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 브론즈, 120×290×275㎝, 1994. 구본주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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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를 멸시하고 일하는 사람을 천대하는 시대, 구본주(1967~2003)의 조각들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우람한 팔뚝에서 뻗어져 나온 망설임 없는 낫(혁명은 단호한 것이다, 1992), 죽창을 머리 위로 치켜든 거대한 농민(갑오농민전쟁 2, 1994), 육중한 철판 같은 현실 뒤에서 자신의 옛 꿈을 남몰래 되새겨보는 샐러리맨(배대리의 여백, 1993), 강제적 퇴출 분위기 속에서 긴장한 두 눈만 겨우 맨홀 뚜껑 위로 내놓고 있는 대머리 사내(눈칫밥 삼십 년, 1999)….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 1992.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라는 김남주 시인의 시 ‘낫’의 쌍생아 같은 작품. 단 한번에 이루어져야 하는 계급혁명에 대한 인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구본주기념사업회 제공
미술사가 언스트 곰브리치는 독일 미술가 케테 콜비츠(1867~1945)를 두고 ‘혁명의 존엄성’을 표현한 미술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발간된 <케테 콜비츠 평전>의 옮긴이 조이한·김정근은 케테 콜비츠가 자신을 “프롤레타리아의 삶만을 묘사하는 예술가”로 보는 평가에 격렬하게 이의를 제기했다고 강조한다. 콜비츠는 보편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형상 언어를 발전시키려 부단히 노력한 미술가였다는 것이다. 구본주 또한 같은 식으로 재평가할 수 있다. 특정 시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적 약자의 서사를 드러낸 조각가이기 때문이다.
구본주는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21세기 한국 미술의 주역, 참여파 386 작가, 혁명적 낭만주의자, 낭만적 리얼리스트로 일컬어져왔다. 2003년 어느 가을 새벽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엔 ‘요절 천재’로도 불린다. 고작 36살. 조각가로서 ‘손맛’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평이 나오던 때였다.
이듬해 그의 1주기를 맞아 만들었던 추모 도록이 지난 연말 <19672003 구본주를 기억함>(안녕 출판사)이라는 추모 아트북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책에는 작품 사진과 평론,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던 무렵 작별한 그를 기리는 지인들의 글들을 모아 실었다. 올해는 구본주 20주기가 되는 해다.
<배대리의 여백>, 1993.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모델.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상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해 빠른 진급으로 일찍 대리를 달았던 친구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넥타이에 구두까지 잘 차려입은 배대리의 현실은 단단하고 빈틈없는 세상이다. 지난날의 꿈을 그림자 형상으로 새겨 내면의 실존과 현실을 돌아보려 했다. 구본주기념사업회 제공
구본주는 1967년 경기도 포천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연필 깎는 칼로 모자상과 여인상을 조각하던 손재주 좋은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을 거쳐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보낸 뒤 돌연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남들보다 턱없이 짧은 기간에 입시를 준비했는데, 이때 운 좋게 조각가 류인(1956~1999)을 스승으로 만나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감과 치열한 작업 태도를 배웠다. 강렬한 리얼리즘 작품을 선보인 조각가였던 스승도 43살이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홍익대 미대에 들어간 구본주는 2학년 때인 1987년 문교부에서 주관한 전국대학미전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87항쟁 이후엔 민중미술을 접하고 ‘운동권’에 투신했다. 리얼리즘 미술 논쟁을 거듭했고, 데모도 하고, 감옥에도 잠시 다녀왔으며, 총학생회 부회장으로 선거에 나갔다. 낙선 뒤엔 작업에만 몰두했다. 포천 고향 땅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1993년 문화방송(MBC) 한국구상조각대전에 두 작품을 내 대상과 입선 양쪽을 거머쥐었다.
구본주는 무엇보다 ‘내부의 혁명’을 중시했다. 죽창을 들고 돌진하는 거대한 동학농민상 또한 역사를 표현하려는 의지였던 동시에 스스로 해방되려는 다짐의 표현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농민과 노동자의 모습을 표현하던 그의 작업은 자체의 혁명을 거듭해 샐러리맨으로 옮겨 갔다. ‘현실’을 숙제처럼 받아든 그는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시대를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다.
<노동자의 깃발은 무엇으로 지켜지는가>, 1990. 구본주기념사업회 제공
1995년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구본주는 첫번째 개인전 ‘존재와 의식전’을 열었고 1999년 서울 원서갤러리, 갤러리사비나에서 2회 개인전을 마련했다. 2002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연 ‘시대의 표정: 아버지’전에 선보인 작품은 샐러리맨이었다. 내일도 자신의 자리가 남아 있을지 불안해하며 스위치를 끄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작품의 원래 제목은 ‘아빠의 청춘’이었는데 전시 직전 <디 엔드>로 제목을 바꾸었다.
그리고 얼마 뒤 구본주는 별이 되었다. 끝까지 매달린 유작의 제목이 바로 <별이 되다>였다. 이 작품은 성인 손바닥 크기의 샐러리맨 조각 1천개가 하늘에 수놓인 은하수처럼 물결을 이뤄 장관을 연출한다. 이 중 구본주가 남긴 샐러리맨 조각은 단 2개뿐이었다. 나머지 998개는 배우자인 전미영(55) 작가와 후배, 동료들이 함께 완성했다.
