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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흠칫…멈칫’ 우정이 싹트는 순간

등록 2014-02-14 19:23수정 2015-10-23 18:52

애니메이션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애니메이션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오늘만큼은 존댓말로 소개하고 싶어졌어요. 이 영화 앞에선 저도 모르게 공손해진달까요? 잘난 척 큰 소리로 떠벌리기보다는 가까운 사람들 귀에만 속닥속닥 속삭이고 싶은 영화. 가장 친한 친구 호주머니에 몰래 넣어두고 싶은, 참 예쁘고 사랑스러운 애니메이션.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벨기에 동화 작가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이 원작입니다.

얘기는 이렇습니다. 곰들만 사는 도시가 있어요. 땅밑에는 생쥐들이 모여 살죠. 어른 생쥐들은 어린 생쥐들에게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땅 위엔 무서운 곰들이 산단다, 곰들은 생쥐를 잡아 먹는단다, 그러므로 곰은 우리의 적이란다! 하지만 딱 한 사람, 아니 딱 한 마리. 셀레스틴만 생각이 다릅니다. 흥! 곰이랑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가 뭐람?

그러던 어느 날, 땅 위로 올라와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셀레스틴이 그만 거리의 쓰레기통에 갇히고 말아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춥고 긴 밤을 보낸 뒤 맞이한 아침. 쓰레기통 안의 생쥐를 처음 발견한 건 굶주린 곰 어네스트입니다. 얼른 셀레스틴을 들어 올려 한입에 집어삼키려는 그때. “아저씨! 지금 저를 먹으려는 거예요?” 흠칫 놀라 소리치는 생쥐. 덩달아 놀라며 멈칫하는 어네스트.

그때부터입니다. 바로 그 ‘흠칫’과 ‘멈칫’ 사이 짧은 순간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어쩌다 보니 곰은 자신의 먹이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또 어쩌다 보니 생쥐는 자신의 천적과 악수를 하게 되었죠. 이상하게 말이 잘 통하는 것 같더니만 이내 마음까지 통하기 시작했어요. 그렇습니다. 친구가 된 겁니다.

하지만 친구 하나를 얻은 대가로 다른 모두를 잃고 말죠. 곰을 미워하지 않은 죄로 고향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린 셀레스틴. 쥐를 해치지 않은 죄로 도시의 외톨이가 되고 마는 어네스트. 결국 둘은 경찰에게까지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함께 눈밭을 뒹굴고, 하수도를 내달리고, 첨벙첨벙 개울을 건너면서 멀리멀리 도망갑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습니다.

비슷한 우정을 전에도 본 적 있어요. 드라마 <주군의 태양> 덕분에 유명해진 일본 그림책 <가부와 메이 이야기>. 2005년 <폭풍우 치는 밤에>라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개봉했다가 제목만 <가부와 메이 이야기>로 바꾸어 얼마 전 다시 개봉한 이 작품은, 어느 폭풍우 치는 밤을 외딴 오두막에서 함께 보낸 염소와 늑대가 주인공이죠. 어둠 속에서 서로의 목소리에 의지해 폭풍우 치는 밤의 무서움을 이겨낸 둘이서 날이 갠 뒤 다시 만나 처음 상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역시 흠칫! 어김없이 멈칫! 이윽고 말이 통하고 곧 마음까지 통하게 되는 시간들.

늑대 가부는 배가 고픈데도 염소 메이를 잡아 먹지 않아요. 친구니까. 녀석도 살아야 하니까. 메이가 없었다면 폭풍우 치는 밤이 너무 무서웠을 테니까. 그래서 끝까지 우정을 지켜냅니다. “저렇게 맛있게 생긴 녀석과 친구로 지내다니. 용서할 수 없어!” 다른 늑대들이 아무리 윽박질러도 꿋꿋하게 메이의 친구로 남겠다고 다짐합니다.

결국 두 편 모두 우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에게 용기와 헌신을 가르치고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편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키워낸 혐오와 차별을 은유하고 있죠. 임대주택 아이들이 내 아이와 같은 문으로 통학하는 걸 막는 분양주택의 어른들은 어떤가요? 이주노동자를 멀리 떼어놓고 싶어하는 어른들은요? “저렇게 꼴보기 싫은 녀석들과 친구로 지내다니. 용서할 수 없어!” 사납게 눈을 치켜뜬 어른들이 매일 누군가를 열심히 울타리 밖으로 밀쳐내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닌가요? 그러므로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을 보고 배워야 할 사람은 정작 어른들입니다. 폭풍우 치는 밤의 외딴 오두막에 어른들이 먼저 들어가봐야 합니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처음으로 다 읽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말로 내뱉으면 소중한 뭔가가 빠져나갈 것만 같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읽어야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때를 회상하며 쓴 글입니다.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을 보고 난 뒤 제 기분이 딱 그랬습니다. 말로 내뱉으면 소중한 뭔가가 빠져나갈 것만 같아,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있게 되더군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그리고 <가부와 메이 이야기>. 한 번은 보아야 합니다. 두 번 보면 더욱 좋습니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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