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 이래 14년째 매일 아침 출근하는 서울 역삼동 ‘선방’에서 좌선 명상 자세로 앉은 육명심씨. 별자리를 보며 우주를 유영하고자 걸어 놓은 패널에 새겨진 숫자 ‘1932~2020’은 스스로 정해놓은 자신의 생몰 연대다. 일찍이 대학 시절 인연을 맺은 다석 유영모 선생을 본받아, 쉰살 때부터 쓰고 있는 일기장에 역순으로 살아 있을 날을 표시하고 있다는 그는 최근 마지막날을 ‘2022년’ 90살까지로 늘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1세대 사진교육가’ 육명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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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문화속에서 의미 지녀
사람이든 사물이든 눈빛 통하고
마음 열리는 순간 찍으려 해 -사진작가 이름으로 살게 된 마지막 세번째 인연이 궁금하다. “66년 마침 배재고에 자리가 생겨 서울로 올라온 뒤 사진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며 혼자 사진 공부를 했다. 휴일이면 명동의 옛 중국대사관 뒷골목 외국서적 전문점부터 청계천 헌책방거리까지 섭렵하며 사진 관련 책들을 찾아보는 게 낙이었다. 그때마다 동선이 같아 자주 얼굴을 부딪치면서 교유하게 된 이가 박필호 선생이었다.(그는 1920년대 종로에서 연우사진관을 운영한 우리나라 ‘초상사진의 원조’로, 최초의 사진교육기관인 YMCA 사진과를 후원하고 경성사진학강습원을 개설한 사진교육 선구자다.) 그가 72년 전문대에서 4년제로 승격한 신구대의 사진학과 개설을 맡았다면서 내게 ‘사진의 역사’ 강의를 맡겼다. 그게 사진 강단 40년의 시작이었다.” -평소 ‘내 사진 스승은 아내’라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던데? “아내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놀리지만, 내게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구대 강의 제안을 받고 망설일 때, 아내가 “당신은 할 수 있다”고 결단을 내려줬다. 실은 그때까지도 나 스스로는 사진보다 시에 더 끌리고 있었다. 연세대 2학년 때 시인 박두진 선생의 ‘교양 국어’ 강의 시간에 과제로 시를 써냈는데, 선생께서 나도 모르게 ‘연세문학상’ 공모에 출품해 덜컥 당선이 됐다. 그때부터 선생은 내게 시인이 되라고 권했다. 72년 ‘예술가의 초상’ 작업을 구상한 초기부터 인연을 맺은 서정주 시인도 ‘육대인’이라 부르며 여러차례 등단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카메라 3대를 선물하며 말했다. “나는 오늘부터 시도 그림도 그만두겠으니, 당신은 오로지 사진에만 몰두해라.” 아내는 이미 국전에 4번이나 입선한 화가이자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했으나 그때부터 교사로 일하며 철저하게 내 뒷바라지를 해줬다.” 출가한 아버지 영향에 불교 귀의
한민족 정신 뿌리 ‘샤먼’에도 심취
미당이 시인 등단하라 했지만
‘내 사진의 스승’ 아내 말에 한길 -혹시 시와 시인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시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1년 나란히 묶어 낸 작품집 <예술가의 초상>과 <백민> 그리고 지난해 정리해 낸 <영상사진 1966~1978>까지 작품 설명을 모두 직접 썼는데, 그게 모두 내게는 시다. ‘그는 물방울만 그리는 물방울 화가이다. 그 물방울은 바로 다름 아닌 아침 이슬이리라. 새 아침이 동트면서 광활한 우주공간을 관통하여 지상의 풀잎 끝에 맺힌 이슬 속의 영롱한 햇살. 그의 이슬 한 방울 속에는 우주의 신비를 꿰뚫어본 비밀이 숨어 있다.(서양화가 김창열)’ 시를 흔히 사색과 마음의 정수를 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듯, 나는 사진의 주제를 사색의 화두로 삼고자 했고, 인물이든 자연이든 장승이든 피사체와 눈빛이 통하고 마음이 열리는 순간을 포착해 찍고자 했다.” -‘마음으로 찍은 사진’의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성철 큰스님을 찍으러 간 적이 있었다. 83년 1월7일,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해인사 백련암으로 찾아갔더니 첫마디로 “사진? 뭐하러 찍을라카나?”라고 물었다. 그래서 “부처님 시절에 사진술을 알았다면 아마도 불상은 필요없었겠지요”라고 답했더니 껄껄 웃으시며 허락을 하셨다. 그런데 그날 스님의 눈과 얼굴이 유난히 부어 있어서, 욕심을 누르며 한 컷도 찍지 않았다. 봄에 부처님오신날에 다시 오라고 하셨는데 결국은 안 찍었다. 내 평생에 그렇게 산처럼 압도하는 기운을 지닌 큰 인물은 처음이었다. 그 기운이 내 마음에 그대로 찍혔으니, 지워지지 않는 가장 소중한 사진이다.” 성철 스님 허락 어렵게 받고도