<눈칫밥 삼십 년1>, 1999. 하루하루 살얼음판이던 아이엠에프 시기 샐러리맨들의 일상은 하루하루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같았다. 근무지에서 곧 사라질 자기 차례를 숨죽이며 잠시라도 피해보려 애쓰는 모습을 맨홀 뚜껑 아래에서 머리만 내놓고 눈치를 보고 있는 형상으로 긴장감 있게 표현하였다. 구본주기념사업회 제공
구본주는 학생운동 시절 민중민주(PD) 계열로, 학생미술운동의 비주류 그룹이었다. 1980년대 후반 학생미술운동이 걸개그림, 깃발, 포스터, 판화 같은 회화에 편중되었던 데도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구본주는 현장미술운동에 몸담았고, 부조리에 저항하는 동시에 사람들을 대변하고 결집시키는 미술로서 조각의 역할을 고민했다. 온순하던 그가 급진성을 갖게 된 데는 배우자이자 동료 조각가인 전미영 작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 때 만나 결혼한 전미영 작가는 구본주에 대해 “언제나 지치지 않는 영감을 주는 ‘작가들의 작가’”라고 말했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고 건강하고 멋진 작업을 끊임없이 발표하던 열정적인 천재 조각가였다.”
전 작가는 전시를 기획하고 공간을 설계하는 ‘뮤제오그라포’로 활동하면서 카페와 아트숍, 서점, 전시기획, 출판사를 아우르는 연합체인 ㈜본주르유나이티드 대표를 맡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행동주의 미술 운동을 펼치는 ‘파견미술가’ 활동에도 참여해왔다. 민중미술의 세례를 받은 이 미술가들은 대추리, 기륭전자,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콜트콜텍 등 파업·농성 현장과 연대했다. 삼성반올림 반도체노동자상,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상, 마사회 문중원 열사상을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적폐청산 집회와 철거민들의 농성에도 힘을 보탰다.
구본주의 작품에는 남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특히 대도시 화이트칼라 남성들의 심사를 대변하는 구본주의 샐러리맨 연작들은 신자유주의 승자독식 시대의 공식이 차곡차곡 만들어지던 때, 소모품이 되어가는 도시 노동자들의 비애를 대변했다. 기린처럼 길게 빠진 목과 세로로 쭈욱 늘어난 얼굴을 가진 샐러리맨들은 모딜리아니 작품 속 여성들처럼 낭만적이고 시적인 기다림의 이미지라기보다 치열한 생존경쟁에 진이 빠진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쓰며 ‘개싸움’을 하는 남자들, 그것도 못해 슬며시 뒤로 숨는 비겁하고 슬픈 남자들의 얼굴에는 애잔함과 해학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여성을 전혀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미영 작가는 “구본주의 대표작인 <파업 1>, <파업 3>을 보면 전투경찰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여대생, 농성을 지원하는 어머니, 아내들을 표현하고 있다. 작고하기 직전에 제작한 <부부 2>는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는 동반자로서 부부를 형상화했다”고 말했다. 2003년 만화웹진 <악진>과 한 인터뷰에서 구본주는 “내 최후의 목표는 인간성 해방”이라며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는 여성만 피해자가 아니라 남성도 피해자”라고 말했다. 자기 혁명을 중시한 그가 생존했다면 어디까지 작품 세계를 확장해나갔을지 궁금한 대목이다.
<별이 되다>, 2003. 구본주기념사업회 제공
2003년 9월29일 새벽 5시께 경기도 포천에서 길을 걷던 구본주는 자동차에 치여 숨졌다. 가해자 차량 보험회사 쪽은 구 작가를 무직자로 상정해, 도시일용노임을 적용해 예술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유가족과 동료 예술가들은 소송을 진행했고 동료 예술가들은 1인시위를 거듭했다. 원심 판결은 예술인 경력 5~9년을 인정하고 정년 65살 기준으로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보험회사는 예술인 경력을 무시하고 도시일용노임에 준하되, 정년도 60살로 낮춰 배상하겠다면서 항소했던 것이다. 결국 원심 판결을 따르기로 합의하며 일부 승소 판결로 결론이 났다.
전미영 작가는 “이윤만을 추구한 보험금의 산정 방법이 너무나도 불순하고 무례했다. 수많은 동료 예술가들이 자신의 일처럼 공감해주었고 예술가가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어 역사적으로 기록됐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구본주의 죽음은 직업인으로서 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환기시켰고 2011년 영화감독 최고은의 죽음과 함께 2012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탄생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너무 일찍 별이 된 구본주, 하지만 그는 동시에 누군가의 길잡이 별이 되었다.
제주시 산지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2 전관에서는 구본주 개인전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 과장의 이야기: 아빠 왔다’가 상설 전시 중이다. 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힘겨운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많은 에너지와 영감이 깃들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사진 구본주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