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개봉작 <스틸 라이프>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갑작스런 죽음을 피하지 못한 이들에 대해 언론은 늘상 엇비슷한 기사를 쓴다. 대개 이런 식.
“영정 사진을 본 조문객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예쁘게 생긴 딸을 잃은 심정이 오죽하겠느냐’며 더욱 안타까워했다.” “동료들은 이씨가 칠순 노모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였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김군은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모범생으로 알려져 주위를 더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좀 못생긴 딸을 잃으면 그 심정은 오죽하지 않은 걸까? 칠순 노모를 모시긴 했어도 딱히 극진하게 모신다는 느낌을 주지 않던 동료의 빈소에서는 슬그머니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게 될까? 줄곧 전교 1등을 놓친 것은 물론 한번도 전교 꼴등 자리를 놓친 적 없는 아이의 죽음은 주위를 훨씬 ‘덜’ 안타깝게 만들까? 나는 그게 늘 궁금하지만 기자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공부도 그럭저럭, 외모도 그냥저냥, 딱히 효심이 깊은 자식이 아니었거나 그닥 성실한 가장이 아니었던 사람의 죽음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영화 <데드 걸>(2006)의 미덕은 바로 그 ‘잊혀진 죽음’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첫 장면부터 시체로 등장하는 주인공 크리스타(브리트니 머피). 허허벌판에 드러누워 생을 마감하기 전, 그녀 인생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되짚는 영화. 알고 보니 크리스타는 헤픈 여자였다. 아무 남자에게나 웃음을 팔고 아무 차나 얻어 타는 여자였다. 그러다 죽었다. 세상 사람들이 별로 안타까워할 일 없는 인생인데도 관객은 결국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친 생전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혐오스런 크리스타의 일생’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 감독 캐런 몬크리프는 우연히 어느 살인 사건 배심원단에 참여한 뒤 이 영화를 구상했다. 희생자가 매춘 여성이라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그렇고 그런 여자가 그렇고 그렇게 살다 간 것 아니냐’고 생각한 감독. 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면서 그녀의 유품과 유족을 통해 죽은 여자의 삶이 재구성되었다.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끝내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 여자. 그 쓸쓸한 죽음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데드 걸>의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유영철 사건 당시 이른바 윤락 여성들의 ‘덜’ 안타까운 죽음에 침묵한 언론에 분개하여 영화 <추격자>의 시나리오를 쓴 나홍진 감독처럼.
이번주 개봉작 <스틸 라이프>에서도 시작부터 한 남자가 죽는다. 정확히 말하면, 죽은 채 ‘발견’된다.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몇주 전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뒤늦게 ‘발견’되고 막연하게 ‘추정’될 수밖에 없는 죽음. 이른바 고독사. 우리나라 행정용어로는 무연고 사망자.
영국 런던 케닝턴 구청 직원 존 메이(에디 마산)가 이번에도 혼자 뒷수습을 맡는다. 빈집에 들어가 유품을 정리하고 연락이 끊긴 유족을 수소문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추도문을 공들여 쓰고 아무도 챶아오지 않을 묘소를 정성껏 마련한다. 지난 22년 동안 해온 일이지만 이번 일은 더 특별하다. 쓸데없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쓴다는 이유로 해고를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존 메이는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이 마지막 업무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가족마저 외면한, 어느 성실하지 못했던 가장의 외로운 죽음을 최선을 다해서 외롭지 않게 만들어준다.
거듭되는 참사. 갑작스런 비극. 언론은 조금이라도 ‘더’ 안타까운 죽음을 찾아내려 애쓴다. 생전에 그들이 남긴 성취와 자취로 안타까움의 크기를 잰다. 하지만 처음부터 “더욱 아까운 생명”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아깝다. 그것이 인간이 누리는 거의 유일한 평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내가 안타까워해주지 않으면 그나마 안타까워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자의 죽음일 것이다. <데드 걸>과 <스틸 라이프>가 기억하려는 자들의 마지막일 것이다.
<스틸 라이프>를 만든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이 말한다. “한 사회의 품격은 죽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곧 살아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준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가 죽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가. 살아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또 어떤가. 외모, 성적, 학벌, 직업, 지위…. 어떤 죽음을 더욱 안타깝다고 여기는 이유들이 혹시 지금 어떤 삶을 더욱 홀대하는 이유가 되고 있진 않은가.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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