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골목에서 제일 많이 보이는 표현은 단연 ‘원조’다. 원조 아구찜, 원조 매운 갈비찜, 원조 즉석떡볶이 등등 저마다 자신이 원조임을 외치면서도 굳이 다른 경쟁자와 시시비비를 가리지는 않는다. 수많은 원조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다. 심지어 엉뚱한 지역에서 원조 타령을 하는 식당도 많다. 신사동에 원조 마산 아구찜이 수두룩하고 신림동에도 신의주, 병천 아우내, 속초 아바이 순대 원조집들이 널렸다. 가요계도 원조 사랑이 지극하다. 원조 홍대여신, 원조 아이돌, 원조 걸그룹 등등 원조가 넘쳐난다.
그렇다면 힙합의 원조는 누구일까? 본고장인 미국이라면 나는 런 디엠시(Run DMC)나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엔더블유에이(N.W.A) 등등 여러 이름을 대겠지만, 우리 가요계로 한정 짓는다면 단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오늘 칼럼의 주인공인 현진영이다.
힙합이라고 하면 랩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많은데 원래 힙합은 하나의 문화, 특히 파티 문화를 통칭한다. 반복되는 비트 위에 자유롭게 춤추고 노랫말을 외치며 노는 문화. 현진영 역시 그랬다. 그는 15살 때부터 비보이 팀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고 스무살이 되기 전에 이태원 등지에서는 춤 잘 추고 잘 노는 아이로 소문났다. 박남정 무대에서 춤을 추곤 했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들인 이주노와 양현석도 이태원에서 놀던 시기가 현진영과 일정 부분 겹친다.
춤 잘 추는 아이 현진영을 가수로 만들어 준 사람은 놀랍게도 현재 에스엠엔터테인먼트의 회장 이수만이다. 1988년에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트레이닝을 받았고 1990년 ‘현진영과 와와’라는 이름으로 데뷔 앨범 <뉴 댄스>(New Dance)를 발매한다. 앨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 힙합음악을 소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진영 옆에서 춤을 추는 2인조 백댄서 팀인 ‘와와’의 1기 멤버는 구준엽과 강원래, 2기는 나중에 듀스가 된 이현도와 김성재, 3기에는 지누션의 션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힙합음악에 현진영이 원조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사실 듀스나 지누션을 우리나라 힙합의 원조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데뷔 앨범 중에서 돋보이는 노래는 ‘슬픈 마네킹’이다. 최초의 우리말 랩이 이 노래 중간에 등장한다. 또 처음으로 헤드셋형 마이크를 끼고 방송 무대에 올랐는데 이런 시도들은 얼마 안 있어 ‘서태지와 아이들’에 의해 본격화된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 헤드셋을 끼고 랩을 하는 댄스가수들이 가요계의 표준으로 정착된다.
1992년에 발표한 두번째 앨범은 가요사적인 의미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 유명한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바로 이 앨범에 있다.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두달 넘게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현진영 고 진영 고!’라는 후렴구는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힙합 라임으로 남아 있다. 회식 자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나이에 따라 바로 힙합아재 인증 혹은 음악 좀 아는 젊은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안 부른다.
후배 그룹인 서태지와 아이들이 판을 싹쓸이할 때도 현진영은 건재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원조였고 아직 젊었으니까. 실제로 이주노나 양현석보다 어리고 서태지보다 딱 한살 많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경쟁자가 아니라 마약이었다. 겨우 스무살의 나이에 이미 대마초 흡입 혐의로 처벌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마약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필로폰까지 손을 대면서 경찰서를 밥 먹듯이 들락거렸고 실질적으로 가요계에서 퇴출되었다.
그의 방황은 길고도 길었다. 마약중독과 수감생활, 가난과 고독, 비난과 비웃음, 끝없는 실패와 절망…. 방송계 종사자인 필자가 보기에 버텨낸 게 정말 기적이다. 그는 세기가 바뀌고 2000년으로 넘어와서야 마약 후유증, 우울증, 인격장애 등등 복합적인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2002년 4집 발매와 동시에 순천향대학교병원 정신병동에 스스로 입원하는 가요계 초유의 이벤트도 벌였다. 그 후로 자신의 치료는 물론이고 마약 퇴치를 위한 공익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이제는 오히려 재활과 부활의 이미지로 활동하는 드문 케이스가 되었다. 요즘 출연하는 팟캐스트에서는 종종 자칭 타칭 약 전문가로 활약하기도 하는데 정말 빵빵 터진다.
현진영이라는 인물은 한국 힙합의 원조이기도 하고 가요계 흐름의 교차로이기도 하다. 그를 알면 90년대 가요계는 물론이고 요즘 우리 가요계의 족보를 꿰뚫을 수 있다. 그는 80년대 최고의 댄스가수였던 박남정의 백댄서로서 전 시대를 계승하는 동시에 새 시대의 흐름인 힙합을 체화한 인물이었다. 이수만이 최초로 캐스팅해서 키운 가수였으며, 현재 이수만 회장과 가요계의 삼국지를 형성하는 양현석과 박진영의 어린 시절 함께 이태원을 주름잡던 춤꾼이었다. 그의 백댄서로 활동했던 와와 멤버들은 무려 클론과 듀스, 지누션이 되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서글퍼진다.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다 거물이 되었는데 오직 그만 과거의 영광밖에 없는 듯하여. 그러나 가수,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와 별개로 절망의 바닥을 치고 기적적으로 부활해 제2의 인생을 사는 인간 현진영은 행복할 듯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다음 칼럼에서는 오늘 이 글에서 언급된 또 한명의 전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기대하시길.
에스비에스 피디, 정치쇼 진행자 이재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