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가까운 미래. 모든 짐승의 ‘젖’이 별안간 ‘연기’처럼 사라지는 이상 현상, 일명 ‘유연화’(乳烟化)의 재난이 이 땅을 덮쳤다. 노인과 아동을 가리지 않고 도탄에 빠뜨린다 하여 학자들이 ‘노동(老童) 유연화’라 부른 대재앙. 젖 나게 일해 봐야 젖이 나오지 않았다. 생명의 근원이 마르자 세상은 빠르게 황폐해졌다. 온통 메마른 땅에 온종일 모래바람만 불어대는 세상.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밤낮 서로의 옥수수만 털어대는 시대. ‘노동 유연화’의 엄청난 재앙 앞에선 다들 속수무책이었다.
여기, 한 청년이 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그저 방그레, 노상 웃고만 서 있는 참 실없는 청년 방그래. 어느 날 몹시 솔깃한 구인광고를 본다. ‘우주비행 인턴사원 모집. 임무 완수 시 정규직 채용.’ 정.규.직. 이 귀하디귀한 세 음절을 혀끝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방그래는 금세 황홀해졌다. 지원자 미달로 얼떨결에 얻은 첫 직장.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회사 안에서 영어 닉네임을 쓰라고 했다. 문득 어제 본 야동 속 그녀가 떠올랐다. “스텔라, 콜 미 스텔라.” 한국인 인턴사원 방그래는 그렇게 ‘인턴 스텔라’가 되었다. 어느덧 우주에 나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4대강 사업에 수십년째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던 정부가 ‘이 돈을 차라리 진짜 천문학에 쏟아붓는 게 낫겠다’며 야심차게 추진한 사업. 지구를 대체할 별을 찾기 위해 주식회사 나라사랑(줄여서 ‘나사’(NASA))이 얼른 개발한 우주왕복선 ‘새마을호’.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대통령 말씀을 증명하기 전에는 지구로 돌아올 꿈도 꿀 수 없기에, 절박해진 대원들이 빛의 속도로 첫번째 후보지에 도착한다.
처음 이 별을 발견한 프랑스 천문학자의 이름을 따서 ‘아몰랑’ 행성으로 불리는 별. 3시간 남짓 탐사하며 죽다 살아 온 인턴 스텔라에게 회사는 그제야 알려준다. 이곳의 1시간이 지구에서는 7년이라는 걸. 네가 겨우 3시간치 시급 버는 동안 무려 23년4개월8일이 흘렀다는 걸. ‘벙찐’ 표정으로 지구의 친구가 보내온 23년치 메시지를 차례차례 열어보는 방그래. 부모 덕에 일찌감치 정규직이 된 친구였다. 정규직이라 그런지 녀석의 표정은 늘 밝았다.
“어흐흑. 쟨 연애도 했어. 아흑. 결혼도 했네. 이런 ×발. 애까지 낳다니!” 어떤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그저 방그레, 노상 웃고만 서 있던 참 실없는 청년 방그래가 그 순간 웃음을 잃었다. 정규직의 단란한 23년 세월 앞에서 아몰랑 행성의 3포 세대가 그만 목놓아 울고 말았다. 비정규직의 시간은 정규직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구나.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같은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구나. 허망한 눈물을 겨우 닦을 무렵 어느새 새마을호는 블랙홀로 빨려들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5차원 공간. 어라? 여기는? 노사정위원회 회의가 열리는 2015년의 현장을 책장 뒤에서 보고 있는 방그래. ‘노동 유연화’로 황폐화된 미래에서 온 그였기에, 정규직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비정규직의 시간을 몸소 체험한 그였기에,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낸다. ‘젖 나게’ 일해 봐야 ‘젖도 아닌 것’만을 손에 쥐게 하는 짓거리는 고만 멈추어야 한다! 그래서 간신히 바닥으로 떨어뜨린 세 글자. 고.만.해. 그런데 아뿔싸. 바닥에 부딪치며 글자들의 순서가 뒤섞이고 말았다. 해…고…만? “아냐! 아니라고! ‘해고만’이 아니라 ‘고만해’라니까!” 아무리 외쳐도 그들 귀엔 들리지 않는다. ‘노동 유연화’의 미래 앞에서 ‘해고만’ 자유로워진 현재. 그렇게 방그래의 손끝을 떠나버린 마지막 희망.
가까스로 지구로 돌아왔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으니 정규직 채용은 없던 얘기가 되었다. 이제 방그래가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하나.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을 찾는 것뿐이다.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될 행성을 먼저 찾아내야 산다. 이 나라에선 언제나 부동산만이 살길이었으니. ‘알박기’를 해야만 ‘알바’를 면할 수 있을 테니. 주인 없는 행성의 놀고 있는 논과 밭을 찾아 다시 우주로 떠나는 우리의 인턴 스텔라! 그의 담대한 뒷모습 위로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새겨지는데…. ‘우리는 전답(田畓)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재미핥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참 재미없는 글을 3년 가까이 썼다. 마지막 원고라도 재미있게 쓰고 싶었으나 쓰고 나니 역시 재미없음. 그동안 참고 읽어준 독자께 감사드린다. <한겨레>는 더 좋은 필자를 찾아낼 것이다. 늘 그랬듯이…. <끝>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