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돌을 맞은 가수 양희은씨가 동생 희경씨와 함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어디만큼 왔니>에 직접 출연한다. 양씨는 “뮤지컬을 마치고 데뷔 40돌 기념 음반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데뷔 40돌’ 뮤지컬 하는 가수 양희은
인터뷰/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인터뷰/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어디만큼 왔는지 뮤지컬 통해 날 돌아보고 싶어
원래 꿈은 기자·피디…라디오일 좋아하는 이유죠
어린시절 결핍이 자양분…20년간 혼자 음반제작 가수 양희은(59)씨는 요즘 뮤지컬 배우로 변신중이다. 오전에는 문화방송 라디오 <여성시대> 진행하랴,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는 뮤지컬 연습하랴 매일 강행군이다. 19일부터 새달 14일까지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에서 펼쳐지는 데뷔 40돌 기념 뮤지컬 <어디만큼 왔니> 무대를 위해서다. 지난달 30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양씨는 연습 도중 쉬는 시간에 잠시 나왔다고 했다. 뮤지컬에 함께 출연하는 동생 희경씨가 옆 테이블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배우로서 보기에 언니 연기가 어떤가요?” 희경씨에게 슬쩍 물었다. “언니가 12년 동안 <여성시대>에서 사연을 읽은 게 도움이 됐는지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해요. 문제는 무대에서 동작과 함께 노래를 하다 보면 가사를 까먹는 거지. 피나게 연습해서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게 하는 경지에 올라야 해.” 이를 듣던 양씨가 입을 뗐다. “난 노래할 때 움직이면 집중이 깨져요. 에너지를 집약해서 폭발해야 하는데, 허튼 에너지를 쓰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이번엔 곧 죽어도 움직이면서 노래를 해야 하니 어쩌겠어요? 해야지.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어쩌다 뮤지컬을 하게 됐나요? “2004~2005년 동생 희경이와 함께 우리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드라마 콘서트 <언제나 봄날>을 했어요. 직접 대본도 쓰고 같이 얘기하고 노래하며 한 편의 드라마처럼 꾸몄죠. 주변 친구들 얘기가, 그 공연이 그렇게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공연을 어떻게 되살릴까 고민하던 중 뮤지컬을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온 거죠.” -마침 데뷔 40돌이기도 하고요. “꼭 그래서 특별히 뭘 하는 건 아니고, 매년 공연을 해왔으니까. 사람들은 데뷔 40주년이 대단하다 하는데, 내겐 40년이 쓰나미처럼 한번에 온 게 아니거든요. 하루하루 쌓여서 된 것이기 때문에 그냥 담담하네요.” -뮤지컬 제목을 자신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네요.(‘어디만큼 왔니’는 양희은이 1981년 난소암으로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수술을 받은 직후, 선배 가수 송창식씨가 그를 위해 만들어준 노래다.)
“내가 지금 어디만큼 왔는지 되돌아보고 싶어서요. 내 노래가 대거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 나는 라디오로 도망갔어요. 라디오는 내게 편안한 피난처였죠. 라디오에 쏟은 정성만큼 노래에 정성을 쏟았다면 나는 어떤 가수가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노래에게 미안하죠. 가수로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돌아보고 나서 노년을 준비하려고요.” -그렇다면 어린 시절부터 되돌아보겠군요. “그렇죠. 아버지가 일찍이 가족을 떠난 이후 어머니와 우리 세 자매가 참 힘겹게 살았어요. 그 시절에는 ‘이혼’이라는 말도 잘 없었는데, 어찌 보면 우리 부모님은 ‘선구자’였던 거지. 집을 떠난 아버지는 새로 결혼했다가 39살에 돌아가셨고, 1971년 생계를 꾸려오던 어머니의 사업이 파산해 빚쟁이들이 몰려왔어요. 내가 돈을 벌어야겠다 싶어 기타를 들고 명동으로 갔죠. 송창식 선배가 이종환 선생을 모셔와서는 자기 무대를 10분 먼저 끝내고 그 시간에 저를 세워 오디션을 보게 했어요. 