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아버지는? 바흐. 발명왕은? 에디슨. 고소왕은? 강용석. 팝의 황제는? 그렇다. 마이클 잭슨이 오늘 칼럼의 주인공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아티스트였으며 미국이라는 나라의 온갖 특질이 투영된 문제적 인물이었다. 책을 써도 몇 권은 거뜬히 나올 그의 인생을 2회에 걸쳐 간단히 소개할까 한다.
팝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아는 사실. 마이클 잭슨은 어릴 때부터 친형제들과 잭슨 파이브라는 그룹으로 활동했다. 파이브라는 숫자 때문에 5형제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10남매 중에서 추려진 5명이다. 아빠의 지휘 아래 형제들과 함께 행복하게 노래 부르는 어린 마이클의 모습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마이클은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당했고 영혼에 큰 상처를 입었다. 2003년에는 아버지가 직접 그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한 바 있다. 어쨌든 잭슨 파이브는 팝 역사상 가장 성공한 패밀리 밴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평론가들도 입을 모아 ‘흑인 비틀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보이밴드’ 등등 찬사를 보냈고 빌보드 차트 1위 곡도 여럿이다.
그조차도 마이클 잭슨의 재능을 다 담기에는 부족했다. 소속 레코드사와 갈등을 겪은 뒤 소속사를 바꾸는 과정에서 마이클은 비즈니스 면에서도 음악적인 면에서도 크게 성장한다. 작사·작곡·프로듀싱 능력도 키운 뒤, 운명의 단짝 퀸시 존스를 만난다. 뛰어난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는 마이클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의 솔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렇게 탄생한 음반이 1집 <오프 더 월>(1979년)이다. 너무나도 세련된 디스코 음악을 담은 데뷔 음반은 ‘빌보드 차트’ 1위를 두곡이나 탄생시키며 마이클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이듬해인 1980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총 3관왕을 차지한 상복은 덤이었다.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없었다. 1982년 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고 아마 앞으로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을 역사적 음반이 세상에 나온다. 그 유명한 <스릴러>. 공식 기록은 6500만장 이상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판매량은 1억장을 거뜬히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기네스북에도 기록이 등재되어 있다. 빌보드 음반 차트에서 무려 열달 가까이 1위를 차지했고, 싱글로 발매된 노래들은 그야말로 팝 시장을 초토화했다. 뒤로 미끄러지듯이 걸어가는 ‘문워크’ 춤을 유행시킨 ‘빌리 진’,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최초의 뮤직비디오로도 유명한 ‘스릴러’,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에드워드 밴 헤일런과 협업하며 록과 솔(Soul), 디스코 장르의 경계를 허문 ‘비트 잇’ 등 혁명적인 영역을 개척했던 명곡들이 모두 하나의 음반에 있다.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도 예스럽지도 않은 불멸의 생명력을 지녔다. 미국 음반 협회에서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리스트’ 3위에 올라 있으나 1위라고 해도 의아하지 않은 걸작이다.
음반의 성공뿐 아니라 공연, 광고, 각종 자선 캠페인 등등 가수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마이클은 최고의 활약을 보인다. 가수로서 커리어로 보자면 절반도 오지 않았던 이때 이미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1987년에 발표한 새 음반 <배드> 역시 팝 시장을 쓸어버렸다. 빌보드 음반 차트 1위는 물론이고 무려 5개의 싱글이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괴력을 과시했다. 전작인 <스릴러>와 함께 단 2개의 음반만으로 마이클 잭슨은 8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로 기록된다. 이 음반에서는 모든 노래의 프로듀싱에 참여했고 11곡 중 9곡을 혼자서 만들어냄으로써 위대한 가수, 위대한 춤꾼을 넘어선 아티스트의 경지에 올랐다. 1991년에 발표한 음반 <데인저러스>도 내용과 흥행 면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다.
인기나 영향력으로 치자면 이 시절이 가장 뜨거웠다고 할 수 있겠다. 국빈 대접을 받으며 세계를 누볐고,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자선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탄생시켰으며,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을 때 세운 시청률 47.9%는 아직까지도 미국 토크쇼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로 남아 있다. 캘리포니아에 집을 지었는데, 부지가 300만평이 넘었다. 300평이 아니라 300만평. 그는 이 집을 ‘네버랜드’라고 부르며 놀이동산과 동물원, 영화관도 만들었다. 뭐, 대략만 적어도 이 정도다. 요즘 외국 스타들과 그 시절 마이클 잭슨을 비교하자면 음…, 산들바람과 태풍을 비교하는 격이랄까?
인기가 많았던 만큼 그를 둘러싼 루머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루머가 백인이 되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고 피부를 탈색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그의 피부색이 하얗게 변한 것은 백반증이라는 질환 때문이었다. 성전환 수술을 했다거나 외계인이라는 소문을 믿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련의 루머들로 마이클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리나 1993년 여름. 끔찍한 뉴스가 전 세계를, 대한민국의 고3 학생이었던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마이클 잭슨이 어린아이를 성추행했단다. 이 뉴스는 전혀 웃기지 않았다. <다음화에 계속>
에스비에스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