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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지금 여기 래디컬’을 묻다

등록 2021-09-04 15:27수정 2021-09-04 15:33

[한겨레S] 기획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포럼 뒷이야기

너무도 다양해진 페미니즘 정체성
한국의 ‘랟펨’은 생각보다 복잡
남성지배 기대 큰 여성이 더 분노
대중의 급진적 실천, 미래는 어디
지난달 30일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포럼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 페미니즘 역사와 기억’ 현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지난달 30일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포럼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 페미니즘 역사와 기억’ 현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지난달 26일부터 일주일간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서울 마포구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등지에서 열렸다. 이번 영화제는 ‘팬데믹과 페미니즘 백래시의 시대’의 안부를 확인하고 미래를 제안하는 자리였다. 당대 가장 뜨거운 페미니즘 이슈를 얘기하는 쟁점포럼의 올해 제목은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 페미니즘 역사와 기억’. 지난달 30일 6명의 활동가와 여성학자들이 ‘래디컬 페미니즘’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권김현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이 이날 오간 질문을 중심으로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분석한다. <편집자>

왜 한국의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에 페미니스트가 된 이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을 ‘래디컬’이라고 명명할까. 2018년 예멘난민반대 운동에서 등장한 ‘남(男)민반대’라는 주장은 가부장적 국가를 소환하는 반페미니스트 주장과 조응한 것이 아닌가. ‘생물학적 여성만’을 강조하는 ‘여성 전용 공간’이 만들어낸 ‘여성’ 범주는 무엇인가. 여성의 안전에 대한 당연한 요구는 왜 급진적 요구가 되었는가. ‘래디컬, 교차성, 리버럴’로 나눠진 구분은 유효한가…. 지난달 30일, ‘‘래디컬’을 다시 질문하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포럼에서 제기된 질문이다. 이 포럼을 기획하면서 안티페미니스트에 의해 남성혐오주의자로 규정된 ‘래디컬 페미니즘’을 프레임 바깥으로 빼내와서 ‘래디컬’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 공론장을 만들고 싶었다. 앞서 제기된 질문들이 그 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남성을, 왜 혐오하는가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은 지난 백여년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혐오한다”는 말이 등장한 건 1800년대 후반부터였고, “성차별 사회의 진짜 희생자는 바로 젊은 남성”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도 같은 시기다. 페미니즘이 시작된 이래 페미니즘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붙이는 딱지는 이름만 바꿔 되풀이되었다. 꼴페미, 남성혐오자, 피해의식, 정신병, 페미나치 등등. 지금은 그 이름에 ‘래디컬’이 붙었다. 얼마 전 한 신문사 편집국에서는 “페미니즘을 부정적 의미로 다룰 때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쓰라”는 지침이 전달되었다. 이 신문에서 지칭한 ‘래디컬 페미’는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우월주의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남성을 혐오하는 게 ‘급진적’ 실천일 리 없다. 나는 남성혐오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성혐오가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적대적 환경을 설명하는 언어라면, 남성혐오는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비대칭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질문은 두가지이다. 남성혐오는 있는가?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혐오하는가? 많은 연구에 근거하자면, 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면 누가 남성을 왜 혐오하는가? 이런 질문은 위험하다. ‘혐오를 왜 하는가?’라는 질문은 혐오 행위 자체가 정당성을 가진다고 전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거센 지금 현재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달 30일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포럼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 페미니즘 역사와 기억’ 현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지난달 30일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포럼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 페미니즘 역사와 기억’ 현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누가 남성을 왜 혐오하는가? 다음 연구를 보자. 1983년 앤서니 이아조는 전미여성협회의 지부에서 모집된 가정폭력 및 성폭력 피해자, 페미니스트, 레즈비언을 대상으로 페미니스트가 정말 남성을 혐오하는지를 연구했다. 대조군은 비페미니스트 백인 여성으로 설정했다. 80점이 남성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였는데, 비페미니스트 대조군은 89.93점으로 약간 호의적인 태도로 나타났고, 페미니스트들은 79.54점으로 중립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가 아니라 단지 중립적이었을 뿐인데 남성혐오자라는 공격을 받았다는 말이다. 2001년 존 몰트비와 리자 데이는 대학생들 대상으로 젠더규범의 수용성과 상대 성별에 대한 태도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여성적 특징과 규범에 수용적인 여성일수록, 즉 페미니스트가 아닐수록 남성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념과는 달리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비페미니스트 여성이 남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다는 연구는 또 있다. 1999년 피터 글릭과 수전 피스크는 남성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와 호의적인 태도에는 높은 상관관계가 있으며, 가부장적 관습을 수용한 여성들이 둘 모두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여성혐오의 시대>를 집필한 크리스틴 앤더슨은 남성 지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믿음을 가진 여성들이 남성 지배의 실패와 좌절이라는 결과에 더 높은 분노를 표출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니까 비페미니스트 여성들의 남성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가 남성혐오라는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자에 대한 얘기 자체를 거의 안 한다. 페미니즘은 남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성의 성역할이 정체성으로 주어지는 방식이 바로 가부장제 사회의 작동 원리이므로,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성의 삶을 지배하는 남성의 특권적 위치를 약화시키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말해왔을 뿐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혐오하는가

그렇다면 2015년 이후 페미니즘 대중화 국면에서 한국에서 스스로를 ‘랟펨’이라고 명명한 이들은 어떤가? 일단 페미니즘이 대중화되었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유례없는 대중성의 확보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여성혐오의 증폭과 확산이 심화된 결과이자, 여성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여성에 대한 적대감에 가득찬 일상을 살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효과다. 그 직전까지 페미니즘은 이제 시효를 다했다는 진단이 떠돌았는데, 다소 갑작스럽게 페미니즘 대중화로 넘어간 데에는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만연한 폭력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여성 대중의 자각이 그 전 페미니즘 운동과의 일정한 단절 속에서 온라인에 기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중화 국면은 이전까지 단절되었던 페미니스트와 비페미니스트 여성 간의 거리를 급작스럽게 좁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문화 내에 있는 남성혐오와 페미니즘에서 주장해온 남성 중심의 사회관계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차원 역시 일정 부분 결합되는 양상을 띤다. 그 결과, 한국의 ‘랟펨’은 가부장제와 이성애 제도에서의 성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남성들에 대한 여성 대중의 불만을 포함하는 동시에 이를 ‘초과’하고 있다. 여성 대중이 가진 남성지배 사회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던 혐오 감정의 잔여 역시 없애지 못한다면, 급진적 실천의 대중성을 유지하는 것도 사회변화에 대한 구체적 전략도 세우기 어렵지 않을까.

권김현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 여성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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