오디션에 통과돼 거기서 한달간 노래하고 나서는 명동 오비스캐빈으로 옮겼어요.” -송창식씨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1968년 경기여고 재학 시절 영어회화 클럽의 일원으로 미국문화원에서 행사를 했어요. 경기고 출신 윤형주 선배가 클럽 직속 선배였는데, 그 자리에 송창식 선배랑 같이 와서 트윈폴리오로 공연을 했죠. 내가 재학생 대표로 답가를 하게 됐는데, 무반주로 노래를 하니 트윈폴리오 선배들이 기타로 반주를 해줬어요. 존 바에즈의 ‘도나 도나’ 같은 곡을 불렀어요.” -학생 때부터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셨군요. 가수가 꿈이었나요? “전혀 아니었죠. 내 꿈은 기자나 피디였어요. 그래서 처음에 신방과를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재수해서 서강대 사학과에 간 것도 역사를 알아야 좋은 언론인이 될 거란 생각에서였어요. 내가 라디오 방송 일을 좋아하는 것도 다 그런 꿈과 관련이 있는 거지.” -그런데도 1971년 데뷔 앨범을 냈잖아요. “나는 가만있는데, 라디오 피디 등 주변에서 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다 제작자까지 연결이 된 거죠. 그 회사가 킹레코드였는데, 거기서 줄줄이 음반을 내다가 1991년 회사가 망한 뒤부터는 20년 동안 나 혼자 음반을 제작했어요.” -데뷔 앨범 작업에 김민기씨가 참여했죠? “1970년 재수할 때 와이엠시에이(YMCA)가 운영하는 청소년쉼터 ‘청개구리’에 갔는데, 거기서 트윈폴리오와 함께 김민기씨를 만나게 됐어요. 내가 노래할 때 기타 반주도 해줬죠. 이듬해 데뷔 앨범 낼 때 김민기 선배의 도움이 컸어요.”
세상엔 수천수만의 ‘아침이슬’ 있다는 걸 알아
청청한 가슴으로 만들고 부른 노래가 오래가
환갑엔 연극무대서 코미디연기 도전할 생각 -김민기씨가 만든 ‘아침이슬’이 데뷔 앨범 첫 곡이었어요. “김민기 선배가 70년대 중반엔가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아침이슬 안 만났으면 더 큰 가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엔 무슨 뜻인가 했죠. 사실 ‘아침이슬’이 엄청나게 히트한 것 같지만, 상업적으로 도움이 된 건 아니었어요. 나중에 음반사 사장 얘기를 들으니 ‘세노야 세노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곡이 판매에는 훨씬 도움이 됐다고 하더군요. ‘아침이슬’은 음반을 사서 듣기보다는 노래를 배워서 직접 불렀거든요. 노래는 되불러주는 사람의 것이에요. 노래를 만든 사람, 처음 부른 가수, 다 소용없어요. 양희은이나 김민기의 ‘아침이슬’보다는 이 세상에 수천 수만 개의 ‘아침이슬’이 있을 수 있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담아 부르느냐도 다 자유예요. 나는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이 대목이 너무 좋아서 그 노래를 불렀어요. 김민기 선배는 4·19 수유리 묘역에서 낮잠 자다 깨서 느꼈던 감정을 담아 이 노래를 만든 거고요. 그런데 언젠가 시위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스크럼 짜고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는 좀 섬뜩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 ‘아침이슬’은 내가 부른 ‘아침이슬’이 아닌 거죠.” -처음부터 운동권 가요로 생각하고 부른 건 아니었다는 얘기군요. 지금은 ‘아침이슬’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나요? “70년대의 나에게 있어서는 ‘아침이슬’이 굴레나 멍에이자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어요. 그 노래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과 부담이 너무 컸죠. 하지만 40대에 접어들면서 그런 생각을 접었어요. ‘소박하고 소소한 것도 얼마든지 노래 소재가 될 수 있다. 왜 굳이 넘어서려고 하나. 새로운 각도로 중장년의 잔잔한 감정을 담아 노래하자’고 생각을 바꾸게 된 거죠.” -그렇게 70년대를 보내고 80년대 들어 큰 시련을 맞으셨죠? “1981년 난소암에 걸려 석달밖에 못 살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이제야 좀 살아보려고 하는데 딴지가 끝없이 들어오는구나 했죠. 하지만 절망은 안 했어요. 죽으려면 죽는 거고 살려면 살겠지 하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그전에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버스가 뒤집히는 교통사고도 당했어요. 