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 없음’을 뜻하는 아나키의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아나키즘은 “권력 있으면 자유 없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것은 1921년 표트르 크로폿킨의 장례에 사용된 검은색 만장(挽章)에 쓰인 다홍색 만사(挽詞)이기도 했다. 평생 권력 없는 자유를 추구한 크로폿킨의 만장에 꼭 맞는 말이었다. 어떤 권력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는 모든 권력에 반대하고 오로지 자유를 추구했다. 그 자유란 모두가 자유롭기에 당연히 평등한 모두가 함께 자치하며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크로폿킨의 만장은 죽은 이의 관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출세 자리, 권력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뒷받침하는 학력이나 경력 등에 대한 칭송과 혈연, 지연, 학연 등 온갖 연줄 따위를 적는 한국식의 친권력 만장과는 정반대인 반권력 만장이었다. 한국에서는 그것을 한때의 깃발만이 아니라 돌덩이에도 쇠망치로 깊이 새겨 자연까지 망친다. 심지어 금수강산 수십 척의 큰 바위들도 그런 권력자들의 영원한 끌 낙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그 이름은 꼭 비석이나 바위에 새겨야 하는 것이 한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고 전통이다.
그나마 깃발로 한순간 나부끼다가 없어져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나키즘의 상징이 장례의 만장 같은 검정이라는 점에 나는 항상 불만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지배자 없이 우리 모두 자유롭게 자치하며 자연 속에 살려고 하는 아나키즘은 검정처럼 죽음이나 어둠이나 끝, 부정이나 허무나 절망, 흐림이나 닫힘이나 막힘이 아니라, 삶과 빛과 시작, 긍정과 충만과 희망, 밝음과 맑음과 열림의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정이 아니라 푸름이 어울린다. 그런 푸른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가 크로폿킨이다. 푸른 하늘, 푸른 강, 푸른 들녘, 그리고 푸른 희망의 아나키즘! 나는 지금 그런 푸름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추악한 황사의 세상에서. 이 더러운 코로나 병균의 세계에서. 죽은 지 올해 꼭 백년이 지난 크로폿킨의 혼백을 불러 전염병을 쫓아내는 푸닥거리라도 하는 심정으로.
내가 푸름의 사람으로 보는 크로폿킨은 19세기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운동가, 철학자라고 우리의 위키백과는 그를 소개하지만,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는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혁명가,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가, 정치학자, 지리학자, 아나코코뮤니즘(코뮤니즘을 한국에서는 흔히 공산주의라고 번역하지만, 코뮌은 ‘지역 자치체’를 가리키는 말이니 차라리 지역자치주의라고 함이 옳다는 생각도 든다)을 옹호한 철학자, 행동가, 에세이스트, 조사가, 작가라고 한다.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는 없어도, 좀 더 다양한 편인 위키피디아 쪽의 소개가 더 마음에 든다. 이렇게 많은 직업(행동가나 조사가라는 직업은 우리에게 생경하지만)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지만, 거기에 생물학자나 지질학자 또는 과학자를 더해도 무방하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상호부조론>은 진화의 원리에는 생존경쟁만이 아니라 상호협력이라는 측면도 있다고 주장한 생물학 책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그는 지질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과학 전반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였다. 그야말로 과학자 아나키스트였다. 아나키스트라고 하면 폭력주의자나 공상가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의외로 과학자 중에 아나키스트가 많다. 물론 아나키스트가 아닌 과학자는 더 많다.
크로폿킨은 그야말로 르네상스적 인간 또는 전인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박식가니 만능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표현보다는 창조적 인간, 즉 창조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다. 소위 전공이니 전문이라고 하는 하나의 영역에서 미리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기계적으로 사는 전문가 바보가 아니라, 학문의 경계를 넘어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으로 끊임없이 통합적이고 연계적인 사유를 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의력의 인간이다. 크로폿킨 말고도 그런 르네상스적 창조인인 인민 아나키스트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신채호다.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이고 혁명가이며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며 소설가다. 그의 독립운동과 달리 아나키즘을 일시적 일탈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도리어 독립운동을 아나키즘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제국이라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 독립운동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은 식민지 아나키즘의 제일 과제다. 크로폿킨에게도 차르 치하의 러시아 민중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의 아나키즘운동에서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신채호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크로폿킨을 존경하고 그의 사상과 행동을 따랐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신채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좋아하듯이 크로폿킨도 좋아한다.
지금 한국인은 대부분 크로폿킨을 모르지만,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의 차원에서 그만큼 한국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없다. 즉 카를 마르크스보다 그 영향력은 더 컸다. 그는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지리학, 생물학(진화론), 프랑스혁명사, 러시아문학사 등 여러 방면에서 충격을 주었고,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한국에서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크로폿킨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1920년대에는 그의 <청년에게 고함>이 청년들은 물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크로폿킨은 반항아, 이단자, 방랑자, 망명인, 혁명가 등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아나키스트 크로폿킨이다.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금수저 중의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고통받는 인류를 위한다는 대의로 20살에 모든 출셋길을 버리고 사람들이 유형지로 갇히는 시베리아로 스스로 떠났고, 그 뒤로 이단과 방랑, 망명과 혁명, 투쟁과 빈곤의 흙수저로 살다가 79살로 죽었다. 평생을 여러 정부 당국자는 물론 이웃에게도 감시와 핍박, 탄압과 멸시로 정말 힘들게 투쟁 속에서 살았을 텐데 협력을 강조했으니,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사람 사이의 사소한 불편에도 인간성을 믿지 못하는 나 같은 이기적 속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이타적 인간이기에 나는 그의 삶에, 그리고 생각에 감탄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나이인 69살의 크로폿킨은 망명지인 영국의 시골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외롭게 살면서 평생의 숙원이었던 상호협력에 관한 연구에 집중했다. 그리고 6년 뒤인 1917년, 75살이었을 때 러시아혁명이 터져 41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정부의 입각 권유를 거부하고 시골에 묻히는 내부 망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저서인 <윤리학> 집필에 몰두하다가 4년 뒤에 죽었다. 레닌 정부는 국장을 제의했지만 가족은 이를 거부했다. 그 뒤 러시아의 아나키즘은 끝났고 그의 이름은 잊혔지만, 그는 우리의 신채호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다.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그러니 서로 공평하게 나누고 도우며 살자는 어린 시절의 깨달음을 평생 한순간도 잊지 않고 실천한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 크로폿킨이 갖는 의미, 그가 우리에게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소용이나 효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등이 소개되면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또는 ‘경쟁과 협력’에 대한 논의가 생겨났지만, 2012년 번역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리베카 솔닛이 이타주의의 전형으로 크로폿킨을 다루면서, 그리고 10년도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생기면서 크로폿킨은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코로나19와 같은 비극적인 재난이 생긴 이유는 과도한 경쟁이고, 그것을 극복할 길은 경쟁이 아닌 협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협력이 좋다고 해도 인간 세상은 경쟁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로폿킨도 그 점을 잘 알았다. 경쟁만이 살 길이 아니라고 보았기에, 아니 경쟁만으로는 죽는 것이기에 협력을 강조했다. 아나키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지배자 없는 세상을 주장해도 지배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조금이라도 권력의 지배를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 박홍규: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