등과 착취를 초래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와 경찰이 만들어졌다. 초기 사회의 유기적 구조를 파괴한 사유재산제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초래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절제를 상실하게 만든 외부의 압력에 의해 사회적 질병, 빈곤, 불평등, 그리고 예외적 증상인 범죄를 낳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고, 문명에 대한 치료법이 있다고 본 카펜터는 자유로운 공동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간디와 허버트 리드를 깊이 감동시킨 작품인 <비국가사회>에서 그는 인간사회가 법과 제도 없이 스스로 좋은 질서와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개인에게 더 온화한 형태로 압력을 가하고 사회의 일반적인 움직임에 적응할 수 있는 관습이 법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보았다. 나아가 원시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게만 맡겨진다면 현대 사회의 경쟁과 불안은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자유로운 비국가사회’는 필수적이고 유기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가능하다고 본 그는 상품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생산이 시작되고 자발적인 자유 교환이 뒤따르면 개인의 두려움과 불안이 아니라, 삶과 에너지를 함께 향유하는 사회적 완전함에 바탕을 둔 자급자족 사회가 된다고 전망했다. 그 사회에서 일은 취향과 기술에 따른 자발적인 선택에 기초할 것이고 공동재산에 의존하므로, 비국가사회는 자유롭고 공동체적인 사회일 것이라고 보았다.
1900년쯤의 카펜터와 그의 파트너 메릴. 위키피디아
카펜터는 무엇보다도 시인이었다. 젊은 시절, 셸리와 휘트먼의 리버테리언 세계는 그의 이상이었다. 여기에 <바가바드기타>를 비롯한 비서양 세계의 고전에 대한 깊은 독서로 그의 시는 더욱 심오해졌다. 또 사회주의 운동을 함께 한 윌리엄 모리스처럼 카펜터도 모든 사람이 예술에 접근하고 삶이 예술처럼 바뀌는 세상을 꿈꾸었다. 카펜터는 성혁명, 직접민주주의, 채식주의, 평화주의를 수용한 그의 특별한 랩소디인 <민주주의를 향하여>(Towards Democracy, 1883)에서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표현했다. 현존하는 문명 대신에 모든 사람이 작은 집과 땅을 가질 수 있는 분권화된 들판과 작업장의 사회에서의 소박한 삶을 추구하면 자유는 저절로 나타나고 모든 개인은 자기 자신, 동료들, 그리고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 것이라고 했다.
카펜터는 게으른 시인이나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교사로 일한 뒤 약간의 독립된 수입을 물려받았지만, 스스로 집을 짓고 땅을 갈고 샌들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카펜터가 ‘영국의 톨스토이’라고 불린 것은 그가 말한 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톨스토이처럼 당시의 폭력적인 아나키스트와 자신은 다르다고 했고, 인간성의 몰락을 가져오는 데 국가나 정부보다 사유재산이 더 중대한 요인이라고 보았지만, 법이 없는 분권화된 자유사회에 대한 그의 비전은 전적으로 아나키즘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말은 어떤 이단의 낙인에도 불구하고 “서두르지 마, 믿음을 가져”라고 했던 한마디이다.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