내가 참 여러 일 많이 겪었죠.” -그래도 수술로 암을 이겨내고 음반도 다시 발표하셨죠. “1983년 ‘하얀 목련’이 담긴 음반으로 재기를 했어요. ‘하얀 목련’은 암 수술을 받은 직후인 서른살에 내가 직접 가사를 썼어요. 원래는 군 입대를 앞둔 어린 학생의 감수성을 담은 가사가 붙어 있었는데, 작곡가 김희갑 선생께 가사를 고치고 싶다고 부탁해 허락을 받았죠. 그렇게 작사를 시작해 ‘들길 따라서’도 내가 가사를 썼어요. 나중에 가사 대상도 받고 했어요.” -1985년 발표한 ‘한계령’도 많은 사랑을 받았죠. “발표한 건 85년이지만, 히트곡이 되기까진 5년이 걸렸어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어떻고요? 발표한 지 7년이 지나서야 뜨더라고요. 나는 노래를 발표하고 나면 홍보를 하고 작전을 짜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놔뒀어요. 노래에도 사람처럼 생명선이 있어서 오래가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홍보를 해도 1년 만에 확 죽어버리는 노래가 있거든요. 홍보가 참 무서운 게, 자꾸 접하다 보면 욕하면서도 그 노래를 부르게 돼요. 하지만 사심이나 의도 없이 맑고 청청한 가슴으로 만들고 부른 노래는 절로 오래가거든요. 얄팍한 욕심으로 마구 홍보를 해대서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는 있겠지만, 그런 거 없이 입에서 입으로 불리어야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가 될 수 있어요. 요새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훈련을 해서 가수를 내보내는 조직이 있으니, 세태가 참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예전엔 노래가 돈이 된다는 걸 몰랐을 때니 그런 게 있을 수도 없었죠. 자기가 만든 노래를 ‘네가 불러봐라’며 서로 막 주고 했을 정도니까요.” -1987년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앨범을 내셨어요. “1991년 데뷔 20주년이 됐는데,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내가 직접 음반을 만들어보자 했던 거죠. 오스트리아 비엔나(빈)에서 유학하고 있는 이병우를 미국으로 불러서 연습하고 만든 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담긴 앨범이에요. 아까 얘기했듯이 이 노래도 뜨는 데 7년이나 걸렸죠.” -미국으로 간 지 6년 만인 1993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셨죠? “남편의 결정이었어요. 나는 한국 다시 가면 방송도 하고 노래도 할 거야 했죠. 93년 가을에 한국에 들어와 그때부터 지금까지 라디오 방송을 쉬지 않고 해오고 있어요. 94년 여름에는 처음으로 내 이름 걸고 대학로에서 공연을 했고요. 이후 매년 큰 무대 작은 무대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공연을 해왔죠. 이번에 데뷔 40주년을 맞아 예전에 단독공연을 처음 했던 대학로에서 다시 공연을 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참 의미가 깊네요.” -이번 뮤지컬 말고 데뷔 40돌을 기념하는 다른 뭔가가 또 있나요? “거 왜 시험 앞두고 딴짓하는 사람 있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데뷔 40주년 앞두고 노래 생각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어요. 전부터 에스비에스 <시골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는데, 이게 참 고달픈 방송이에요. 우선 너무 많이 이동해야 하거든요. 그래도 저는 퓨전이니 우리 음식의 국제화니 이런 거 말고 딱 시골의 외할머니한테서 얻어먹던 소박한 밥상을 좋아하거든요. 그걸 꼭 우리 젊은이들이 재현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에서 조리법이 간단한 음식을 위주로 <양희은이 차리는 시골밥상>(반찬가게 펴냄)이라는 책을 썼어요. 지난해 초부터 쓰기 시작해 올봄에야 마쳤고, 책 나온 지는 2주 됐어요. 내겐 데뷔 40주년 음반 작업에 들어가기 앞서 ‘마음의 쉼터’ 같은 경험이었죠.” -그럼 데뷔 40돌 기념 음반은 언제 나오는 건가요? “뮤지컬 마치고 작업 들어가서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여름에는 내야죠. 그동안 같이 작업을 했던 분도 있고, 전혀 같이 해본 적 없는 새로운 분도 있어요. 누가 참여하는지는 비밀입니다.(웃음)” -일전에 “노래는 물과 같아서 부르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고 하셨는데, 양희은씨는 어떤 그릇이라고 생각하나요? “투명하고 싶고, 솔직하고 싶어요. 