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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러셀이 “힘든 날이 뭔지 제대로 알려주겠어” 했지만

등록 2020-10-09 19:33수정 2020-10-10 02:33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언힌지드>

90분짜리 보복운전, 공격·피해 단순서사
스필버그 1971년작 <대결>과 유사구조
가해 이유와 그 장소, 개연성은 물음표
한번의 경적, 점입가경 분노로 돌아와

잃을 것 없는 ‘놈’의 원인불명의 폭주
러셀 크로의 직진 연기 보는 맛이라면
편협한 출발, 그보다 더 소소한 결말
‘일상 속에 곪아터져나온 분노’ 무비 &lt;언힌지드&gt;. 분노 하나만으로 질주하는 단순한 서사 속에 러셀 크로의 연기는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다. 누리픽쳐스 제공
‘일상 속에 곪아터져나온 분노’ 무비 <언힌지드>. 분노 하나만으로 질주하는 단순한 서사 속에 러셀 크로의 연기는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다. 누리픽쳐스 제공

‘보복운전’이 키워드인 1시간30분짜리 영화에 다름도 아닌 러셀 크로씩이나 출연하고 있고, 더구나 그가 당하는 측도 아니라 핸들에 손을 얹은 채 분노로 충혈된 눈을 이글이는 가해자(라기보다는 공격자)로 출연하고 있는 관계로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는 <언힌지드>.

27년 전 국내 개봉 당시 ‘한국인 편의점 주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한국인 비하 장면(영어가 매우 서툴고–특히 브이(v) 발음에 약하다– 주인공에게 인색함과 불친절과 바가지를 대놓고 자행하고 등등)으로 국민적 미움을 사는 바람에 국내에선 제대로 관람 및 거론되지도 못했던 조엘 슈마허 감독의 1993년 작품 <폴링 다운>을 위시하여, 이 영화와 비교되는 ‘일상 속에 곪아터져나온 분노’ 무비들이 여럿 있는 것 같다만, 실질적으로 이 영화와 더불어 거론될 만한 작품은 역시나 하나로 수렴된다. 리처드 매시슨의 원작·각본을 스티븐 스필버그가 24살에 신들린 듯 연출했던 작품 <대결>(Duel·1971)이다.

전형적인 ‘분노’ 로드무비

평범한 시민(이 무신경한 단어를 잠시 용서해주시길)의 하루를 극도의 악몽으로 변모시키는 무시무시한 보복운전이라는 기본 설정 외에도, 기본적으로 공격자와 피해자 간의 일대일 대결이라는 구도, 그리고 보복운전의 공포 외의 다른 샛길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 끝까지 직진 또 직진하는 영화라는 점 등등에서 <언힌지드>는 <대결>의 후손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는 상영시간마저 1시간30분으로 같다.(<대결>은 원래 74분짜리 티브이용 영화였지만 극장 개봉판에서 90분으로 늘어났다.) 그렇다면 과연 <언힌지드>는 ‘21세기판 <대결>’로 자리매김되는 데 성공할 것인가.

일단 <대결>과 <언힌지드>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공격자의 신원공개 여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공격자의 왼팔(과 바짓자락과 구두 딱 한번)만 간신히 보여줬던 <대결>과는 달리 <언힌지드>는 공격자의 신원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들어간다. 도입부에서부터.