결국 욕심 누르며 안 찍었지만
산처럼 압도하는 그 큰 기운
‘마음으로 찍은 사진’으로 남아 -학생들 사이에선 ‘까칠한 선생’으로 소문났던데? “그럴 것이다. 나는 사진 기법이나 이론에 앞서,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몰입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수업시간이 되면 강의실 문을 잠갔는데, 일상적인 약속부터 철저하게 지키는 습관을 심어주고자 했다. 처음 참가한 사진대회에서 운좋게 당선된 이래 한동안 내 사진의 특징을 스스로 따져봤는데, ‘다르게 보고 다르게 찍기’였다. 본격적으로 사진사 강의를 하게 되면서 외국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유행하는 사조를 연구해본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의미있는 사진은 그들의 삶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일 뿐 우리와 같을 수가 없었다. 회고록 마지막 장에 썼듯 ‘우리는 우리 눈으로 우리나라를 보라’는 게 내 사진론이다.” -분신으로까지 불리는 사진작가 이갑철·최광호씨에게 ‘어떤 스승이냐’고 물었더니 사진만이 아니라 냉철한 삶의 자세를 배운다고들 답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나를 아는 셈이다. 늘 ‘나를 잡아먹어라’ ‘지뢰를 피해 가듯 유명 작가들을 피해 가야 산다’고 학생들에게 얘기한다. 남을 흉내내거나 따르지 말고 자기만의 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그래야 ‘이것만은 내가 최고’라는 예술가로서 자신감과 자부심이 생긴다. 누구누구 사단이니 무슨 학파니 무리짓는 걸 체질적으로 못 견디기도 한다. 그래서 나한테는 수제자나 애제자가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나를 잡아먹는, 진짜 제자를 기다리고 있다.” 제자들이 부러워하는 직관·혜안
‘독고’ 기질과 오랜 명상수행 덕
작은 오피스텔을 ‘선방’ 삼아 출가
다음 생엔 스님으로 태어나고파 -‘우리 것’ ‘우리 눈’이라는 사진론에 맞춘 자신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특정한 작품보다는 그동안 연대순으로 변화해온 내 사진의 주제로 설명할 수 있다. 70년대부터 시작한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그들의 내면세계를 꿰뚫어 허울을 벗은 인간 본모습을 찾고자 했다. ‘감히 똥 누는 자세로 찍었다’며 문단 일부에서 비난을 했던 미당의 사진 같은. 80년대 작업인 <백민>은 어느날 영정사진에서 발견한 ‘눈맞춤의 비밀’로 건져낸 것들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눈맞춤을 통해 서로 교감을 하게 되면 그만의 기나 혼을 느낄 수 있었다. 흔히 내 대표작으로 쳐주는 ‘여자 무당’(동해안 별신굿의 대표 무당인 강릉의 박용녀 할머니)은 보통사람들은 무서워서 도망가는 눈빛 아닌가. 90년대 들어 빠져든 <장승>은 우리 것 3부작의 마지막 편인데 문득 ‘장승이 아니라 나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안의 잠재의식을 찍고 있는 듯한 신비한 경험을 했다.” -대표 작품집과 회고록으로 팔십 인생을 정리했는데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은? “<백민>은 물론이고 83년 제주도 해변의 모래찜에서 우연히 죽음의 모습을 포착한 <검은 모살뜸>과 <장승> 시리즈를 통해 내 의식의 뿌리이자 우리 한민족의 정신이 ‘샤먼’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 원류를 찾아 지금까지 10번 가까이 티베트와 히말라야 기행을 해왔다. 1000통의 필름에 담겨 있는데 아직도 미흡한 느낌이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다녀볼 참이다.” -가까운 제자들에게 물으니, 한결같이 ‘선생님의 직관과 혜안’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어떤 연유일까? “내 장점으로 봐준다니 다행스럽다. 아마도 타고난 ‘독고’(아웃사이더) 기질과 오랜 명상수행 덕분이지 싶다. 99년 정년퇴임을 한 뒤부터 아내가 작업실로 마련해준 역삼동의 작은 오피스텔을 ‘선방’ 삼아 출가를 했다. 스님들처럼 매일 새벽 2시55분 일어나 3시부터 1시간씩 예불하듯 명상을 한 뒤 집 근처 양재천을 40분 정도 산책한다. 일요일만 빼고 아침 8시 이전에 선방에 도착해 12시까지 3시간 동안 혼자 좌선을 한다. 지금껏 선방의 냉난방은 전혀 않는다. 혼자 명상에 잠기다 보면 ‘지혜의 문’이 열리듯 나 자신이 열리고 인간 존재를 넘은 세계가 보인다. 무당의 신기처럼 ‘임계의식’을 경험하기도 한다. 다음 생이 있다면 ‘스님’으로 태어나고 싶다.”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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