내가 숨기고 싶어도 내가 부른 노래에는 내 삶이 들어 있겠죠. 누구도 모사할 수 없는 게 있겠죠. 내 자산은 내 경험과 내 결핍인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결핍. 정말 힘들고 고달팠지만, 결국은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 전에는 노래하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노래는 생계를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노래하는 게 즐거워요. 노래를 그만두기 전에 그렇게 된 게 정말 다행이죠. 안 믿겨질 수도 있겠지만, 저는 무대 공포증이 있어요. 1994년부터 16년 넘게 공연을 해도 무대에만 오르면 심장이 얼마나 두근대는지 그 공포는 말도 못해요. 공연 시작하고 한 40~50분은 지나야 얼음인형 상태에서 점차 풀어져요. 그런데 재작년부터 좀 나아졌어요. 이제는 무대 오르고 10분이면 긴장이 풀려요. 그래서 이번에 뮤지컬도 시도할 수 있게 된 거죠. 새로운 도전이라 겁이 나긴 해요. 내 혈액형이 극소심 에이(A)형이라서.” -정말 믿기 힘들군요. 환갑이 되면 코미디언에도 도전하겠다고 하셨던데요. “7~8년 전에 전유성씨와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코미디언을 한번 해보라는 얘기가 나왔거든요. 그때 제가 그랬어요. ‘지금은 안 되고 환갑이면 괜찮을 것 같아.’ 얼마 전에 전유성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내가 연기할 코미디 대본 다 써서 넘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약속했잖아’ 이러면서요.(이 대목에서 전유성 성대모사를 했다.) 알았다고 했죠. 코미디 연기를 하게 되면 방송은 아니고 연극 무대가 될 거예요. 우선은 뮤지컬부터 잘 마쳐야죠.” 공연 문의 (02)541-7110.
원래 꿈은 기자·피디…라디오일 좋아하는 이유죠
어린시절 결핍이 자양분…20년간 혼자 음반제작 가수 양희은(59)씨는 요즘 뮤지컬 배우로 변신중이다. 오전에는 문화방송 라디오 <여성시대> 진행하랴,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는 뮤지컬 연습하랴 매일 강행군이다. 19일부터 새달 14일까지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에서 펼쳐지는 데뷔 40돌 기념 뮤지컬 <어디만큼 왔니> 무대를 위해서다. 지난달 30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양씨는 연습 도중 쉬는 시간에 잠시 나왔다고 했다. 뮤지컬에 함께 출연하는 동생 희경씨가 옆 테이블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배우로서 보기에 언니 연기가 어떤가요?” 희경씨에게 슬쩍 물었다. “언니가 12년 동안 <여성시대>에서 사연을 읽은 게 도움이 됐는지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해요. 문제는 무대에서 동작과 함께 노래를 하다 보면 가사를 까먹는 거지. 피나게 연습해서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게 하는 경지에 올라야 해.” 이를 듣던 양씨가 입을 뗐다. “난 노래할 때 움직이면 집중이 깨져요. 에너지를 집약해서 폭발해야 하는데, 허튼 에너지를 쓰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이번엔 곧 죽어도 움직이면서 노래를 해야 하니 어쩌겠어요? 해야지.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어쩌다 뮤지컬을 하게 됐나요? “2004~2005년 동생 희경이와 함께 우리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드라마 콘서트 <언제나 봄날>을 했어요. 직접 대본도 쓰고 같이 얘기하고 노래하며 한 편의 드라마처럼 꾸몄죠. 주변 친구들 얘기가, 그 공연이 그렇게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공연을 어떻게 되살릴까 고민하던 중 뮤지컬을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온 거죠.” -마침 데뷔 40돌이기도 하고요. “꼭 그래서 특별히 뭘 하는 건 아니고, 매년 공연을 해왔으니까. 사람들은 데뷔 40주년이 대단하다 하는데, 내겐 40년이 쓰나미처럼 한번에 온 게 아니거든요. 하루하루 쌓여서 된 것이기 때문에 그냥 담담하네요.” -뮤지컬 제목을 자신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네요.(‘어디만큼 왔니’는 양희은이 1981년 난소암으로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수술을 받은 직후, 선배 가수 송창식씨가 그를 위해 만들어준 노래다.)