비 내리는 한밤중, 한 주택 앞에 멈춰 선 차 안 운전석의 남자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지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주택을 노려본다. 알약 몇 알을 입에 털어넣은 그는 성냥개비 한개를 매만진다. 그러는 내내 불길한 와이퍼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든다.(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거의 다스 베이더의 숨소리…까지는 아니겠다만, 충분히 불길하고도 존재감 넘치는 이 소리가 예고한 대로 남자는 곧바로 끔찍한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 그리고 영화는 쪼이기 공정 없이 그가 살해한 사람이 직장, 연금, 집 등등 모든 것을 앗아 간 이혼한 아내와 그의 새 남편이라는 사실까지 깔끔하게 밝혀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인간폭탄이고, 특히나 전남편과 분쟁 상태에 있는 이혼 여성에게는 더욱 위험한 폭탄이며, 그의 뇌관은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즉 ‘알려주지 않기’로 극도의 공포와 긴장을 확보한 <대결>과 정반대로, <언힌지드>는 공격자의 상태를 확실하게 밝히고 들어가 이후 있을 분노의 폭주 알리바이를 확보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프닝 크레디트에서는 전세계가 현재 겪고 있는 폭발 직전의 내압을, 교통체증/실업/극단적 경쟁/에스엔에스 중독/난폭운전/분노운전/경찰인력 부족/알아서 생존하기/불평등 등을 짤막한 클립들을 통해 제시한다. 이로도 모자라 그 마지막에는 “우리는 퇴보하고 있습니다”라는 코멘트까지 달아준다. 이는 물론 공격자가 품은 분노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려는 의도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예상대로 공격자의 사냥감이 될 ‘레이첼’(캐런 피스토리어스)은 하필 전남편과 재산을 두고 분쟁 중에 있는 이혼 여성이다.

아들과의 약속은 밥 먹듯 어기면서도 재산만은 물샐틈없이 노리고 있는 전남편 말고도, 그에게는 나름의 어려움과 짜증+분노의 알리바이가 충분히 있다. 꽉 막힌 길에서의 잘못된 경로 선택, 덕분에 학교에 지각하는 아들과 중요한 고객으로부터의 거래중단 선언 등등.

하여 레이첼은 오랜 신호대기 끝에 켜진 진행신호에도 멈춘 채 길을 막고 있던 차를 향해 모든 짜증을 실은 경적을 발사하고, 그는 사과를 함과 동시에 그의 ‘예의 없는 경적’에도 사과를 요구하는 공격자를 무시/경멸하는 실수까지 저지른다. 하여 공격자는 “힘든 날이 뭔지 제대로 알려주겠어”라는 한마디 뒤, 기나긴 극악무도 보복행각의 서막을 올린다.

‘추월 후 앞 가로막기’라는 기본메뉴로 시작하여 갈수록 점입가경을 이루는 그의 보복운전은 비록 <대결>에서와 같은 천재적인 컷 분할이나 리듬감은 아니어도, <분노의 질주>풍의 게임화된 카체이싱에 물린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수수하여 더욱 와닿는 효과를 안긴다. 때론 통째로 구르는 차 서너대보다도 튕겨 날아오르는 범퍼 부품 한 점의 펀치력이 더 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헤드카피대로, 이런 일은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 마당에야.

그런데 공격자는 단지 비대면 폭력운전에만 머물지 않고, 레이첼 주변의 사람들을 찾아가는 대면 폭력까지도 불사한다. 스포일러 우려로 내용을 밝힐 수는 없는 그의 사즉생생즉사적 극악행위는, 사실 보는 내내 ‘뭐 저렇게까지 수고스럽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만, 영화가 도입부에 깔아둔 ‘더 잃을 것 없는 남자’라는 설정 덕분에 최소한의 개연성은 유지한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관객이던가. 원인불명의 폭주를 거듭하던 중 문득 ‘나도 내가 왜 이러기 시작했는지 까먹었네…’라는 대사를 읊조리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레이(이정재)도 능히 견뎌낸 관객들이 아니던가.

도시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분노의 질주와 대소동, 경적 한번 잘못 울린 대가치고는 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lt;언힌지드&gt;. 누리픽쳐스 제공
도시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분노의 질주와 대소동, 경적 한번 잘못 울린 대가치고는 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언힌지드>. 누리픽쳐스 제공

캐릭터의 터미네이터화?

