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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으로 우리나라를 보라…그것이 내 사진론”

등록 2013-01-13 19:42수정 2013-01-14 16:09

정년퇴임 이래 14년째 매일 아침 출근하는 서울 역삼동 ‘선방’에서 좌선 명상 자세로 앉은 육명심씨. 별자리를 보며 우주를 유영하고자 걸어 놓은 패널에 새겨진 숫자 ‘1932~2020’은 스스로 정해놓은 자신의 생몰 연대다. 일찍이 대학 시절 인연을 맺은 다석 유영모 선생을 본받아, 쉰살 때부터 쓰고 있는 일기장에 역순으로 살아 있을 날을 표시하고 있다는 그는 최근 마지막날을 ‘2022년’ 90살까지로 늘렸다.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정년퇴임 이래 14년째 매일 아침 출근하는 서울 역삼동 ‘선방’에서 좌선 명상 자세로 앉은 육명심씨. 별자리를 보며 우주를 유영하고자 걸어 놓은 패널에 새겨진 숫자 ‘1932~2020’은 스스로 정해놓은 자신의 생몰 연대다. 일찍이 대학 시절 인연을 맺은 다석 유영모 선생을 본받아, 쉰살 때부터 쓰고 있는 일기장에 역순으로 살아 있을 날을 표시하고 있다는 그는 최근 마지막날을 ‘2022년’ 90살까지로 늘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1세대 사진교육가’ 육명심씨

‘3교수 시대’, 1970년대 이래 30년간 한국 사진계를 구분지어 일컫는 말이다. 신구대, 서라벌예대와 통합된 중앙대, 서울예대로 이어진 사진학과 개설과 현대사진 사조의 유입을 이끈 육명심·홍순태·한정식 교수가 그들이다. 모두 명문대를 나와 고교 교사 시절 사진에 입문한 공통점을 지닌 이들은 ‘한국 사진교육 1세대’로 강단을 은퇴한 지금도 사진계를 이끌고 있다.

육명심. 그는 1932년 대전생으로 ‘3교수’ 가운데 맏형 격이다. 72년 서라벌예대 전임강사를 거쳐 75년 신구대와 81년 서울예대 사진학과 창설 교수였으니 사실상 국내 사진교육의 밑돌을 놓은 주역인 셈이다.

<육명심 사진집-예술가의 초상>. 그의 이름이 낯선 사진의 문외한이라면, 2011년 문화계 안팎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현대 한국의 대표 예술가 70명의 사진을 떠올리면 된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시인 서정주, 작품을 쓰기 전 기도하는 시인 박두진, 무뚝뚝하게 쏘아보고 서 있는 영화감독 김기창, 벌거벗은 채 춤추듯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광 스님, 작고 3개월 전의 작가 박완서…, 70년대부터 경계를 넘어 40년간 지속적으로 교류해온 당대 인물들의 진솔한 모습은 그의 편집광이 빚어낸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육명심-이것은 사진이다>. 그가 지난해 말 팔순을 맞아 사진인생 50년을 정리한 회고록의 제목이다. 마치 자신의 삶 자체가 사진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만큼 당당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는 한 여인을 향한 일편단심 순정처럼, 한번 정한 사진의 주제나 대상에 집요하게 빠져드는 ‘편집광’ 기질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육명심(陸明心), 성도 그렇고 이름도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 사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일찍이 출가했던 선친이 가문의 대가 끊기면 안 된다는 집안의 성화에 못 이겨 잠깐 돌아와 내가 태어나자 ‘이름’만 써놓고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자라서 기억하는 아버지의 유품은 목탁·회중시계·표주박 셋뿐이었는데 그나마 어느 틈엔가 다 사라져 버렸다. 훗날 한 시인이 풀어주길, 불교에서 ‘명심성불’은 마음이 아니라 근본을 밝히라는 뜻이라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스님이 되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불교 신앙을 지니게 된 것 같다.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17살 무렵에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52년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신학대에 입학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나 나름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1학년 때 사실상 파문을 당했고, 55년 연세대 영문학과에 다시 입학한 것도 실은 미국의 신학대학원으로 유학할 준비를 할 목적이었다. 2년 마치고 학보병으로 입대해서는 ‘연애 사목’에 바쁜 군목을 대신해 설교를 할 정도로 기독교에 심취했었다.”

-이력에서 밝힌 20대 초기 정신적인 방황의 이유가 바로 신앙 때문인가?

“그런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방황을 끝내고 다시 불교로 귀의하게 된 계기는 이화여대 교목을 지낸 김흥호 선생이시다. 연세대 3학년에 복학해서 ‘동양철학’을 청강했는데 마침 김 선생께서 출강을 나와 ‘논어’와 ‘노자·장자’를 강의했다. 철학과 학생들보다 더 열심인 내가 눈에 띄었는지 60년 졸업하던 해 어느날 나를 배꽃이 환하게 핀 세검정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 허름한 집에 달마 같은 큰어른이 계셨다. 바로 다석 유영모 선생이셨다. 그때부터 다석의 선불교 강의를 들으며 나란 존재의 뿌리와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영상 사진’의 뿌리도 바로 선불교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사진에 입문한 것은 언제인가?

