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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홀로 어두운 밤터널 지날 때 찰리를 생각해

등록 2013-04-12 19:45수정 2013-07-15 16:08

영화 <월플라워>
영화 <월플라워>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친구에게.

영화를 한편 봤어. 참 괜찮은 영화더라. 너도 알지? 세상 거의 모든 ‘괜찮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별로 괜찮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녀석들이라는 걸. 그러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지.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여주는 그 누군가의 품에 안겨 실컷 흐느끼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들은 별로 괜찮지 않던 자신의 과거와 결별할 힘이 생겨. 영화 <월플라워>의 주인공 찰리(로건 러먼)처럼 말이야.

16살.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찰리는 책 좋아하고 옛날 음악 좋아하고 남의 이야기 들어주는 걸 좋아해. 하지만 바로 그런 걸 좋아한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은 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식당에서도 파티에서도 찰리는 늘 혼자야. 아마도 왕따? 그보단 투명인간?

얼마 전 힘든 일을 겪었고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힘든 일을 겪고 싶지 않지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 1385일의 시간 역시 아무래도 꽤 힘든 시간이 될 것만 같아 불안하던 어느 날. 남들이 ‘괴짜’라고 부르는 친구들, 하지만 찰리가 자신있게 ‘진짜’라고 부르는 친구들을 만나. 샘(에마 왓슨)과 패트릭(에즈라 밀러). 자주 어깨를 토닥여주고 꼭 필요할 때 힘껏 안아준 그 아이들 덕분에 질풍노도의 16살을 무사히 넘기고 제법 괜찮은 17살의 봄을 맞이하기까지, 찰리가 허둥대며 보낸 1년의 시간이 영화에 담겨 있어.

그중에서도 나는, 영화 초반 셋이 함께 차를 타고 질주하는 터널 장면이 좋아. 데이비드 보위의 ‘히어로스’(heroes)를 크게 틀고 차 밖으로 몸을 내밀어 두 팔을 날개처럼 벌린 채 소리치는 샘. 세상에서 가장 예쁜 그 ‘터널 속의 새’를 보고 찰리는 사랑에 빠져.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세 사람은 다시 한번 터널을 질주하지. 이번엔 찰리가 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온몸으로 바람을 느껴. 난 이 두번의 터널 장면이 참 좋더라.

터널 끝에 만날 세상을 위해 터널 안의 어둠을 묵묵히 참고 견디라며 훈계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일 거야. 터널의 끝에 도달했을 때가 아니라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취해야 할 어떤 제스처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고 느꼈어. 날지 못해도 상관없어. 날개를 접지 않았다는 게 중요해. 같이 안간힘 쓰는 친구가 곁에 있으면 괜찮아. 터널 안을 밝히는 전등이 규칙적으로 차 지붕을 타고 넘듯, 함께 파닥거리며 키득대던 한때의 기억이 때때로 우리 삶의 육중한 지붕을 날렵하게 타고 넘어올 거야. 그 ‘한때의 기억’ 덕분에 그래도 가끔은 웃을 일이 생길 거야.

그런데 어쩌지? 그 희망 가득한 터널의 끝에서 난 언젠가 뉴스에서 본 엘리베이터를 떠올렸어. 터널과 달리 바람 한점 불지 않아 그저 고요하기만 했던 엘리베이터. 지상과 옥상을 연결하는 수직의 터널 안에 날개를 접고 서성이는 아이가 있었어. 자신의 집이 위치한 4층 버튼을 눌렀다가 제자리에서 한바퀴 돈 뒤 14층 버튼을 다시 누른 아이.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보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추자 ‘닫힘’ 버튼을 누르고 14층에 도착해서야 내린 아이. 폐회로티브이 화면 속 그 아이는 아파트 1층 출입구 위에서 발견됐다던가. 14층 창 밑에 가방과 신발만을 남겨둔 채.

시인 김소연은 말했어. “물에 빠진 사람을 동정한다면 우리는 119 구조대를 부를 테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연민한다면 팔을 뻗어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래도 나는 저 사람 같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고 이질감을 느낀다면 그건 동정, 반대로 ‘그래, 저 사람도 나와 다를 바 없구나’ 하고 동질감을 느낀다면 그건 연민. 그래서 샘과 패트릭을 만나기 전 내내 혼자였던 찰리에게도, 샘과 패트릭 같은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끝내 혼자인 채로 14층에서 뛰어내린 소녀에게도 난 동정이 아니라 연민을 느껴.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친구야.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혼자 있을 수밖에 없어서 혼자 있는 사람의 미안함을 너는 아니? 내가 겨우 이런 아이라는 사실이 내 자신에게 미안해서 자꾸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 혹시 아니? 혼자였던 나에게 처음 말 걸어 주고 처음 같이 밥 먹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은?

찰리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혼자였던 순간이 짧게나마 네 인생에도 있었다면, 하지만 다행히 혼자로 남아 있지 않게 손 내밀어 준 친구들이 있다면, <월플라워>는 너에게도 분명 참 괜찮은 영화로 기억될 거야. 어두운 밤 터널을 지날 때면 자꾸 생각나는 영화일 거야. 그리고 또 그런 영화일 거야. 이렇게 미지의 친구에게 편지 한통 쓰고 싶게 만드는. 더 스미스와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를 열심히 찾아 듣게 만드는. 처음엔 연민하던 찰리를 결국엔 질투하게 만드는.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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