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지난해 이맘때. 팔자에도 없는 라디오 디제이(DJ)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나운서이면서 조합원이던 디제이가 <문화방송>(MBC) 노동조합 파업에 동참하면서 누군가는 그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문화방송의 많은 프로그램 중에서 그래도 가장 ‘문화’적인 ‘방송’의 명맥을 잇는 참 근사한 프로그램의 작가인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라 생각했거늘, 에구머니나 디제이라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 몹시 은혜로운 자리를 얼떨결에 꿰차고 앉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직접 쓴 오프닝 멘트를 읽었다.
“영화 <헬프>는 1960년대 미국 남부의 한 작은 마을이 배경입니다. 차별받는 흑인들의 목소리를 담아 책을 쓰기로 결심하는 백인 여자 스키터. 다른 백인들은 그녀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죠. 왜 평온한 마을에 문제를 일으키려 하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때 스키터가 대답합니다. ‘이미 문제는 있었어.’ 세상의 진짜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를 때 생깁니다. 문제를 문제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짜 문제입니다.”
‘방송인’의 길 대신 ‘언론인’의 삶을 선택한 우리 디제이를 우회적으로 지지하며 쓴 오프닝 멘트. 너무 우회적이어서 혹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까봐 끝에 이런 말도 덧붙였다. “연민이 연대로 발전할 때 세상을 바꾸는 의미있는 변화가 생기는 건 1960년대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언론의 역할, 기자와 작가의 사명까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한달이 지나도 파업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송국 안의 사람들이 점점 예민해지는 동안 방송국 밖의 사람들은 점점 심드렁해지고 있었다. 그 무렵 이런 오프닝 멘트를 쓰고 읽었다.
“알래스카 추운 바다에 고래 세 마리가 갇혀 있습니다. 당장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환경운동가 레이첼은 이런 말로 설득하죠.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을 느끼고 나약하고, 또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들이 약하기 때문에 돕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지금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제든 그들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빅 미라클>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그 일이 불거졌다. ‘사장님’의 이상한 법인카드 사용내역. 사장님 애창곡이 ‘제이(J)에게’라는 우스갯소리에 쓴웃음 지으며 말없이 쓴 커피만 홀짝이는 방송국 사람들을 자주 보던 때였다. 어차피 비정규직, 그래 봐야 프리랜서. 이것은 대타 디제이의 패기? 아니면 객기?
“정부는 그 기사를 내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습니다. 정부가 원치 않아도, 국민이 원하는 진실이라면 마땅히 보도하는 게 기자의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회사 전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는 뉴스 프로그램 방영을 앞두고 사장이 그를 불러요.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난 오늘… 자네 편이네. 그리고 내일도 물론.’ 영화 <굿 나잇 앤 굿 럭>에 나오는 어느 방송사의 풍경입니다.”(<이주연의 영화음악> 2012년 2월29일 오프닝)
매카시즘 광풍이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 미국 <시비에스>(CBS) 방송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에드워드 머로가 정부의 온갖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언론인의 정도를 걸었던 실제 이야기. 조지 클루니가 연출한 <굿 나잇 앤 굿 럭>의 방송사 사장님 이야기로 시작한 그날의 오프닝을 이런 말로 마무리지었다.
“주인공 에드워드 머로도 멋있지만 함께 위험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그를 지지하고 지켜주는 동료들이 저는 더 멋있더라구요. 특히 사장님! 사실 기자들이 제대로 된 기사를 써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의 모든 영화에는 주인공 대신 온갖 외압을 막아주는 데스크나 사장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주인공 혼자 아무리 날고 기어도 어떤 의미있는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가 해임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퇴직연금 3억여원을 알뜰하게 챙기려고 해임이 확정되기 전에 자진 사퇴를 선택했다는 의혹도 전해들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 입으로 직접 읽을 일도 없던 일련의 오프닝 멘트. 덕분에 잠깐이나마 디제이의 꿈을 이루었지만 애초에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꿈이었다. 그 역시 애초에 그런 식으로 사장의 꿈을 이루어서는 안 되었던 것처럼.
봄이다. 하지만 징계와 보복이라는 추운 바다에 갇혀 한숨짓는 여의도의 고래들에겐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헬프’를 외치며 구조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우리 사회가 부디 ‘빅 미라클’로 응답하기를. 그날을 기다리며 모두들 ‘굿 나잇 앤 굿 럭’!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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