사실 진짜 문제는 공격자와 레이첼의 주변에 있다. 보자. <언힌지드>와 <대결> 사이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배경에 있다. 즉 <대결>의 배경은 텀블위드가 자동차보다도 많이 굴러다니는 황무지 고속도로인 반면, <언힌지드>는 어디든 연결되지 않은 곳 없고 어디든 막히지 않는 곳 없는 도시 한복판이다. 다시 말해, 구경꾼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공격자와 맞붙어야 하는 <대결>의 주인공과는 달리 <언힌지드>의 레이첼 주위에는 그녀의 대사마따나 ‘너무 많은 차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격자가 도로는 물론 어림잡아 세군데는 되는 지점들을 섭렵하며 그 화려한 분노·보복행위를 수행하는 동안 그를 제지하는 경찰은 없다. 그를 제지하는 선량한 시민 역시 단 한 사람뿐이다. 완전히 주차장이 된 길 한가운데에서 공격자의 차가 레이첼 차의 뒤를 계속 반복해서 들이받는 상황에서도, 또, 대낮 멀쩡한 식당에서 스포일러 우려로 차마 적어드릴 수 없는 범행을 벌이는 와중에도 제지는커녕 누구 하나 신고하는 사람도 없다. 물론 여기에는 ‘다들 자기 폰 보고 있기 바빠서’라는, 심지어 ‘그 광경을 찍고 에스엔에스에 올리기 바빠서’라는 세태비판적 알리바이가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 우리(미국, 한국, 그리고 전세계 공히)의 일상적 폰 중독의 강도가 정말로 그런 전신마비의 수준까지?

아니, 애초에 공격자는 그 전날 밤 엄청난 일을 저질러 뉴스에까지 보도된 중범죄자다. 그런 사람이 범행 시 탔던 차를 그대로 몰고 그런 광란의 보복극을 벌이고 다니는데도, 대략 영화 시작 1시간이 지나도록 경찰 헬기는커녕 순찰차 한번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뒤늦게 나타난 순찰차는 결정적인 대목에서 <대결>에 대한 오마주인 듯 보이는 우연의 개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인 레이첼은 아들을 굳이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 위험천만한 목표물인 자신의 차에 태우고 굳이 도주함으로써, <터미네이터 2>의 세라 코너와 존 코너의 형국으로 진입한다. 공격자 역시 이에 호응, 점점 터미네이터적 향취를 풍기며 예정된 막판의 한판 대결로 치닫는다. 그리고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두 모자와의 격한 몸싸움을 너끈히 수행해낸다.

이 터미네이터화 현상은, 말 그대로 야생곰처럼 몸집을 불린 러셀 크로의 연기 덕분에 그나마 다소는 완화되고 있는데, 아무튼 그리하여 공격자의 장렬하고도 꽤 아파 보이는 최후와 함께 레이첼은 그의 ‘같이 가자’풍의 죽음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데, 예정된 대로 성공한다.(설마 여기에서 스포일러라 돌을 던지진 않으시리라.) 그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흐름과 엔딩으로 대단원인가 했더니, 아아.

아아, 끝내 실패한 재치

스포일러 우려로 말씀드릴 수는 없겠으나, <언힌지드>의 마무리 장면은 지금까지의 모든 좌충우돌과 평지풍파를 ‘경적을 함부로 울리지 맙시다’라는 공익광고협의회적 메시지로 요약정리해버림으로써, 이미 한참 전 시작된 실망감을 확정 선고하고 만다. 점점 더 극소수의 손에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집중되고 있는, 그리고 그들의 탐욕–오만–위선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부른 분노가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장르적 우화로 읽힐 마지막 여지마저 깔끔히 날려버리는 이 엔딩은, 도입부에 설정된 ‘전남편 말려죽이는 이혼 여성에 대한 분노’라는 매우 협소하고도 편협한 출발점과 수미쌍관을 이루며 영화를 자두알보다도 작은 사이즈로 축소시키고 있다.

아니, 아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그냥 ‘실패한 재치’쯤으로 넘기는 게 좋겠다. 가뜩이나 실망하고 분노할 것 많은 요즘, 굳이 관람료를 내면서까지 그럴 필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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