“이번에 회고록을 쓰면서 되짚어보니 내 사진인생에 ‘3번의 인연’이 떠올랐다. 그 첫번째는 바로 아내(이명희)다. 고교 영어교사를 하던 64년 서른이 훌쩍 넘어 결혼을 했는데, 신혼여행 때 아내가 가져온 카메라로 삼각대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으며 조작법을 배운 게 첫 인연이었다. 아내는 일찍이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 이동춘 화백으로부터 사진을 배워 제법 실력 있는 ‘선생’이었다. 이듬해 여름 신록촬영대회에 재미삼아 참가했는데 ‘1점 가작과 2점 입선’을 했다. 사진에 흥미를 느껴 내친김에 66년 ‘동아국제사진살롱’ 공모전에 출품했다. 국내 첫 국제 규모 공모전이어서 전국의 고수들이 참가했다는데 ‘생짜’ 아마추어인 내가 덜컥 대전에서는 유일하게 입선을 했다. 그게 사진가로 등단한 두번째 인연이다.”

외국 유명작가·유행사조 봐도
사진은 문화속에서 의미 지녀
사람이든 사물이든 눈빛 통하고
마음 열리는 순간 찍으려 해

-사진작가 이름으로 살게 된 마지막 세번째 인연이 궁금하다.

“66년 마침 배재고에 자리가 생겨 서울로 올라온 뒤 사진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며 혼자 사진 공부를 했다. 휴일이면 명동의 옛 중국대사관 뒷골목 외국서적 전문점부터 청계천 헌책방거리까지 섭렵하며 사진 관련 책들을 찾아보는 게 낙이었다. 그때마다 동선이 같아 자주 얼굴을 부딪치면서 교유하게 된 이가 박필호 선생이었다.(그는 1920년대 종로에서 연우사진관을 운영한 우리나라 ‘초상사진의 원조’로, 최초의 사진교육기관인 YMCA 사진과를 후원하고 경성사진학강습원을 개설한 사진교육 선구자다.) 그가 72년 전문대에서 4년제로 승격한 신구대의 사진학과 개설을 맡았다면서 내게 ‘사진의 역사’ 강의를 맡겼다. 그게 사진 강단 40년의 시작이었다.”

-평소 ‘내 사진 스승은 아내’라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던데?

“아내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놀리지만, 내게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구대 강의 제안을 받고 망설일 때, 아내가 “당신은 할 수 있다”고 결단을 내려줬다. 실은 그때까지도 나 스스로는 사진보다 시에 더 끌리고 있었다. 연세대 2학년 때 시인 박두진 선생의 ‘교양 국어’ 강의 시간에 과제로 시를 써냈는데, 선생께서 나도 모르게 ‘연세문학상’ 공모에 출품해 덜컥 당선이 됐다. 그때부터 선생은 내게 시인이 되라고 권했다. 72년 ‘예술가의 초상’ 작업을 구상한 초기부터 인연을 맺은 서정주 시인도 ‘육대인’이라 부르며 여러차례 등단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카메라 3대를 선물하며 말했다. “나는 오늘부터 시도 그림도 그만두겠으니, 당신은 오로지 사진에만 몰두해라.” 아내는 이미 국전에 4번이나 입선한 화가이자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했으나 그때부터 교사로 일하며 철저하게 내 뒷바라지를 해줬다.”

출가한 아버지 영향에 불교 귀의
한민족 정신 뿌리 ‘샤먼’에도 심취
미당이 시인 등단하라 했지만
‘내 사진의 스승’ 아내 말에 한길

-혹시 시와 시인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시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1년 나란히 묶어 낸 작품집 <예술가의 초상>과 <백민> 그리고 지난해 정리해 낸 <영상사진 1966~1978>까지 작품 설명을 모두 직접 썼는데, 그게 모두 내게는 시다. ‘그는 물방울만 그리는 물방울 화가이다. 그 물방울은 바로 다름 아닌 아침 이슬이리라. 새 아침이 동트면서 광활한 우주공간을 관통하여 지상의 풀잎 끝에 맺힌 이슬 속의 영롱한 햇살. 그의 이슬 한 방울 속에는 우주의 신비를 꿰뚫어본 비밀이 숨어 있다.(서양화가 김창열)’ 시를 흔히 사색과 마음의 정수를 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듯, 나는 사진의 주제를 사색의 화두로 삼고자 했고, 인물이든 자연이든 장승이든 피사체와 눈빛이 통하고 마음이 열리는 순간을 포착해 찍고자 했다.”

-‘마음으로 찍은 사진’의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성철 큰스님을 찍으러 간 적이 있었다. 83년 1월7일,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해인사 백련암으로 찾아갔더니 첫마디로 “사진? 뭐하러 찍을라카나?”라고 물었다. 그래서 “부처님 시절에 사진술을 알았다면 아마도 불상은 필요없었겠지요”라고 답했더니 껄껄 웃으시며 허락을 하셨다. 그런데 그날 스님의 눈과 얼굴이 유난히 부어 있어서, 욕심을 누르며 한 컷도 찍지 않았다. 봄에 부처님오신날에 다시 오라고 하셨는데 결국은 안 찍었다. 내 평생에 그렇게 산처럼 압도하는 기운을 지닌 큰 인물은 처음이었다. 그 기운이 내 마음에 그대로 찍혔으니, 지워지지 않는 가장 소중한 사진이다.”

