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내 인생과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다

등록 2015-01-23 19:22수정 2015-10-23 18:41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자, 한 명씩 나와서 각자 학교 오는 길을 표시해봐.” 서울시 지도가 붙은 칠판 앞에 서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저마다의 등굣길을 지도 위에 빨간 펜으로 그어보라 하셨다. 그녀 차례가 되었다. 수줍게 펜을 움직여 선 하나를 긋고 내려갔다. 이제 그가 칠판 앞에 선다. 빨간 펜을 건네받는다. 정릉에서 연희동까지. 하나의 선 위에 포개지는 또 하나의 선. 그녀의 등굣길과 정확히 일치하는 그의 등굣길.

영화 <건축학개론>의 거의 모든 장면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 그때 승민(이제훈)이 지어 보인 표정 때문이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인연이라도 되는 양 괜히 우쭐해진 얼굴. 같은 버스 타고 다니는 걸 알았을 뿐인데 그녀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알게 된 것만 같아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바로 그 표정.

영화 <와일드>
영화 <와일드>
극장에선 나도 가끔 승민이가 된다. 영화의 어떤 순간이 내 삶의 어떤 순간 위로 포개질 때. 내 인생이 지나온 정류장을 지금 이 영화도 지나고 있구나, 하고 느껴질 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방금 본 영화하고 무슨 대단한 인연으로 엮인 양 괜히 우쭐해진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으로 극장을 나선다. 최근에도 운 좋게 그런 날이 있었다. 영화 <와일드>(사진)를 볼 때였다.

스물여섯살 여성 셰릴 스트레이드가 미국 서부를 종단한 실제 이야기. 사막과 눈길을 오가며 94일 동안 쉼없이 걷는 동안 발톱 여섯개가 빠져버린 고난의 행군. 1995년 여름의 그 길고 거친 여정이 17년 뒤 550쪽짜리 책이 되었고 다시 2년 뒤 115분짜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멋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장면은 여행 첫날 거대한 배낭을 메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배낭에 매달려 바둥거리는 그녀의 아침 위로 10년 전 내가 맞이한 그날 아침이 포개졌다. 호기롭게 사표 던지고 중남미 여행 6개월 여정을 시작하는 첫날.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않는 커다란 배낭에 매달려 나 역시 한참을 바둥댔더랬다. 그때의 우스꽝스럽던 내 모습과 제법 비슷한 포즈로 안간힘 쓰는 주인공을 보는 순간, 벌써 셰릴의 여행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알게 된 것만 같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는 배낭에서 덜어내야 할 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렇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비상시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덜어낼 수가 없었다. 그 배낭 그대로 어떻게 해서든 짊어지고 가야 했다.”

책 <와일드>에서 발견한 셰릴의 변명은 곧 나의 변명. 초보 여행자들의 흔한 실수, 혹은 집착.

1995년의 셰릴과 2005년의 내가 짊어진 건 단지 배낭이 아니었으니. 그건 차라리 불안감이었고 조바심이었다. 인생의 쉼표를 찍으러 떠나면서 지레 수많은 물음표만 걸머지고 비틀대는 꼴이었다.

다행히 10년 전 그 긴 여행에서 나는, 짐을 줄이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여행에서 나는, 내 배낭을 ‘어떻게 해서든 짊어지고’ 가는 법도 배웠다. 여행이란 결국 자기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지는 과정. 감당해야만 하는 짐은 또 꿋꿋하게 감당하며 걷는 것이 삶이니. 인생이 얼마나 가벼워지느냐도 중요하지만 내가 얼마나 튼튼해지느냐도 중요하다는 걸 그때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나처럼 셰릴도 그런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내가 걸은 길보다 훨씬 더 외롭고 험한 길을, 그 누구보다 씩씩하고 아름답게 걷는 여자였다.

영화 <인 디 에어>에서 강연에 나선 라이언 빙엄(조지 클루니)은 언제나 배낭 하나를 들고 연단에 오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배낭을 멨다고 상상하세요. 자, 이제 가진 걸 모두 넣으세요. 옷, 전자기기, 램프, 시트, 티브이…. 배낭은 점점 무거워지죠. 소파, 침대, 식탁, 차와 집도 넣어요. 배낭에 다 넣으세요. 걸어보세요. 힘들죠? 이런 게 일상입니다. 못 움직일 정도로 짐을 넣고 걸어가는 게 바로 우리의 삶이죠. 당신은 그 배낭에서 무엇을 뺄 겁니까?”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자기 인생이 무거워 한번이라도 바둥거려본 사람은 누구나 셰릴이다. 그 인생 그대로 ‘어떻게 해서든 짊어지고’ 걸어온 우리 모두는 이미 셰릴이다. 이제 무엇을 뺄 것인가. 대신 무엇을 채울 것인가. 이제 막 자신의 인생과 다시 사랑에 빠진 셰릴의 마지막 표정이 영화 <와일드>가 내놓은 답이다. 당장 짐을 꾸리고 싶게 만드는. 기어이 코끝이 찡해지고야 마는. 그녀의 그 희미한 미소가.

김세윤 방송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1.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2.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단독] 배우 이영애, 연극 ‘헤다 가블러’로 32년만에 연극 무대 복귀 3.

[단독] 배우 이영애, 연극 ‘헤다 가블러’로 32년만에 연극 무대 복귀

남태령 고개에서, 작가 한강의 시선을 질투하다 4.

남태령 고개에서, 작가 한강의 시선을 질투하다

천주교·불교 신속한 내란 비판...최대 개신교 조직 한국교총은 ‘침묵’ 5.

천주교·불교 신속한 내란 비판...최대 개신교 조직 한국교총은 ‘침묵’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