“내가 지금 어디만큼 왔는지 되돌아보고 싶어서요. 내 노래가 대거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 나는 라디오로 도망갔어요. 라디오는 내게 편안한 피난처였죠. 라디오에 쏟은 정성만큼 노래에 정성을 쏟았다면 나는 어떤 가수가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노래에게 미안하죠. 가수로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돌아보고 나서 노년을 준비하려고요.” -그렇다면 어린 시절부터 되돌아보겠군요. “그렇죠. 아버지가 일찍이 가족을 떠난 이후 어머니와 우리 세 자매가 참 힘겹게 살았어요. 그 시절에는 ‘이혼’이라는 말도 잘 없었는데, 어찌 보면 우리 부모님은 ‘선구자’였던 거지. 집을 떠난 아버지는 새로 결혼했다가 39살에 돌아가셨고, 1971년 생계를 꾸려오던 어머니의 사업이 파산해 빚쟁이들이 몰려왔어요. 내가 돈을 벌어야겠다 싶어 기타를 들고 명동으로 갔죠. 송창식 선배가 이종환 선생을 모셔와서는 자기 무대를 10분 먼저 끝내고 그 시간에 저를 세워 오디션을 보게 했어요. 오디션에 통과돼 거기서 한달간 노래하고 나서는 명동 오비스캐빈으로 옮겼어요.” -송창식씨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1968년 경기여고 재학 시절 영어회화 클럽의 일원으로 미국문화원에서 행사를 했어요. 경기고 출신 윤형주 선배가 클럽 직속 선배였는데, 그 자리에 송창식 선배랑 같이 와서 트윈폴리오로 공연을 했죠. 내가 재학생 대표로 답가를 하게 됐는데, 무반주로 노래를 하니 트윈폴리오 선배들이 기타로 반주를 해줬어요. 존 바에즈의 ‘도나 도나’ 같은 곡을 불렀어요.” -학생 때부터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셨군요. 가수가 꿈이었나요? “전혀 아니었죠. 내 꿈은 기자나 피디였어요. 그래서 처음에 신방과를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재수해서 서강대 사학과에 간 것도 역사를 알아야 좋은 언론인이 될 거란 생각에서였어요. 내가 라디오 방송 일을 좋아하는 것도 다 그런 꿈과 관련이 있는 거지.” -그런데도 1971년 데뷔 앨범을 냈잖아요. “나는 가만있는데, 라디오 피디 등 주변에서 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다 제작자까지 연결이 된 거죠. 그 회사가 킹레코드였는데, 거기서 줄줄이 음반을 내다가 1991년 회사가 망한 뒤부터는 20년 동안 나 혼자 음반을 제작했어요.” -데뷔 앨범 작업에 김민기씨가 참여했죠? “1970년 재수할 때 와이엠시에이(YMCA)가 운영하는 청소년쉼터 ‘청개구리’에 갔는데, 거기서 트윈폴리오와 함께 김민기씨를 만나게 됐어요. 내가 노래할 때 기타 반주도 해줬죠. 이듬해 데뷔 앨범 낼 때 김민기 선배의 도움이 컸어요.”
