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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넌 혼자가 아니야

등록 2014-08-29 18:38수정 2015-10-23 18:47

영화 <안녕, 헤이즐>.
영화 <안녕, 헤이즐>.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자책과 자학, 분노와 냉소로 똘똘 뭉친 윌(맷 데이먼)을 품에 안고 숀(로빈 윌리엄스)은 같은 말을 정확히 10번 반복한다. 해줄 말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 한마디가 윌을 구했다. 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 윌이 듣고 싶은 유일한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 영화 <굿 윌 헌팅>(1997)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최고의 위로이자 최선의 격려.

그건 작가 존 그린이 에스더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12살 때 몸 안의 암세포를 처음 발견하고 16살 생일을 넘긴 직후 세상을 떠난 아이. 15살의 어느 날, 한 행사장에서 작가의 팬이라며 다가와 밝게 웃던 소녀의 입술 위에는 이미 거추장스러운 호흡기 줄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에스더는 바쁘게 자기 인생을 살았다. 마지막까지 예쁜 미소만 보여주다 떠났다. 그녀와 맺은 특별한 인연이 새로 쓰는 소설에 영감을 주었다. 에스더가 미처 다 살아내지 못한 16살이 주인공의 나이가 되었다.

“브루투스여, 우리가 노예인 것은 우리(의 운명을 말해주는) 별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잘못이라네.”(The fault, dear Brutus, is not in our stars, but in ourselves, that we are underlings)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대사를 거꾸로 뒤집어 책의 제목을 지었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The fault in our stars). 그 책을 영화로 만든 게 <안녕, 헤이즐>이다.

암으로 한쪽 폐를 잃은 16살 소녀 헤이즐(셰일린 우들리)이 역시 암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18살 소년 오거스터스(앤설 엘고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스무살을 함께 맞이하지 못할까 두려워도, “너를 만나 나의 삶은 무한대가 되었어” 하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끝까지 예쁘게 사랑하는 커플. 내내 위태롭지만 결국 위대한 사랑을 하고야 마는 두 사람에게 영화는 이렇게 말해준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그 뒤에 생략한 말은 이것이다. “너희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내 거 하고 싶은 만남, 내 거 하고 싶은 키스, 심지어 내 거 하고 싶은 이별까지. 온통 내 거 하고 싶은 순간들로 가득한 이 하이틴 로맨스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들과 쉴 새 없이 수다 떨 게 틀림없는 10대 관객들. <안녕, 헤이즐>을 보았다면 분명 며칠 동안 설레고 들떴을 헤이즐 또래의 아이들이 그날, 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내가 죽어가는 것보다 더 힘든 건 (내 부모가) 자식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것이다.” 영화 속 헤이즐의 대사 앞에서 또 한번 억장이 무너질 부모들을 유족으로 남긴 채, 250개의 무한대가 황망하게 사라졌다. 지금 나에게 세월호 참사를 정의하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헤이즐을 응원해야 할 아이들이 헤이즐보다 먼저 별이 되어 떠난 비극.

“네 잘못이 아니야.” 지난 넉달 동안 우리는 그렇게 말해주려 애썼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면 진짜 누구의 잘못인지 이제 밝혀낼 차례다. 그 당연한 일도 빨리 하지 못하는 현실을 가리켜 누구는 ‘정치의 실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종된 건 ‘정치’가 아니라 ‘염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충분히 ‘위로’를 하기도 전에 서둘러 ‘피로’를 들먹이는 자들의 사라진 염치 앞에서라면, 잘못은 우리 별에 있지 않다. 우리 ‘법’에 있다.

영화에서 헤이즐이 좋아하는 작가 피터 반 호텐(윌럼 대포)이 말한다. “삶은 삶으로부터 온다.” 유민 아빠의 삶은 유민이의 삶으로부터 올 것이다. 여당 의원들의 삶은 대통령의 삶으로부터 오는 모양이다. 그럼 나의 삶은 누구의 삶으로부터 오는가.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로빈 윌리엄스가 죽었다. 흐느끼는 타인의 삶을 끌어안고 다독이던 숀이 떠났다. 우리 모두 한번은 맷 데이먼이었다. 외로워서 괴롭고 괴로워서 외롭던 삶의 어떤 순간에, 우리 모두 한번은 그의 품에 안겨 위로받는 윌이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토닥이는 손길이 줄고, 나의 잘못이 아니야, 큰소리치는 자들이 늘어난 지금. 우리의 삶은 결국 숀의 삶으로부터 와야 하지 않을까. “네 잘못이 아니야.” 그에게서 건네받은 한마디에 이 문장을 더하기 위해 다른 이의 삶에 가닿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넌 혼자가 아니야.”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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