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증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제 겨울도 계절의 반환점을 돌아 한참을 내달려 봄에 그 바통을 넘기려 하는 즈음이다. 스크린에도 웅크렸던 관객의 마음에 기지개를 켜게 할 따뜻한 영화 한 편이 찾아온다. ‘다름’을 ‘틀림’이라고 말하는 우리 사회의 흔한 편견에 다시 한 번 작은 깨달음을 던지는, 온기 가득한 영화 <증인>이다.
13일 개봉하는 영화 <증인>은 유력한 살인용의자를 변호하는 변호사 순호(정우성)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김향기)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법정드라마다. 과거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활동하며 시국사건을 도맡았던 변호사 순호는 가정형편 때문에 신념을 접고 현실과 타협해 거대 로펌에 들어간다. 로펌의 대표는 순호에게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기회가 걸린 사건을 제안한다. 살인사건 용의자의 국선변호인을 맡아 무죄를 끌어내라는 것. 사건 현장 맞은편에 사는 자폐아 지우는 용의자인 가사도우미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한다. 순호는 “자폐아의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무죄변론의 주요 전략으로 삼고, 지우를 법정 증인으로 세우기로 한다. 지우의 하굣길을 따라다니며 친분을 쌓는 순호.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들과 다를지언정 진실한 지우의 세계를 이해해가면서 순호는 자신이 가졌던 변호사로서의 초심을 되새기게 된다.
영화 <증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증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36.5℃보다 따뜻한 온기로 관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영화다. 예측 가능한 전개와 결말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담담하면서도 흡인력이 강하다. 법정드라마의 외피를 두르고도 팽팽한 긴장감이나 허를 찌르는 반전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과 소통에 더 무게의 중심추를 둔다. <완득이>(2011), <우아한 거짓말>(2013) 등을 통해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온 이한 감독은 <증인>에서도 장면마다 섬세하게 세공한 연출로 관객의 마음을 녹인다. 자본을 매개로 사회적 정의 구현을 오히려 해치는 거대 로펌 ‘김앤장’의 횡포, 얼마 전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생리대 안전성 논란 등 현실 속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간간이 눈에 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지우를 연기한 김향기는 아역 때부터 다져온 탄탄한 연기력으로 영화 전체의 리얼리티와 디테일을 살린다. 자칫 과장돼 보일 수 있는 자폐 연기를 한 치의 넘침도 부족함도 없이 담담하게 해낸다. 양복에 백팩을 맨 변호사 순호를 연기한 정우성은 그간 보여줬던 무게감을 모두 내려놓고 평범한 생활 연기를 펼친다. 그에게 이렇게 편안한 모습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역할에 잘 스며든다. 두 배우의 완벽한 연기 앙상블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영화 <증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지우는 순호에게 묻는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도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한 이 질문을 지금까지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던져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영화 <증인>은 이 대사 한 마디를 중심에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공법으로 관객의 마음을 공략하는 영화다. 그리고 이는 어떤 강력한 엠에스지(MSG)보다 진심을 녹인 대사 한 줄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노력해볼게.” 지우의 물음에 순호는 답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적어도 관객 모두가 순호와 같은 대답을 할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의 사회적 온도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따뜻해져 있지 않을까.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