가수 양희은(59)씨
청청한 가슴으로 만들고 부른 노래가 오래가
환갑엔 연극무대서 코미디연기 도전할 생각 -김민기씨가 만든 ‘아침이슬’이 데뷔 앨범 첫 곡이었어요. “김민기 선배가 70년대 중반엔가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아침이슬 안 만났으면 더 큰 가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엔 무슨 뜻인가 했죠. 사실 ‘아침이슬’이 엄청나게 히트한 것 같지만, 상업적으로 도움이 된 건 아니었어요. 나중에 음반사 사장 얘기를 들으니 ‘세노야 세노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곡이 판매에는 훨씬 도움이 됐다고 하더군요. ‘아침이슬’은 음반을 사서 듣기보다는 노래를 배워서 직접 불렀거든요. 노래는 되불러주는 사람의 것이에요. 노래를 만든 사람, 처음 부른 가수, 다 소용없어요. 양희은이나 김민기의 ‘아침이슬’보다는 이 세상에 수천 수만 개의 ‘아침이슬’이 있을 수 있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담아 부르느냐도 다 자유예요. 나는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이 대목이 너무 좋아서 그 노래를 불렀어요. 김민기 선배는 4·19 수유리 묘역에서 낮잠 자다 깨서 느꼈던 감정을 담아 이 노래를 만든 거고요. 그런데 언젠가 시위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스크럼 짜고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는 좀 섬뜩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 ‘아침이슬’은 내가 부른 ‘아침이슬’이 아닌 거죠.” -처음부터 운동권 가요로 생각하고 부른 건 아니었다는 얘기군요. 지금은 ‘아침이슬’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나요? “70년대의 나에게 있어서는 ‘아침이슬’이 굴레나 멍에이자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어요. 그 노래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과 부담이 너무 컸죠. 하지만 40대에 접어들면서 그런 생각을 접었어요. ‘소박하고 소소한 것도 얼마든지 노래 소재가 될 수 있다. 왜 굳이 넘어서려고 하나. 새로운 각도로 중장년의 잔잔한 감정을 담아 노래하자’고 생각을 바꾸게 된 거죠.” -그렇게 70년대를 보내고 80년대 들어 큰 시련을 맞으셨죠? “1981년 난소암에 걸려 석달밖에 못 살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이제야 좀 살아보려고 하는데 딴지가 끝없이 들어오는구나 했죠. 하지만 절망은 안 했어요. 죽으려면 죽는 거고 살려면 살겠지 하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그전에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버스가 뒤집히는 교통사고도 당했어요. 내가 참 여러 일 많이 겪었죠.” -그래도 수술로 암을 이겨내고 음반도 다시 발표하셨죠. “1983년 ‘하얀 목련’이 담긴 음반으로 재기를 했어요. ‘하얀 목련’은 암 수술을 받은 직후인 서른살에 내가 직접 가사를 썼어요. 원래는 군 입대를 앞둔 어린 학생의 감수성을 담은 가사가 붙어 있었는데, 작곡가 김희갑 선생께 가사를 고치고 싶다고 부탁해 허락을 받았죠. 그렇게 작사를 시작해 ‘들길 따라서’도 내가 가사를 썼어요. 나중에 가사 대상도 받고 했어요.” -1985년 발표한 ‘한계령’도 많은 사랑을 받았죠. “발표한 건 85년이지만, 히트곡이 되기까진 5년이 걸렸어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어떻고요? 발표한 지 7년이 지나서야 뜨더라고요. 나는 노래를 발표하고 나면 홍보를 하고 작전을 짜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놔뒀어요. 노래에도 사람처럼 생명선이 있어서 오래가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홍보를 해도 1년 만에 확 죽어버리는 노래가 있거든요. 홍보가 참 무서운 게, 자꾸 접하다 보면 욕하면서도 그 노래를 부르게 돼요. 하지만 사심이나 의도 없이 맑고 청청한 가슴으로 만들고 부른 노래는 절로 오래가거든요. 얄팍한 욕심으로 마구 홍보를 해대서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는 있겠지만, 그런 거 없이 입에서 입으로 불리어야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가 될 수 있어요. 요새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훈련을 해서 가수를 내보내는 조직이 있으니, 세태가 참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예전엔 노래가 돈이 된다는 걸 몰랐을 때니 그런 게 있을 수도 없었죠. 