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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언젠간 견딜 만해지겠지

등록 2014-04-25 19:14수정 2014-04-27 13:50

영화 <래빗 홀>(2010)
영화 <래빗 홀>(2010)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모니터 속 노란 리본을 바라본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간절한 문장 위에 나비 모양 리본이 가만히 날개를 펴고 앉아 있다. 꿈틀꿈틀, 나비가 움직인다. 나풀나풀, 모니터 밖으로 날아오른다. 나비를 따라가본다. 고 작은 녀석이 용케 바다를 건너고 숲을 지난다. 이윽고 일본 바닷가 어느 집 거실.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의 한 장면으로 날개를 파닥이며 들어가는 노란 나비.

제일 먼저 문으로 다가간 건 둘째 아들 료타(아베 히로시)였다. 나비를 내보낼 셈이었다. 그때 엄마(기키 기린)가 소리쳤다. “문 열지 마. 준페이일 거야.” 그러고는 텅 빈 눈빛으로 비틀비틀 나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당신의 주름진 두 손을 뻗어 허공의 나비를 잡으려고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낮에 엄마는 큰아들 준페이에게 다녀왔더랬다.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려다 그만 목숨을 잃은 아들이다. “자식 묘를 찾는 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을까.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담담하게 비석을 쓰다듬고 돌아오는 길, 당신의 눈앞을 가로질러 날아가던 노란 나비 한 마리. 그때 엄마는 료타에게 말했다. “저건 말이지, 겨울이 되어도 죽지 않은 하얀 나비가 이듬해 노란 나비가 되어 나타난 거래. 그 얘기를 들은 뒤로 저 나비를 보면 왠지 딱해 보였어.”

하지만 그날 밤, 딱해 보이는 건 나비가 아니라 엄마였으니. 낮에 본 노란 나비가 당신을 따라왔다고 믿는 어미는, 그것이 아들의 환생이라고 믿고 싶은 어미는, 료타가 잡아 마당으로 날려보낸 나비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거실 끝에 우두커니, 마치 비석처럼 한참을 서 계셨다. 어제 그러했듯이 오늘도, 그렇게 문득문득 허공으로 텅 빈 눈빛을 향처럼 피워 올리는 준페이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또 눈물이 고인다. 내 모니터에서 날아간 노란 나비를 그 어두운 마당의 나뭇가지 끝에 리본처럼 남겨두기로 한다. 그리고 혼자 이 끔찍한 현실로 돌아온다.

자식 잃은 부모들의 흐느낌을 밤낮으로 들은 지 열흘이 되었다. 시인 T. S. 엘리엇은 “쾅 하는 소리가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끝났다고 했지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가라앉은 자식을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건져 올리는 부모 앞에서, 그는 틀렸다. 과연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이든 위로가 될 수나 있을까.

영화 <래빗 홀>(2010)에서 네 살배기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진 딸 베카(니콜 키드먼)는 역시 오래전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자신의 엄마에게 묻는다. 그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 11년이나 견디며 살고 있느냐고. 그때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글쎄, 무게의 문제인 것 같아. 언제부턴가 견딜 만해져. 결국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조약돌처럼 작아지지.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해. 하지만 문득 생각나 손을 넣어보면 만져지는 거야. 끔찍할 수도 있지.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냐. 그건 뭐랄까… 아들 대신 너에게 주어진 무엇. 그냥 평생 가슴에 품고 가야 할 것. 그래, 절대 사라지지 않아. 그렇지만… 또 괜찮아.”

가슴을 짓누르는 바위 같은 슬픔이 정말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조약돌처럼’ 작아질 수 있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아이들이 나비라도 되어 돌아오기를. 바위가 꼭 조약돌로 작아지기를. 절대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또 언제부터인가는 견딜 만한 아픔이 될 수 있기를. 그냥 무턱대고 믿고만 싶은 것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세상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란 게 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위로할 말을 찾고 싶어 바둥대던 나는 고작 영화 <굿 윌 헌팅>(1997)의 한 장면을 생각해낼 뿐이다.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품 안에서 흐느끼는 윌(맷 데이먼)에게 오직 그 한마디만 끝없이 속삭이는 숀(로빈 윌리엄스).

지금 항구에 주저앉아 자책하는 모든 이들이 숀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한다. 그가 토닥이는 어깨들마다 나비가 앉는 광경을 꿈꾼다. 노란 리본이 다시 나풀나풀, 모니터 밖으로 날아오른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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