성철 스님 허락 어렵게 받고도
결국 욕심 누르며 안 찍었지만
산처럼 압도하는 그 큰 기운
‘마음으로 찍은 사진’으로 남아

-학생들 사이에선 ‘까칠한 선생’으로 소문났던데?

“그럴 것이다. 나는 사진 기법이나 이론에 앞서,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몰입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수업시간이 되면 강의실 문을 잠갔는데, 일상적인 약속부터 철저하게 지키는 습관을 심어주고자 했다. 처음 참가한 사진대회에서 운좋게 당선된 이래 한동안 내 사진의 특징을 스스로 따져봤는데, ‘다르게 보고 다르게 찍기’였다. 본격적으로 사진사 강의를 하게 되면서 외국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유행하는 사조를 연구해본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의미있는 사진은 그들의 삶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일 뿐 우리와 같을 수가 없었다. 회고록 마지막 장에 썼듯 ‘우리는 우리 눈으로 우리나라를 보라’는 게 내 사진론이다.”

-분신으로까지 불리는 사진작가 이갑철·최광호씨에게 ‘어떤 스승이냐’고 물었더니 사진만이 아니라 냉철한 삶의 자세를 배운다고들 답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나를 아는 셈이다. 늘 ‘나를 잡아먹어라’ ‘지뢰를 피해 가듯 유명 작가들을 피해 가야 산다’고 학생들에게 얘기한다. 남을 흉내내거나 따르지 말고 자기만의 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그래야 ‘이것만은 내가 최고’라는 예술가로서 자신감과 자부심이 생긴다. 누구누구 사단이니 무슨 학파니 무리짓는 걸 체질적으로 못 견디기도 한다. 그래서 나한테는 수제자나 애제자가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나를 잡아먹는, 진짜 제자를 기다리고 있다.”

제자들이 부러워하는 직관·혜안
‘독고’ 기질과 오랜 명상수행 덕
작은 오피스텔을 ‘선방’ 삼아 출가
다음 생엔 스님으로 태어나고파

-‘우리 것’ ‘우리 눈’이라는 사진론에 맞춘 자신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특정한 작품보다는 그동안 연대순으로 변화해온 내 사진의 주제로 설명할 수 있다. 70년대부터 시작한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그들의 내면세계를 꿰뚫어 허울을 벗은 인간 본모습을 찾고자 했다. ‘감히 똥 누는 자세로 찍었다’며 문단 일부에서 비난을 했던 미당의 사진 같은. 80년대 작업인 <백민>은 어느날 영정사진에서 발견한 ‘눈맞춤의 비밀’로 건져낸 것들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눈맞춤을 통해 서로 교감을 하게 되면 그만의 기나 혼을 느낄 수 있었다. 흔히 내 대표작으로 쳐주는 ‘여자 무당’(동해안 별신굿의 대표 무당인 강릉의 박용녀 할머니)은 보통사람들은 무서워서 도망가는 눈빛 아닌가. 90년대 들어 빠져든 <장승>은 우리 것 3부작의 마지막 편인데 문득 ‘장승이 아니라 나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안의 잠재의식을 찍고 있는 듯한 신비한 경험을 했다.”

-대표 작품집과 회고록으로 팔십 인생을 정리했는데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은?

“<백민>은 물론이고 83년 제주도 해변의 모래찜에서 우연히 죽음의 모습을 포착한 <검은 모살뜸>과 <장승> 시리즈를 통해 내 의식의 뿌리이자 우리 한민족의 정신이 ‘샤먼’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 원류를 찾아 지금까지 10번 가까이 티베트와 히말라야 기행을 해왔다. 1000통의 필름에 담겨 있는데 아직도 미흡한 느낌이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다녀볼 참이다.”

-가까운 제자들에게 물으니, 한결같이 ‘선생님의 직관과 혜안’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어떤 연유일까?

“내 장점으로 봐준다니 다행스럽다. 아마도 타고난 ‘독고’(아웃사이더) 기질과 오랜 명상수행 덕분이지 싶다. 99년 정년퇴임을 한 뒤부터 아내가 작업실로 마련해준 역삼동의 작은 오피스텔을 ‘선방’ 삼아 출가를 했다. 스님들처럼 매일 새벽 2시55분 일어나 3시부터 1시간씩 예불하듯 명상을 한 뒤 집 근처 양재천을 40분 정도 산책한다. 일요일만 빼고 아침 8시 이전에 선방에 도착해 12시까지 3시간 동안 혼자 좌선을 한다. 지금껏 선방의 냉난방은 전혀 않는다. 혼자 명상에 잠기다 보면 ‘지혜의 문’이 열리듯 나 자신이 열리고 인간 존재를 넘은 세계가 보인다. 무당의 신기처럼 ‘임계의식’을 경험하기도 한다. 다음 생이 있다면 ‘스님’으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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