자기가 만든 노래를 ‘네가 불러봐라’며 서로 막 주고 했을 정도니까요.” -1987년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앨범을 내셨어요. “1991년 데뷔 20주년이 됐는데,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내가 직접 음반을 만들어보자 했던 거죠. 오스트리아 비엔나(빈)에서 유학하고 있는 이병우를 미국으로 불러서 연습하고 만든 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담긴 앨범이에요. 아까 얘기했듯이 이 노래도 뜨는 데 7년이나 걸렸죠.” -미국으로 간 지 6년 만인 1993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셨죠? “남편의 결정이었어요. 나는 한국 다시 가면 방송도 하고 노래도 할 거야 했죠. 93년 가을에 한국에 들어와 그때부터 지금까지 라디오 방송을 쉬지 않고 해오고 있어요. 94년 여름에는 처음으로 내 이름 걸고 대학로에서 공연을 했고요. 이후 매년 큰 무대 작은 무대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공연을 해왔죠. 이번에 데뷔 40주년을 맞아 예전에 단독공연을 처음 했던 대학로에서 다시 공연을 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참 의미가 깊네요.” -이번 뮤지컬 말고 데뷔 40돌을 기념하는 다른 뭔가가 또 있나요? “거 왜 시험 앞두고 딴짓하는 사람 있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데뷔 40주년 앞두고 노래 생각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어요. 전부터 에스비에스 <시골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는데, 이게 참 고달픈 방송이에요. 우선 너무 많이 이동해야 하거든요. 그래도 저는 퓨전이니 우리 음식의 국제화니 이런 거 말고 딱 시골의 외할머니한테서 얻어먹던 소박한 밥상을 좋아하거든요. 그걸 꼭 우리 젊은이들이 재현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에서 조리법이 간단한 음식을 위주로 <양희은이 차리는 시골밥상>(반찬가게 펴냄)이라는 책을 썼어요. 지난해 초부터 쓰기 시작해 올봄에야 마쳤고, 책 나온 지는 2주 됐어요. 내겐 데뷔 40주년 음반 작업에 들어가기 앞서 ‘마음의 쉼터’ 같은 경험이었죠.” -그럼 데뷔 40돌 기념 음반은 언제 나오는 건가요? “뮤지컬 마치고 작업 들어가서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여름에는 내야죠. 그동안 같이 작업을 했던 분도 있고, 전혀 같이 해본 적 없는 새로운 분도 있어요. 누가 참여하는지는 비밀입니다.(웃음)” -일전에 “노래는 물과 같아서 부르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고 하셨는데, 양희은씨는 어떤 그릇이라고 생각하나요? “투명하고 싶고, 솔직하고 싶어요. 내가 숨기고 싶어도 내가 부른 노래에는 내 삶이 들어 있겠죠. 누구도 모사할 수 없는 게 있겠죠. 내 자산은 내 경험과 내 결핍인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결핍. 정말 힘들고 고달팠지만, 결국은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 전에는 노래하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노래는 생계를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노래하는 게 즐거워요. 노래를 그만두기 전에 그렇게 된 게 정말 다행이죠. 안 믿겨질 수도 있겠지만, 저는 무대 공포증이 있어요. 1994년부터 16년 넘게 공연을 해도 무대에만 오르면 심장이 얼마나 두근대는지 그 공포는 말도 못해요. 공연 시작하고 한 40~50분은 지나야 얼음인형 상태에서 점차 풀어져요. 그런데 재작년부터 좀 나아졌어요. 이제는 무대 오르고 10분이면 긴장이 풀려요. 그래서 이번에 뮤지컬도 시도할 수 있게 된 거죠. 새로운 도전이라 겁이 나긴 해요. 내 혈액형이 극소심 에이(A)형이라서.” -정말 믿기 힘들군요. 환갑이 되면 코미디언에도 도전하겠다고 하셨던데요. “7~8년 전에 전유성씨와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코미디언을 한번 해보라는 얘기가 나왔거든요. 그때 제가 그랬어요. ‘지금은 안 되고 환갑이면 괜찮을 것 같아.’ 얼마 전에 전유성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내가 연기할 코미디 대본 다 써서 넘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약속했잖아’ 이러면서요.(이 대목에서 전유성 성대모사를 했다.) 알았다고 했죠. 코미디 연기를 하게 되면 방송은 아니고 연극 무대가 될 거예요. 우선은 뮤지컬부터 잘 마쳐야죠.” 공연 문의 (02)541-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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