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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세상의 약자 ‘공주’들을 지키려면

등록 2014-05-09 19:20수정 2015-10-23 18:50

영화 <한공주> 속 한 장면.
영화 <한공주> 속 한 장면.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이 글은 영화 <한공주>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훌륭한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매슈 홉킨스라는 자가 있었다. 17세기 영국에서 마녀사냥꾼으로 명성이 높은 자였다. “일 년 동안 60명이나 형장에 보냈”을 정도로 위세를 떨친 그가 마녀를 판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용의자를 물에 던지는 것이었다. 팔다리를 묶고 담요에 말아 연못이나 강에 던졌다. 그리하여 가라앉으면 가족에게 무죄라고 위로하면 그만이었다. 물에 던져진 자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라앉지 않고 물에 뜨면 마녀라는 증거이므로 화형에 처해졌다.”(책 <대중의 미망과 광기>, 찰스 맥케이 지음)

오래전 읽은 책을 다시 꺼내 펼친 까닭은 영화 <한공주>(사진)의 마지막 장면이 좀처럼 잊히지 않아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아마도 ‘올해의 라스트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라고 쓴, 바로 그 마지막 장면. 주인공 공주(천우희)가 강물 속을 헤엄치고 있다. 물 밖으로 고개도 내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헤엄치는 공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때 나는 매슈 홉킨스가 강에 던진 여자들을 떠올렸다. 팔다리가 묶인 채 담요에 싸여 던져진 여자들. 바둥거리며 몸부림치다 이윽고 팔다리가 축 늘어졌을 여자들. 온몸을 쥐어짜 내지른 비명마저 강물이 삼켜버려 무서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을 여자들. 상상하기도 싫은 그 야만의 풍경이 다시 떠올랐다.

공주의 처지가 딱 그랬다.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하고 항변하는 공주의 입을 어른들이 틀어막았다. “알려져서 좋을 거 없잖냐”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따위 말을 끈처럼 이어붙여 공주의 팔다리를 묶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사과도 받지 못한 채, 마땅히 받아야 할 위로마저 받을 새 없이, 도망치듯 전학을 가야 했던 공주. 어른들은 열일곱살 소녀의 인생을 멋대로 들어올려 낯선 학교에 던져 넣고는 모른 체했다. 절망감에 빠진 공주가 그대로 가라앉으면 사람들은 ‘약한 년’이라고 혀를 차면 그만이었다. 가라앉지 않고 용케 헤엄쳐 나오면 ‘독한 년’이라고 수군대며 손가락질할 터였다. 그래서 공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물 밖으로 고개도 내밀지 못한 채 왔다갔다…. 그렇게 한참을 바둥대며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주의 인생을 밀어 넘어뜨린 자들은 오히려 당당하다. 공주를 짓밟은 가해 학생들의 부모는 끝까지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는다. ‘내 새끼’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피해자 앞에서 “내 새끼도 피해자”라며 악쓰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 새끼’를 위해서라면 ‘부끄러운 행동’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영화 속 부모들은 믿고 있다. 현실의 부모들이 그러는 것처럼.

2014년 대한민국. ‘방황하는 칼날’의 끝은 언제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향한다. 피해자들이 칼날을 움켜쥔 채 신음하는 동안 가해자들이 오히려 칼자루를 쥐고 큰소리치는 나라. 내 새끼, 내 식구, 내 사람, 내 돈…. 온갖 ‘내 것’들로 편을 짜서 ‘우리’를 밀쳐낸 자리마다 풍덩풍덩, 팔다리가 묶이고 담요에 싸인 약자들이 줄지어 내던져지는 나라. 어디에서나 구조는 더디다. 어디에서나 물살은 빠른데.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하지만 굽은 팔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안으로 굽는 팔을 기꺼이 밖으로 뻗을 줄 아는 것이 ‘인간’이라고 배웠다. 물에 빠진 사람에겐 손을 내미는 게 ‘문명’이라는 것도 배웠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내 새끼’들은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가만히 있으라고. 모른 체하라고. 너만 물에 안 빠지면 상관없다고. 남의 ‘곁’을 지켜주려 하지 말고 내 ‘편’을 만드는 데나 열중하라고. 그렇게 세상의 ‘공주’들이 홀로 남겨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21세기 문명 사회가 17세기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나면 누구든 나와 같은 질문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게 된다. 공주 곁에서 함께 바둥대며 헤엄치게 된다.

다시 책을 펼친다. ‘가만히 있기’를 멈춘 성난 군중들이 마침내 무엇을 했는지 써 있다. 우리의 ‘공주’들을 물에 빠뜨린 자들의 최후가 어때야 하는지 써 있다. “매슈 홉킨스가 군중들에게 포위되었다. 군중들은 홉킨스가 해오던 마녀판별법을 이용했다. 즉 담요에 말아 연못에 던졌고, 그는 익사했다.”(같은 책, 297쪽)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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