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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낯설고 무심하게 비열한 ‘잔칫날’

등록 2020-12-05 09:04수정 2020-12-05 10:06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잔칫날>

입관 당일 장례비 벌러 떠난 오빠
무심함, 비정함…, 감내하는 동생

돌발상황 겹쳐 멀어지는 입관비
입관 데드라인에 오빠 돌아올까

장례식장 앞 낯익은 비루함 엮어
블랙코미디로 구축한 공포 극대화
놀라운 데뷔작, 차기작도 기대돼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쏟아지는 현실의 비루함, 거기에 펼쳐진 &lt;잔칫날&gt;은 신산하기만 하다. “오빠가 알아서 할게”라지만 아무것도 알아서 할 수 없는 오빠 경만과, 현실에 맞서 몸부림쳐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동생 경미는 결국 아빠의 입관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트리플픽쳐스 제공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쏟아지는 현실의 비루함, 거기에 펼쳐진 <잔칫날>은 신산하기만 하다. “오빠가 알아서 할게”라지만 아무것도 알아서 할 수 없는 오빠 경만과, 현실에 맞서 몸부림쳐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동생 경미는 결국 아빠의 입관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트리플픽쳐스 제공

<잔칫날>의 기본 상황 설정은 간단명료하다. 부친상을 치르고 있던 도중(!) 입관일 당일(!!)에 아버지의 장례비용을 벌기 위해 팔순잔치의 사회를 보러 지방으로 내려가는 무명 사회자(MC) 오빠, 그리고 그 오빠가 비운 빈소에서 잔소리쟁이 친척 어른들과 수육 찾는 조문객과 비용 입금 독촉하는 장례업체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동생. 짐작하셨듯 남매에게는 돈도, 엄마도, 변변히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다. 어쩌라고. 양쪽 공히.

코로나 시대적 메타포를 빌린다면, 부모님 찬스도 없는 혈혈단신 단독돌파 맞벌이 부부가 아이의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와 일주일간 아이를 등교시킬 수 없고 돌봄 서비스도 받을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는데, 부부 모두 우연찮게도 인사고과를 쥐고 있는 상사로부터 무색무취 무형무언의 눈치를 강력하게 받고 있는지라 ‘돌봄휴가는 국가에서 보장하는 너의 권리야!’를 사슴 눈 반짝이며 부르짖는 이를 향해 기나긴 한숨을 내뱉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얼추 유사한 상황이라 할 것인데, 이 막막한 상황에서 오빠 ‘경만’(하준)은 학원비를 빼서 장례비에 보태려는 동생 ‘경미’(소주연)를 막으며 한마디 던진다.

“오빠가 알아서 할게.”

아버지 장례식 입관비 마련을 위해 대타 사회자로 나선 경만에게 현실은 녹록잖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트리플픽쳐스 제공
아버지 장례식 입관비 마련을 위해 대타 사회자로 나선 경만에게 현실은 녹록잖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트리플픽쳐스 제공

입관 시간은 다가오는데

글자 수 대비 질량으로 치면 거의 중성자별 수준으로 드높은 이 말은, 선배의 대타로 일당 200만원의 시골 팔순잔치 사회자 일을 맡게 되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실현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경만의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무게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불길한 금속음과 함께 양쪽에서 서서히 좁혀 들어오던 <스타워즈> 데스스타의 쓰레기장 벽체처럼(<스타워즈4: 새로운 희망> 참조), 장례식과 팔순잔치라는 극과 극의 행사를 양쪽에 배치하고 그 안에 경만을 던져 넣은 뒤 아무리 늦어도 아버지의 입관이 있는 11시까지는 장례식장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미션, 거기에다 동생 경미를 ‘구출’할 200만원(플러스알파)을 들고 돌아와야 한다는 카운트다운까지 걸고 들어가는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언뜻 단순해 보이면서도 매우 영리하게 설계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설정은 사실 테러범-시한폭탄-에프비아이(FBI)-폭발물처리반 등등이 등장하는 할리우드 테러 저지 액션영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기초 설정에 다름 아닌데, <잔칫날>은 시한폭탄 대신 장례식/시골잔치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한번쯤은 목격될 법한 일상들을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주요 위험으로 채택하고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폭탄은 무심함이다. 상을 당한 슬픔을 느낄 틈도 없이 경만은 “(문상객 대접용) 국은 뭘로?” “머릿고기는 놓을 거죠?” 같은 장례식장 직원의 질문에 “제일 싼 걸로 해주세요” “머릿고기는 꼭 놔야 되나요?” 등의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상황, 그 질문, 그 대답은 과장된 연출이나 설명적 음악 등의 첨가물 없이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영화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를 더하는 것은 캐릭터에 녹아든 배우들의 연기다. 경미와 경만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듯하다. ㈜트리플픽쳐스 제공
영화의 완성도를 더하는 것은 캐릭터에 녹아든 배우들의 연기다. 경미와 경만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듯하다. ㈜트리플픽쳐스 제공

하여, 우리는 경험한다. 뒤늦게 빈소에 나타나 홀로 빈소를 지키는 경미에게 곡(哭)을 코치 및 지시하고(“자, 한번 해보자. 이렇게 크게, 아이고~ 아이고~”) 각종 욕설 및 잔소리 폭격을 쏟아내다가도(“어떻게 상갓집에 수육도 안 갖다 놔!”) 정작 경미가 진짜 울음을 쏟아낼 때는 “장례식장에서 너무 우는 거 아니다!”라고 야단치는 친척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는 문상을 와서 아버지가 큰아버지에게 졌던 빚 대신 부조금이라도 들고 오라 했다는 사촌형/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또는 장례식장 앞 흡연구역에서 부조금 액수를 얘기하다가 “배고프다. 들어가자”로 마무리 짓는 조문 온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즉, 상을 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버전을 달리해서 한번쯤은 겪었을 법한 그 흔하디흔한 풍경이 새삼스레 스크린 위에(!) 아로새겨지는 것을 보며 충격을 경험한다. 그것은 흡사 동물원에서 고양이나 개가 넣어져 있는 우리와 마주쳤을 때 느낄 법한 종류의 충격이다.

좀 있어 보이는 용어로는 ‘이화효과’라 할 이러한 충격효과는, 팔순잔치 사회를 보러 한 시골 마을에 내려간 경만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체험된다. 경만을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호칭하며 “어머니의 웃음을 찾아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잔칫집 장남(정인기)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경만의 200만원(플러스알파) 벌기는 순조로울 것 같다. 하지만 짐작하시는 대로 일은 경만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고, 예기치 못했던 돌발사태와 그 뒤에 이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점입가경의 상황 전개로 인해 경만은 점점 고립무원의 코너에 몰린다.

동시에 서울에서 친척들과 장례업체 직원의 압박과 닦달로 인해 동생 경미 역시 코너에 몰리고 있다. 경미는 “오빠가 알아서 할게” 한마디를 던지고 간 오빠에게 끊임없이 구조요청을 날린다. 하지만 구조를 해야 할 경만이 오히려 더 구조가 필요한 상황이다. 전화는 끝없이 진동한다. 하지만 받을 수 없다.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할 말이 없어도 받아야 한다. 차는 고장났고, 고칠 돈도 없다. 해는 지고, 시간은 점점 입관 시간에 가까워간다.

피바다보다 더 밀도 높은 공포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은 사실 이 영화를 위해 남겨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경만과 경미의 상황. 다시 한번 할리우드 액션의 메타포를 빌리면 이는, 인질범에게 납치된 여동생을 구출하려던 오빠가 구출에 필요한 최종병기를 구하러 갔다가 오히려 적들에게 완전 포위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다름 아닐 것인데, 할리우드 액션과 <잔칫날>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주인공이 팔뚝 굵은 강력 액션남이 아닌, 돈도 배경도 학벌도 엄마 아빠도 없는 절대약자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경만은 한양서 벼슬하시는 분(잔칫집 장남은 ‘서울시 교육청 공무원’으로 설정돼 있다)의 팔순노모 잔치를 망친 주범을 적시해내야만 하는 잔칫집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쉽고 확실한 먹잇감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경만을 ‘선생님’이라 부르던 주최 측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정말 몬땠다! 젊은 사람이 또박또박 말대꾸나 하고!”라 일갈하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경만의 항의를 일축한다.

그리하여 애초에 블랙코미디를 지향하는 듯했던 이 영화는 점차 호러의 양상을 띤다. 아니, 아니, 경만이 전기톱으로 뭔가를 당했다든가 하는 뭐 그랬다는 건 아니다. <잔칫날>의 공포는 훨씬 은근하고도 내밀한 공포, 즉 포위와 감금, 그리고 질식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어둠의 표적>(Straw Dogs)부터 <겟 아웃>으로까지 이어지는 고립 호러들이 체험시켰던 공포와 일맥상통하는 것인바, 영화는 ‘우리가 남이가’로 요약되는 혈연과 지연, ‘우리가 누군데’로 요약되는 과시욕과 인정머리 없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쩔 건데?’로 요약되는 힘과 머릿수의 폭력 등등 현재 우리 사회가 품은 독기가 전기톱/전정가위/해머/손도끼 못지않은 흉기임을 솜씨 좋게 드러낸다. 그리고 별다른 첨가제 없이도 웬만한 피바다 영화들보다 훨씬 밀도 높은 공포를 만들어낸다.

출연 분량과 극중 비중과 관계없이 고루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현미경적으로 재현되고 증폭되는 우리 사회의 야비한 단면을, 그것도 핵심요약처럼 잘 추려져 있는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하지만, 결코 편안하기만 한 경험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불편함은 물론 영화의 완성도나 이야기의 힘이 떨어져서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경만과 경미를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의 야비함과 치졸함, 그리고 잔혹함이 리얼할수록 불편함은 점점 더 가중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 인물들의 치졸함이 우리 자신들과 적어도 어느 한 부분은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말의 아쉬움 넘어선 완성도

후반 결말부, 영화는 예의 그 할리우드 테러액션적 결말, 즉 결국 간발의 차로 폭탄은 폭발하지 않고 결국 주인공은 위기 직전의 인질을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는 공식을 따른다. 물론 그 선택 덕분에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 즉 ‘향불은 영혼과 이승을 연결해주는 다리’라는 말을 듣고 향불을 껐다가 얼마 뒤 다시 켜는 경미(를 연기하는 소주연)를 담은 장면이 가능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다소 안이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이 영화가 앞서 보여준 높은 밀도는 사실 장르적 규칙에의 안착, 그 이상을 기대하게 했으므로.

어쨌든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 선택이 남긴 일말의 아쉬움이, 이 영화가 놀라운 장편 데뷔작(각본/감독 김록경)의 대열에 합류하게 만드는 데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아무쪼록 <잔칫날>을 포함하여 작년과 올해 유독 많았던 ‘놀라운 데뷔작’들이 내년에도 계속해서 두번째, 세번째, 그리고 그다음, 그리고 그다음 작품으로 뻗어가길 충심으로 기원한다. 이 엄혹한 시기에 척박한 지표를 여전히 뚫고 나오는 그 싱싱한 에너지 덕분에 풍경은 아직 푸르다.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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